
아스파라거스를 ‘왕의 채소’라 부르는 말은 언뜻 과장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꽤 설득력이 있습니다. 아스파라거스는 씨를 뿌린 뒤 바로 수확할 수 있는 채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땅 속에서 힘을 축적하고, 긴 시간을 견딘 뒤에야 비로소 식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첫 수확까지는 꼬박 3년이 걸리고, 이후에도 잘 관리하면 15년 가까이 반복 수확이 가능합니다. 하루에 최대 15㎝까지 자랄 정도로 생명력도 강합니다. 기다림 끝에 기쁨이 온다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채소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스파라거스에는 자연스럽게 ‘귀하다’는 이미지가 따라붙습니다.
프랑스 루이 14세는 아스파라거스를 너무 좋아해서 아스파라거스 전용 재배 온실을 마련하고, 계속 재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아스파라거스에 ‘왕의 채소’라는 이름을 내리기도 했죠. 그래서인지 이때부터 아스파라거스는 귀족들의 식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생김새도 어딘가 고급스럽습니다. 곧게 뻗은 줄기, 단정한 실루엣, 과하지 않은 색감. 접시에 올렸을 때 유독 더 근사해 보이는 이유입니다.

아스파라거스는 크게 초록색, 흰색, 보라색 아스파라거스로 나뉩니다. 색에서 차이가 보이는 것처럼 맛도 차이가 있습니다.
초록색 아스파라거스는 햇빛을 받으며 자라 특유의 싱그럽고 또렷한 풍미를 지닙니다. 가장 실용적이고 대중적입니다. 흰색 아스파라거스는 빛을 차단하고 기르기 때문에 엽록소가 생기지 않아 전체가 하얀 색을 띕니다. 그리고 수분을 가득 머금고 있어 부드럽고 섬세한 식감 덕분에 열광하는 미식가들이 많습니다.
초록색과 흰색 아스파라거스에 비해 대중적이지 않은 보라색 아스파라거스는 한정된 수량 탓에 미식가들 사이에서 귀하게 대접받는 품종입니다. 불에 익히면 보랏빛이 초록색으로 변하고 고소한 견과류 맛이 나죠. 미식가들은 보라가 주는 색감 자체를 즐기기 위해 얇게 슬라이스해서 주로 샐러드로 먹습니다.
숙취에도 아스파라거스?
영양 면에서도 아스파라거스는 이름값을 합니다. 중간 크기 6~7줄기를 먹어도 약 15㎉에 불과할 만큼 열량은 낮고, 식이섬유는 풍부합니다. 특히 엽산 함량이 눈에 띕니다. 셀러리보다 6.5배 많은 엽산이 들어 있어, 7줄기 정도만 먹어도 하루 필요 엽산량의 3분의 1가량을 채울 수 있습니다. 꽃봉오리처럼 뾰족한 윗부분에는 루틴(rutin) 성분도 있습니다. 활성산소를 억제하는 항산화 성분으로, 고혈압과 동맥경화 예방에도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낮은 칼로리에 영양은 풍부하니 사랑받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흥미롭게도 아스파라거스는 숙취 해소에도 도움이 됩니다. 숙취 해소의 핵심 성분으로 알려진 아스파라긴산(aspartic acid)은 이름부터가 아스파라거스에서 유래됐습니다. 이 아미노산은 1806년 아스파라거스 즙에서 처음 발견되어 그 이름이 붙었습니다. 아스파라긴산은 신진대사를 촉진해 간이 알코올을 분해하는 과정을 돕고, 루틴을 비롯한 항산화 성분은 알코올로 인한 간세포 손상을 줄이는 데에도 작용합니다.
아스파라거스를 더 맛있게 먹는 법
맛있게 먹는 방법도 어렵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메뉴에도 잘 스며드는 채소입니다. 굵은 아스파라거스는 굽거나 로스팅했을 때 깊은 풍미가 살아나고, 얇은 것은 볶음이나 파스타 토핑으로 가볍게 활용하기 좋습니다.

기름이나 버터에 살짝 볶으면 고소함과 은은한 단맛이 올라옵니다. 여기에 마늘과 토마토, 혹은 피망을 곁들여 소금과 후추를 뿌리고 오븐에 구우면 재료 본연의 향과 식감이 또렷하게 살아납니다.
독일식으로는 껍질을 벗긴 아스파라거스를 소금물에 살짝 데친 뒤 햄이나 감자, 홀랜다이즈 소스 또는 버터 소스와 함께 먹습니다. 세계에서 1인당 아스파라거스 소비량이 가장 많은 독일다운 방식으로, 단순하면서도 완성도가 높습니다. 한번 데친 뒤 프로슈토나 베이컨으로 감싸 올리브오일을 두르고 구우면 간단하지만 만족스러운 요리가 됩니다.

