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수박 먹었어?”라는 인사처럼 여름이 와닿는 건 수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수박의 기원은 아프리카 대륙, 사하라 사막 남부입니다. 당시 야생 수박은 지금처럼 크고 달콤하지 않았죠. 하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의 손을 거쳐 약 5,000년 전부터 점차 당도가 높고 먹기 좋은 품종으로 개량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수박은 ‘부와 장수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투탕카멘 무덤과 피라미드 유물에서도 수박 씨앗과 수박을 그린 벽화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지중해를 거쳐 10세기경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과 인도로 전해졌고, 13세기에는 유럽, 16세기에는 스페인 탐험가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까지 전해졌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 또는 조선 초, 원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처음 전해졌습니다. 당시에는 ‘서과(西瓜)’라 불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는 수박 재배법이 기록되어 있고, 『동의보감』(1613년)에는 수박의 해열 효능이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6~17세기경에 여름철 대표 과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박은 과일처럼 여겨지지만 식물학적으로는 오이, 참외와 같은 박과 식물로, 채소에 더 가깝습니다. 실제로 미국 오클라호마주는 수박을 공식적으로 ‘주 채소’로 지정하기도 했죠.
수박의 종류도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우리가 마트에서 흔히 접하는 씨 있는 수박은 물론, 교배를 통해 만들어진 씨 없는 수박, 작고 귀여운 애플 수박, 노란 속살의 황육 수박 등 전 세계적으로 색, 맛, 크기, 모양 모두 제각각인 1,200종 이상의 품종이 존재합니다. 참고로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수박은 2013년 미국 테네시주 농부가 재배한 것으로, 무게가 무려 159㎏에 달해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습니다.
세계의 수박- 어디가 가장 맛있을까?
세계에서 수박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는 단연 중국입니다. 연간 약 6,100만 톤, 세계 생산량의 무려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죠. 그 다음으로는 터키가 약 340만 톤으로 2위, 인도가 약 320만 톤으로 3위를 차지합니다. 우리나라는 생산량이 많지 않지만, 함안·성주·고창 등지에서 재배되는 수박은 세계적으로 당도와 식감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품질의 ‘한국 수박’으로 자랑할 만합니다.

세계적으로 맛있는 수박으로 손꼽히는 품종 중 하나는 일본 홋카이도의 덴스케 수박입니다. 껍질이 검정색에 가깝고 육질이 단단하면서 당도가 높을 뿐 아니라 한정 생산되기 때문에, 첫 수확분은 수백만 원에 경매로 거래될 정도죠. 이 외에도 미국 조지아주의 수박은 크고 즙이 풍부하며, 이란 사막 지역에서 자라는 수박은 극심한 일교차 덕분에 당도가 높아 맛있는 수박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수박은 약 92%가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어 여름철 수분 보충에 탁월합니다. 게다가 수분만 많은 과일이 아니라 영양 면에서도 뛰어납니다. 100g당 약 30㎉로 칼로리가 낮아 다이어트에도 좋고, 비타민C, 비타민A, 칼륨, 마그네슘 등이 풍부해 피로 회복과 피부 건강에도 도움이 됩니다. 특히 항산화 물질인 리코펜이 풍부한데, 토마토보다 약 1.4배나 많은 리코펜이 함유되어 있어 심혈관 건강, 피부 보호, 노화 방지에 효과적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성분은 시트룰린입니다. 수박의 학명인 Citrullus도 이 성분에서 유래되었는데, 혈관을 확장하고 혈류를 개선해 운동 후 회복에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수박 껍질에는 식이섬유와 시트룰린이 더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 일부 국가에서는 껍질을 다양한 요리에 활용하기도 합니다.
다양하게 즐기는 수박의 매력
나라마다 수박을 즐기는 방식도 참 다양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수박을 큼직하게 썰어 먹거나, 얼음과 과일, 우유를 함께 넣은 수박 화채로 즐기고, 미국에서는 수박을 샐러드나 주스로 활용합니다. 특히 수박과 페타치즈, 민트를 곁들인 수박 샐러드는 단맛과 짠맛의 조화로 인기가 많습니다.

