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에는 파인 다이닝의 테이블 위에도 새로운 시즌 메뉴들이 등장합니다. 그중 셰프들이 사랑하는 재료에는 배가 빠지지 않습니다. 과일로 먹을 때는 아삭한 식감이 매력적이지만, 와인 시럽에 조리하면 향이 깊어지고, 캐러멜라이즈하면 따뜻하고 농밀한 풍미로 변합니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고, 달콤하면서도 은은한 산미가 더해져 어떤 재료와도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특히 와인, 초콜릿, 치즈, 견과류와의 조합도 훌륭해서 가을 배는 사랑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배로 만든 디저트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단연 포치드 페어(Poached Pear)입니다. 레드 와인에 시나몬과 바닐라를 넣어 끓여서 만들고, 아이스크림이나 생크림, 견과류 등을 곁들여 먹는 가장 클래식한 조합의 디저트죠.
또 하나는 19세기 파리에서 탄생한 타르트 부르달루(Tarte Bourdaloue)입니다. 배와 아몬드 크림으로 채운 타르트인데 지금도 파리 레스토랑에서 자주 보이는 인기 디저트입니다. 여기에 프랑스 요리의 거장 오귀스트 에스코피에가 개발한 푸아르 벨 엘렌(Poire Belle Hélène)도 빠질 수 없습니다. 맛이 없을 수 없는 초콜릿 소스와 배,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환상적인 조합입니다.
최근 미슐랭 스타 셰프들은 배를 보다 실험적이고 창의적으로 해석합니다. 고든 램지는 카라멜과 시나몬을 곁들여 계절의 향을 극대화했고, 르네 레드제피는 발효와 허브를 활용해 북유럽 특유의 산뜻한 풍미를 구현했습니다. 피에르 에르메는 배에 초콜릿, 장미, 라임을 결합해 이전에 없던 조합의 맛을 선보였으며, 알랭 파사르는 배와 채소의 경계를 허물어 깔끔하고 세련된 풍미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문명과 함께한 과일
세계에서 가장 오래 재배된 과일 중 하나인 배의 역사는 약 3,000년 전 고대 중국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농부들은 야생 배를 재배 가능한 품종으로 개량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의 『시경(詩經)』, 중세 유럽 수도원의 농업 장부, 그리고 한국 삼국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배 씨앗은 배가 얼마나 오래 전부터 재배되어 왔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유럽으로 전해진 배는 그리스·로마 문명과 함께 확산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는 배가 신들의 정원에 자라는 과일로 등장하고,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우스는 40종이 넘는 품종을 기록했습니다. 고대 로마인들은 “배는 삶아야 맛있다”고 믿으며 꿀과 와인에 조려 먹었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요리책으로 꼽히는 고대 로마의 ‘데 레 코퀴나리아(De Re Coquinaria)’에는 꿀과 와인으로 끓여낸 배 디저트 레시피가 남아 있는데, 앞서 소개해드린 프랑스 디저트 포치드 페어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 시절, 배는 이미 귀족 정원의 필수 과일이었습니다. 중세 유럽 화가들은 성모 마리아 곁에 배를 그려 넣으며 ‘구원의 상징’으로 삼았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바치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중국에서는 배가 조금 다르게 해석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배(梨, li)’의 발음이 ‘이별(離, li)’과 같아 연인이나 가족이 배를 나누어 먹는 것이 금기시 되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먹더라도 반드시 통째로 하나씩 먹었으며,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는 결혼식에서 배를 먹지 않는 풍습이 남아 있습니다.
아시아 배 VS 유럽 배
배는 사과보다 훨씬 다양한 품종을 가진 과일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3천 종이 넘는 배가 존재한다고 하니, 와인처럼 끝없이 넓은 ‘맛의 세계’를 가진 셈입니다. 세계 생산량을 보면 중국이 전 세계 생산량의 65~70%를 차지하여 압도적이고, 미국,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튀르키예 등이 뒤를 잇습니다.

