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과 디지털 기기만 있으면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전 세계를 옮겨 다니는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 최근 디지털 노마드 사이에서 체코 프라하는 꿈의 도시로 불립니다. 서유럽의 도시들보다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생활비와 안정적인 디지털·교통 인프라를 갖추고 있으며, 시내 곳곳에는 수십 개의 코워킹 스페이스(Coworking Space)들과 커뮤니티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체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도 있습니다. 2023년부터 디지털 노마드 프로그램(Digital Nomad Program)을 운영하며 IT·기술 종사자들이 최대 1년간 체코에 머물며 일할 수 있도록 장기 비자 발급 절차를 간소화해주고 있습니다. 한국을 비롯해 일본·영국·미국·캐나다 등 지정된 국가들의 국민들은 지원이 가능합니다. 작년부터는 마케팅 직군까지 대상이 확대되며 문턱이 한층 낮아졌습니다.
디자인 스튜디오와 독립 패션 브랜드가 모여든 카를린과 홀레쇼비체,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지슈코프, 비노흐라디를 중심으로 프라하에서 살아가는 디지털 노마드의 하루를 따라가 봅니다.
08:30 카를린_ 커피로 여는 아침
카를린(Karlín)은 프라하 8구, 도심 동쪽에 자리한 동네입니다. 지형이 대체로 평탄하고 거리가 반듯하게 이어져 있어 걸어서 돌아보기 좋습니다. 이 동네의 운명을 크게 바꾼 사건은 2002년의 대홍수였습니다. 블타바강(Vltava)이 범람하면서 카를린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복구 과정이 오히려 재생의 기회가 됐습니다. 오래된 산업시설과 건물이 새롭게 정비됐고, 그 자리에 사무실과 주택, 레스토랑, 디자인 공간이 들어서면서 프라하를 대표하는 도시재생 지역으로 거듭났습니다.
프라하 여행을 카를린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단연 커피입니다. 크르지시코바(Křižíkova), 소콜롭스카(Sokolovská), 샬도바(Šaldova) 거리를 중심으로 반경 몇백 미터 안에 프라하 대표 로스터리의 플래그십, 소규모 스페셜티 카페, 자체 베이커리를 갖춘 비스트로가 촘촘히 몰려 있습니다. 어디를 들어가도 실패 없는 커피를 마실 수 있습니다.

‘나의 커피 한 잔’이라는 뜻의 무이 샬렉 카비(Můj šálek kávy)는 체코 스페셜티 커피의 대명사인 더블샷(Doubleshot) 로스터리의 플래그십 카페입니다. 농장에서 직접 사들인 원두를 로스팅합니다. 아침 식사 명소로도 유명한데, 신선한 달걀을 완벽한 수란으로 익혀 낸 에그 베네딕트가 대표 메뉴입니다.
소콜롭스카 거리에 자리한 작은 테이크아웃 전문점 카페 카를린(Kafe Karlín)도 유명합니다. 이곳은 레스펙트 커피(Respekt Coffee)를 비롯한 체코 로컬 독립 로스터리의 질 좋은 스페셜티 원두를 들여와 씁니다. 크르지시코바 메트로역으로 향하는 길에 가볍게 들러 훌륭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즐기기에 좋습니다.
09:20 노마드의 베이스캠프
노마드들이 카를린을 베이스캠프로 삼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현대적 인프라를 갖춘 코워킹 스페이스가 있고, 트램과 메트로로 도심과 곧장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워크라운지 카를린(WorkLounge Karlín)은 핫데스크부터 프라이빗 오피스, 미팅룸까지 두루 갖춰 몇 시간짜리 조용한 작업 자리로도, 장기 오피스로도 쓸 수 있는 유연한 공간입니다. 데이패스로 하루만 이용해볼 수도 있어서 잠시 머무는 노마드에게 특히 유용합니다. 프로페셔널하면서도 위압적이지 않은 분위기에 커피를 마시거나 다른 멤버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공용 공간도 따로 마련돼 있습니다.
카를린은 한 블록 건너 하나씩 인상적인 건축이 자리한 동네입니다. 옛 양철 공장 홀의 박공벽을 유지하며, 유리 증축을 더해 오피스로 재탄생한 코르소 카를린(Corso Karlín)은 19세기 공장 단지의 뼈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코르소 카를린 안에 디자인 스튜디오들이 들어섰고, 이 스튜디오들이 모여 카를린만의 멋을 만듭니다. 낡은 병영을 개방형 문화 공간으로 되살린 카사르나 카를린(Kasárna Karlín)에서는 옛 군용 수영장을 개조한 ‘바젠(Bazén)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안뜰의 갤러리와 여름 야외 영화관을 둘러보면 좋습니다.
10:30 지슈코프
카를린 남쪽에는 비트코프 언덕(Vítkov)이 있습니다. 이 언덕을 넘으면 지슈코프(Žižkov)가 나옵니다. 하지만 언덕 아래를 통과하는 지슈코프 터널(Žižkovský tunel)을 이용하는 편이 더 빠릅니다. 카를린에서 지슈코프까지는 이 터널을 지나 걸어서 약 15~20분이면 닿습니다.