멕시코에서는 라임과 설탕을 더한 음료인 아구아 프레스카로 수박을 즐기며, 이탈리아에서는 얇게 썬 수박에 프로슈토 햄을 곁들여 전채 요리로 활용합니다. 중국은 수박 껍질 활용이 활발한데, 껍질은 볶거나 절여 반찬으로 사용하며, 씨는 볶아서 간식으로 먹습니다.
의외로 수박 껍질은 인도와 미국 남부에서도 절임, 볶음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해 먹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수박에 소금을 뿌려 먹는 전통이 있습니다. 단맛도 더 강조되고, 여름철에 나트륨 보충도 할 수 있어 열사병 예방 효과도 있다고 합니다.
수박을 향한 애정은 각국의 식문화뿐 아니라, 세계 수박 축제들의 열기를 통해서도 느껴집니다. 미국 텍사스주 루블록에서 열리는 룰링 수박 축제(Luling Watermelon Thump)는 지역 주민들에게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 행사입니다. 1954년 처음 시작된 축제로 매년 6월 마지막 주말에 열리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6월 26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개최되었죠.
축제의 이름인 ‘Thump(썸프)’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수박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입니다. 영어로 ‘쿵’, ‘텅’하는 둔탁한 소리 또는 세게 두드리는 동작을 뜻하며, 수박이 잘 익었는지 확인할 때 손가락 마디로 수박을 ‘툭툭’ 두드려 듣는 소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축제에서는 수박 씨 멀리 뱉기 대회(Seed Spitting Contest), 수박 조각 전시, 거리 퍼레이드, 어린이 놀이마당, 콘서트 등 다양한 가족 중심 프로그램이 펼쳐집니다. 특히 수박 씨 뱉기 대회는 룰링 축제의 백미로 참가자들이 ‘누가 가장 멀리 수박 씨를 날릴 수 있는지’ 겨룹니다. 최고 기록은 1989년 리 휠리스(Lee Wheelis)가 달성한 75ft 2in(약 22.9m). 현재까지도 공식 세계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밖에 ‘썸프 퀸(Thump Queen)’ 선발대회는 지역 소녀들에게 가장 큰 설렘을 안겨주는 이벤트로 인기가 많습니다.

호주 퀸즐랜드 주의 친칠라(Chinchilla)에서는 2년에 한번, 전 세계에서 가장 유쾌한 수박 축제가 열립니다. 바로 친칠라 멜론 페스티벌(Chinchilla Melon Festival)입니다. 호주에서 멜론(Melon)은 수박(watermelon)과 락멜론(rockmelon) 등 다양한 박과 과일을 뜻하는데, 친칠라 멜론 페스티벌에서 주인공은 단연 수박입니다.
실제로 친칠라 지역은 호주 전체 수박 생산량의 25% 이상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수박 산지이기도 합니다. 1994년 건조한 날씨로 침체된 지역 농민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무더운 여름에 지역 주민과 관광객이 함께 어우러지는 호주 대표 여름 축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축제에서는 수박 스키, 수박 번지점프, 씨 뱉기, 수박 던지기 같은 유쾌하고 엉뚱한 경기들이 펼쳐집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수박 축제는 미국 아칸소 주 호프(Hope)에서 열리는 호프 수박 축제(Hope Watermelon Festival)입니다. 1926년 시작되어 잠시 중단되었다가, 1977년부터는 매년 지속되고 있습니다. 수박 먹기 대회, 씨 뱉기 챔피언십, ‘수박 올림픽’이라 불리는 체육 행사, 콘서트, 예술·공예 마켓, 어린이 놀이터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부 관광객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가장 무거운 수박을 뽑는 대회가 축제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이 대회는 1916년 인근 지역 농부들이 수박의 크기를 두고 경쟁하며 시작되었습니다. 1935년 미들브룩스가 키운 약 88㎏ 수박이 44년간 세계 기록으로 남았다가, 1979년과 1985년, 브라이트 가문이 차례로 90.7㎏, 118㎏ 수박을 선보이며 기네스 기록을 갈아치웠습니다. 2005년에는 약 122㎏ 초대형 수박이 등장하며 사실상 대회 끝판왕이 되었답니다. 올해는 8월 7~9일 호프 페어 파크(Hope Fair Park)에서 열렸습니다.
여름이 기억하는 수박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고대 이집트의 무덤부터 현대의 지역 축제까지. 수천 년간 수박과 함께 뜨거운 여름을 나누어 왔습니다. 수박 한 조각에는 여름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올해도 숨이 턱 막히는 여름이지만, 시원한 수박과 함께 하며 이 계절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