오늘날 배는 크게 아시아와 유럽, 두 계보로 나뉩니다. 한국·중국·일본을 비롯한 아시아는 둥글넓적한 아시안 페어(Asian Pear)가 대표 품종입니다. 시원한 과즙과 아삭한 식감이 특징으로, 사과처럼 베어 먹기에 알맞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나주 배는 과즙이 풍부하고 저장성이 뛰어나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습니다.
일본은 품종 개량을 통해 완벽한 모양과 단맛을 갖춘 고급 배 기쿠스이(Kikusui)를 탄생시켰는데, 한 개 가격이 수만 엔에 달하기도 합니다. 중국은 야리(鸭梨), 슈에리(雪梨) 같은 품종이 대표적이며, 황실에 진상되던 징바이리(京白梨), 낭궈리(南国梨) 등의 품종은 오늘날까지도 명품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럽 배는 대체로 길쭉하며, 잘 익으면 과육이 버터처럼 부드럽게 녹아드는 특징이 있어 디저트 문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끓는 물에 조리하거나 굽는 방식으로 은은한 단맛과 부드러운 질감을 즐길 수 있죠.
유럽은 윌리엄스(Williams, 미국에서는 바틀렛 Bartlett으로 불림), 보스크(Bosc), 콩코드(Concorde) 등의 품종을 주로 재배하고 있습니다. 얇은 껍질과 은은한 단맛 덕분에 포치드, 타르트, 푸딩, 케이크 등 다양한 디저트에 활용됩니다. 과육이 부드럽고 향이 짙어 와인이나 시럽게 졸여내면 특유의 향과 질감이 더욱 살아나죠.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디저트용 고급 배 산지로 유명하고, 영국은 지금도 컨퍼런스 배(Conference Pear)의 본고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미국은 이 두 세계의 중간 어딘가에 서 있습니다. 워싱턴 주와 오리건 주를 중심으로 대규모 재배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오리건주의 후드 리버(Hood River)는 스스로를 ‘세계 배의 수도(Pear Capital of the World)’라 부르며 미국 배 수출을 주도하고 있죠. 미국에서는 바틀렛, 앙주(d’Anjou), 보스크 같은 품종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 충분히 달고 부드럽지만, 동시에 조리용으로도 손색없어 대중적인 과일입니다. 앙주, 바틀렛 같은 품종은 신선식으로도, 가공용으로도 활용 가능해 균형미가 뛰어납니다. 요약하자면 아시아는 “사과처럼 씹는 배”, 유럽은 “버터처럼 녹는 배”가 특징입니다.
배 축제의 향연
배 축제도 있습니다. 성환배로 유명한 충남 천안 지역에서는 매년 11월 중순 천안성환배축제가 열립니다. 성환배는 얇은 껍질, 아삭한 식감, 풍부한 과즙과 은은한 단맛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성환배 재배는 1909년에 시작되어 110여 년의 역사를 이어왔는데, 1986년 미국을 시작으로 호주·멕시코·캐나다 등 해외 10여 개국에도 수출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 주의 작은 마을 브리시겔라(Brisighella)에서는 매년 늦가을 ‘볼피나 배 & 숙성 치즈 축제(Sagra della Pera Volpina e del Formaggio Stagionato)’가 열립니다. 브리시겔라는 라벤나(Ravenna) 인근의 중세풍 마을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가운데 하나입니다. 매년 11월, ‘세개 언덕에서 네개의 축제(4 Sagre per 3 Colli)’ 축제 시리즈가 진행되는데, 그중에서도 볼피나 배 축제가 단연 하이라이트로 꼽힙니다.
미국에도 크고 작은 배 축제들이 있습니다. 1954년에 시작된 오리건주 로그 밸리(Rogue Valley)의 메드포드 배꽃 축제(Medford Pear Blossom Festival)는 배꽃이 눈부시게 만개하는 4월에 맞춰 열리는데, 매년 수만 명이 축제를 위해 로그 밸리를 찾습니다.