조리 시간이 길지 않고, 양념이 과하지 않아도 충분히 맛있다는 점도 아스파라거스의 큰 장점입니다. 덥고 습한 날씨가 시작될수록 복잡한 요리보다 간단한 요리가 당기기 마련인데, 아스파라거스는 바로 그 간결함 속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채소입니다. 올리브오일과 소금만으로도 한 접시가 완성되고, 버터를 더하면 저녁 식탁에 어울리는 깊이가 생깁니다. 반숙 달걀이나 치즈를 곁들이면 소박한 브런치가 금세 근사한 한 끼로 바뀝니다.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아스파라거스 축제
아스파라거스의 존재감은 세계 곳곳의 축제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급스럽고 건강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유쾌하고 대중적인 축제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아스파라거스에 유난히 진심입니다. 독일에 아스파라거스 철을 뜻하는 단어인 슈파겔차이트(Spargelzeit)가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그중 베를린 근교의 베엘리츠(Beelitz)는 독일을 대표하는 아스파라거스 산지로 꼽힙니다. 이 지역의 상업적 재배 역사는 1861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카를 프리드리히 빌헬름 헤르만(Carl Friedrich Wihelm Herrmann)이 재배를 시작했고, 1900년 무렵에는 베를린 중앙시장에 공급하는 주요 산지가 됐습니다.
베엘리츠의 첫 아스파라거스 축제(Beelitz Spargelfest)는 1934년, 수확철에 일한 계절 노동자들에게 감사를 전하기 위해 열렸습니다. 지금은 축제 뿐 아니라 유럽 아스파라거스 박물관(Europäisches Spargelmuseum)까지 생겨, 재배 기술과 지역 경제, 식문화는 물론 예술과 의학 속 아스파라거스 이야기까지 함께 전합니다.
베엘리츠 시청 공식 홈페이지: https://beelitz.de/spargelfest/
독일 아스파라거스 문화의 또 다른 상징은 ‘아스파라거스 퀸(Spargelkönigin)’입니다. 지역을 대표하는 여왕이 시즌 개막과 홍보를 맡으며, 농산물 수확철이 마치 왕실 행사처럼 대전환됩니다.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를 귀하게 여기는 문화 덕분에 레스토랑마다 관련 메뉴가 쏟아지고, 사람들은 제철이 끝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먹으려 서두릅니다. 독일에서 아스파라거스가 왜 ‘봄의 흰 금(white gold)’이라 불리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여기서 독일인들이 화이트 아스파라거스에 열광하는 이유를 살펴보자면, 지금이 아니면 1년을 기다려야하기 때문입니다. 초록색 아스파라거스는 하우스 재배나 남반구를 통해 쉽게 먹을 수 있지만, 최고급 흰색 아스파라거스는 매년 4월 중순부터 시작해 정확히 6월 24일(성 요한 축일)에 수확을 마감합니다. 이 약 두 달의 엄격한 유통기한이 주는 조바심 덕분에 매년 봄 독일인들은 레스토랑으로 바삐 향하고, 대대적인 ‘여왕의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샌호아킨 아스파라거스 페스티벌(San Joaquin Asparagus Festival)은 미국 서부를 대표하는 아스파라거스 축제입니다. 1986년 축제 초창기, 이 지역은 미국 아스파라거스 생산량의 약 40%를 담당할 정도로 상징성이 컸습니다. 아스파라거스 파스타, 부리토, 베이컨 말이 뿐 아니라 아스파라거스 콘도그, 아이스크림, 추로스 같은 독특한 메뉴도 등장합니다. “아스파라거스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를 보여주는 무대에 가깝습니다.
미시간주 하트(Hart)에서 열리는 내셔널 아스파라거스 페스티벌(National Asparagus Festival)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아스파라거스 축제입니다. 오세아나 카운티(Oceana County)는 미국 내 주요 아스파라거스 생산지 중 하나로, 매년 6월 둘째 주말 수확기를 기념해 축제가 열립니다. 미국 유일의 ‘아스파라거스 퀸’ 선발 행사로도 유명한데, 선발된 퀸은 지역 농업과 생산자를 알리는 홍보대사 역할을 맡고 장학금도 받습니다. 이 밖에 퍼레이드, 퀼트 쇼, 자동차 전시, 5㎞ 달리기, 푸드쇼 등 볼거리도 다양합니다.

영국의 브리티시 아스파라거스 페스티벌(British Asparagus Festival)은 매년 성 조지의 날(St George’s Day)인 4월 23일에 맞춰 영국산 아스파라거스의 수확 시작을 알립니다. 이 축제의 가장 재미있는 전통은 시즌 첫 수확분인 첫 100단의 아스파라거스를 옮기고 경매하는 행사입니다. 최근에는 증기기관차를 타고 이동하는 아스파라거스 익스프레스 행사도 이어졌고, 어떤 해에는 병원이나 해외 기관으로 보내져 지역 농산물의 상징성을 넓히기도 했습니다. 지역 마스코트인 거스 더 아스파라거스 맨(Gus the Asparagus Man)이 모리스 댄스와 함께 개막 행사에 등장해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것도 빠질 수 없는 볼거리입니다.
여름 식탁에 어울리는 채소

아스파라거스는 흔한 듯 흔하지 않습니다. 익숙하지만 어딘가 특별하고, 평범한 식탁에 올려도 자연스럽게 멋이 납니다. 볶아도, 구워도, 샐러드에 곁들여도 잘 어울리는 데다, 손길을 조금만 더하면 근사한 요리가 됩니다. 올 여름, 식탁에 아스파라거스를 조금 더 자주 올려보는 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