1953년 완공된 지슈코프 터널은 길이 303m의 보행자 통로입니다. 냉전 시대에는 대피시설로도 활용할 수 있도록 지어졌습니다. 카를린 쪽 입구 위에는 스프레이로 적어놓은 한 문구가 있습니다. ‘네보이(neboj)’. 즉 ‘두려워하지 마’라는 뜻으로, 티모(Timo)라는 지역 예술가가 2017년 무렵 지하도를 무서워하지 말고 이용하라는 격려의 의미를 담았다고 하네요. 그렇게 터널을 빠져나오면 지슈코프입니다. 프라하에서도 손꼽히게 개성이 강한 동네죠.
카를린보다 조금 더 거칠고 골목은 가파르며, 오래된 펍과 독립 문화공간이 곳곳에 자리합니다. 프라하에서 펍이 가장 밀집한 지역 중 하나로 꼽히며, 비교적 저렴한 임대료와 자유분방한 분위기 덕분에 예술가와 디지털 노마드들이 즐겨 찾는 보헤미안 지구이기도 합니다.

지슈코프 TV 타워(Žižkovská televizní věž)는 누군가는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건물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거대한 우주선 같다고 말하는 랜드마크입니다. 체코의 조각가 다비드 체르니(David Černý)의 작품 ‘기어오르는 아기들(Miminka)’이 기둥을 타고 오르는 바로 그 탑입니다.

지슈코프의 블코바 거리(Vlkova)에 자리한 프라초브나(Pracovna)는 체코어로 ‘작업실’이나 ‘서재’를 뜻합니다. 이름처럼 노트북을 펼치고 일하기 좋은 공간입니다. 2014년 문을 연 이곳은 약 400㎡ 규모의 복합 작업공간입니다. 카페와 바, 코워킹 공간, 회의실은 물론 팟캐스트·영상 스튜디오까지 갖추고 있죠.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즐긴다’는 문화를 지향하는 곳입니다. 공간 안에서 원하는 자리로 옮겨 다닐 수 있어, 한곳에 오래 앉아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분위기를 바꾸기에도 좋습니다.
12:30 이르자크에서 점심
지슈코프를 지나 현지인들이 ‘이르자크(Jiřák)라고 부르는 비노흐라디(Vinohrady)의 이르지호 즈 포데브라트 광장(náměstí Jiřího z Poděbrad)으로 향합니다. 프라하 3구에 속한 이 광장은 주변에 카페와 베이커리, 비스트로가 모여 있어 가볍게 점심을 해결하기 좋습니다. ‘이르자크’는 동네의 공식 이름이 아니라, 광장·지하철역과 그 주변 일대를 친근하게 부르는 현지식 별칭입니다.