미국 배 축제 가운데 가장 젊은 편에 속하는 켈시빌 배 축제(Kelseyville Pear Festival)는 1993년에 시작되었습니다. 매년 9월 마지막 토요일이면 캘리포니아 북부의 작은 마을 켈시빌은 1만 명이 넘는 방문객으로 북적입니다. 100개가 넘는 공예품과 음식 부스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빈티지 자동차 전시와 라이브 음악 공연, 어린이를 위한 체험 마당까지 더해져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넘쳐납니다.
또한 미국의 ‘배의 수도’라 불리는 캘리포니아 코틀랜드(Courtland)에서는 코틀랜드 배 축제(Courtland Pear Fair)가 열립니다. 1972년부터 매년 7월 마지막 일요일에 이어져 왔으며, 축제 기간 동안 지역 인구가 평소의 10배 이상으로 늘어날 정도로 성황을 이룹니다. 방문객들은 배 파이, 배 아이스크림, 배 케이크 등 다채로운 배 요리를 맛보고, 라이브 공연과 퍼레이드를 즐기며 여름의 활기를 만끽합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해드릴 사르토 배 축제(Foire de la Poire Sarteau)는 프랑스 알프스 드 오트 프로방스(Alpes de Haute Provence)의 라 자비(La Javie)에서 매년 11월 초 열립니다. 사르토 배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지역 품종으로, 설탕에 절여 잼이나 캔디로 가공해 즐겨왔습니다. 축제 기간에는 전통 방식으로 커다란 솥에서 배를 시럽으로 끓여내는 과정을 시연하고, 당나귀 타기, 과일 주스 만들기, 에코뮤지엄 탐방 등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도 마련됩니다.
하루에 배 1개
배는 맛뿐 아니라 영양 측면에서도 ‘웰빙의 아이콘’이라 불릴 만한 과일입니다. 수분 함량이 80% 이상으로 갈증 해소에 탁월하며, 실제로 배 한 개는 하루 권장 식이섬유 섭취량의 약 4분의 1을 충족할 만큼 식이섬유 펙틴이 풍부해 소화를 원활하게 돕습니다. 또한 배의 항산화 성분은 피부 노화를 억제하는 효과도 있어, 미용과 건강을 동시에 챙길 수 있는 과일이기도 합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배를 비타민 C, 칼륨, 식이섬유 등 필수 영양소를 균형 있게 갖춘 ‘영양 밀도가 높은 과일(Nutrient-Dense Food)’로 분류하고 있으며, 유럽식품안전청(EFSA) 역시 배의 식이섬유가 장내 미생물 균형 개선과 혈중 콜레스테롤 저하에 기여한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배가 숙취 해소에 좋다고 알려져 배 주스를 즐겨 마셨습니다. 배 껍질에 풍부한 루테올린(luteolin)이라는 항산화 성분이 알코올 분해를 촉진하기 때문입니다.

아시아 전통 의학에서는 배가 오랫동안 기침과 기관지 염증을 완화하는 데 쓰여 왔습니다. 현대 연구 결과, 배에 함유된 소르비톨과 과당이 목의 염증을 진정시키고 가래를 묽게 해 호흡기 건강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감기나 기관지염 시 배를 갈아 꿀과 함께 섭취하는 민간요법이 과학적 근거를 얻게 된 셈입니다.
뿐만 아니라 배에 풍부한 칼륨은 나트륨 배출을 돕고 혈압 조절에 기여하여, 현대인의 고염분 식단으로 인한 부담을 자연스럽게 완화합니다. 여기에 비타민 C와 플라보노이드가 세포 노화를 억제하고 면역력을 강화해 전반적인 건강 증진에 도움을 줍니다. 특히 항산화 성분은 껍질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깨끗이 세척한 뒤 껍질째 먹으면 좋습니다.
이처럼 배는 갈증 해소에서부터 숙취 해소, 호흡기 건강, 심혈관 보호, 미용 효과까지 두루 갖춘 건강 과일입니다.
투명한 가을의 맛

사시사철 과일을 맛볼 수 있는 시대지만, 배는 여전히 제철의 가치를 간직한 과일입니다. 가을이 내어주는 가장 맑고 투명한 선물, 배. 달콤하고 시원한 배를 나누며 계절이 전하는 맛과 정을 온전히 느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