가볍게 먹고 싶다면 이르자크 파머스 마켓 근처의 프랑스식 비스트로 겸 베이커리 르 카보(Le Caveau)가 괜찮습니다. 현지인들이 프라하 최고로 꼽는 바게트 샌드위치를 맛볼 수 있는데, 점심시간에는 자리 잡기가 쉽지 않을 만큼 인기입니다. 채식 위주로 든든하게 먹고 싶다면 지슈코프의 인기 비건 비스트로 팔로 베르데(Palo Verde Bistro)도 좋은 선택입니다. 매일 바뀌는 데일리 메뉴를 내는 곳이 많으니, 흑맥주 한 잔을 곁들여 체코식 점심을 즐겨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13:30 비노흐라디 골목 산책

이르지호 즈 포데브라트 광장에서 점심을 마친 뒤, 비노흐라디의 주택가 안쪽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비노흐라디는 체코어로 ‘포도밭’을 뜻합니다. 14세기 카를 4세(Karel Ⅳ)가 프라하 주변 언덕의 포도 재배를 장려하면서 이 일대에 포도밭이 넓게 조성됐고, 지역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옛 포도밭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지금은 가로수가 늘어선 거리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지어진 공동주택, 카페와 레스토랑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비노흐라디의 골목을 걷다 다시 이르지호 즈 포데브라트 광장으로 나오면, 예수성심성당(Kostel Nejsvětějšího Srdce Páně)이 시선을 끕니다. 1896년 조성된 광장의 중심에 자리한 성당입니다. 슬로베니아 출신 건축가 요제 플레치니크(Jože Plečnik)의 설계에 따라 1928년부터 1932년 사이에 세워졌습니다.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건축물이라 일컬어지며, 폭이 넓고 평평한 42m 높이의 탑에는 지금 7.6m의 거대한 유리 시계가 달려 있습니다.
광장을 둘러본 뒤 북서쪽으로 10분 남짓 걸으면 리에그로비 공원(Riegrovy sady)에 닿습니다. 지슈코프와 맞닿아 있는 비노흐라디 북쪽의 공원입니다. 공원 안쪽 길을 따라 서쪽 비탈로 향하면 신시가지(Nové Město) 너머 프라하 성(Pražský hrad)까지 이어지는 풍경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다음 목적지는 블타바강 북쪽의 홀레쇼비체(Holešovice)입니다. 창고와 공장이 밀집했던 산업지대가 미술관과 디자인 스튜디오, 문화 공간이 모인 동네로 변화를 거듭해왔습니다. 카를린의 로한스키 강변(Rohanské nábřeží) 쪽으로 이동해 슈트바니체 보행교(Štvanická lávka)를 건넙니다.
이 다리는 홀레쇼비체와 카를린을 잇는다는 뜻에서 ‘홀카(HolKa)’라는 별칭으로도 불립니다. 보행자와 자전거만 통행이 가능하며, 카를린에서 슈트바니체 섬(Štvanice)을 거쳐 홀레쇼비체까지 이어집니다. 배를 타는 낭만은 사라졌지만, 강과 섬의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서 두 동네를 오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15:00 홀레쇼비체
다리를 건너면 홀레쇼비체의 프라하 마켓(Pražská tržnice, ‘홀레쇼비체 마켓/ Holešovická tržnice’이라고도 불림)이 나옵니다. 1895년 프라하 중앙 도축장으로 지어져 근 한 세기 동안 도축장으로 쓰이다 1983년 시장으로 전환된 거대한 복합단지입니다. 아르누보와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 남아 있죠. 지금은 상점과 식당, 갤러리와 공연장이 함께 하는 문화공간으로 빠르게 변신하고 있습니다.
22번 홀에는 프라하 최대 규모의 농산물 시장이 열리고, 건물 사이에는 다양한 식료품점과 스트리트푸드 매장이 자리합니다. 단지 안쪽에는 체코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트라포 갤러리(Trafo Gallery)와 현대서커스·무용·대안연극을 선보이는 공연장 야트카78(Jatka 78)도 있습니다.

프라하 마켓에서 DOX 현대미술센터로 향하는 길에는 안뜰에 숨어 있는 복합문화공간 브니트로블록(Vnitroblock)이 있습니다. 이름은 ‘건물로 둘러싸인 안쪽 공간이나 안뜰’을 뜻하는 체코어에서 따왔습니다. 2016년 옛 공장 건물을 되살려 문을 열었으며, 거친 산업건축의 흔적을 그대로 갖고 있는 내부에 카페와 레스토랑, 갤러리, 댄스 스튜디오가 들어서 있습니다. 전시와 공연, 워크숍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도 열립니다. 홀레쇼비체의 젊은 창작 문화를 가까이에서 살펴보고, 커피 한 잔과 함께 잠시 쉬어가기 좋은 장소입니다.
브니트로블록에서 다시 10분 남짓 걸으면 DOX 현대미술센터(DOX Centre for Contemporary Art)입니다. 프라하 마켓에서는 걸어서 20분 안팎의 거리입니다. DOX 현대미술센터는 홀레쇼비체를 공업지대에서 크리에이티브 지구로 바꿔놓은 선구적 프로젝트 중 하나였습니다.

공장을 개조한 건물인데, 길에서 보면 옥상 테라스에 얹힌 42m 길이의 목조 비행선 ‘걸리버(Gulliver)’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DOX는 독립성과 국제 미술계와의 실질적인 접점을 자부하며, 전시 뿐 아니라 건축과 디자인, 문학 등 동시대 사회 이슈를 반영하는 프로젝트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국제 작가들의 작품과 체코 현대미술을 함께 만날 수 있어, 프라하의 기존 미술관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관람을 마치면 저녁 식사를 위해 다시 비노흐라디로 향합니다. 홀레쇼비체에서 트램을 타면 약 25~30분 만에 강 건너 비노흐라디에 도착합니다.
18:30 미루 광장의 정찬
하루 종일 걸었으니, 저녁만큼은 제대로 즐겨야 하겠습니다. 미루 광장 곁, 네오고딕 양식의 성 루드밀라 성당(kostel svaté Ludmily)을 마주한 비노흐라드스키 파를라멘트(Vinohradský Parlament)로 향합니다.

2013년 문을 연 이곳은 질 좋은 맥주와 음식을 함께 선보이는 현지 맛집입니다. 전통 체코 요리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내는 데 집중하며, 매장에서 직접 만드는 크네들리키(knedlíky, 체코식 찐빵)와 탱크에서 갓 따라낸 필스너가 유명합니다. 메뉴는 굴라시와 오븐에 구운 오리처럼 친숙한 체코 전통 요리부터 크림소스를 곁들인 소고기 요리 스비치코바(svíčková), 파스닙을 곁들인 소볼살, 로즈힙 소스를 더한 멧돼지 다리 요리까지 폭넓습니다. 진하게 우려낸 소꼬리 육수도 이곳의 인기 메뉴입니다.
음식은 큼직한 접시에 넉넉하게 담겨 나오고, 가격도 주요 관광지에 비하면 합리적인 편입니다. 저녁 시간에는 자리가 빠르게 차므로 미리 예약하는 것이 좋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식당에서 남쪽으로 15분쯤 걸으면 현지인들이 ‘그레보프카(Grébovka)’라고 부르는 언덕 공원, 하블리치코비 공원(Havlíčkovy sady)에 도착합니다. 19세기 산업가 모리츠 그뢰베(Moritz Gröbe)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으로 조성한 공원으로, 남향 비탈을 따라 포도밭이 펼쳐집니다.
한때 비노흐라디 곳곳을 채웠던 포도밭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이곳만은 예외입니다. 14세기 카를 4세 시대에 조성된 포도밭의 전통이 20세기에 되살아났고, 지금도 리슬리오가 뮐러 투르가우, 피노 누아를 비롯한 여덟 품종의 포도가 자랍니다. 이곳에서 수확한 포도로 매년 와인도 생산합니다.

포도밭 위에 자리한 비니치니 알탄 그레보프카(Viniční altán Grébovka)는 공원의 풍경을 즐기기 좋은 와인바입니다. 산뜻한 리슬링이나 뮐러 투르가우 한 잔을 들고, 프라하의 붉은 지붕 위로 해가 천천히 내려앉는 모습을 바라보는 이 시간이야 말로 디지털 노마드가 누릴 수 있는 낭만과 여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