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에 초록색 말차가 카페 메뉴판을 차지했다면, 올해는 ‘우베(Ube)’가 보입니다. 우베 라떼를 찾는 일이 어렵지 않고, 아이스크림과 도넛, 케이크, 쿠키, 크림 디저트까지 우베가 들어간 메뉴들이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우베를 처음 보면 자색 고구마인가 싶지만, 전혀 다릅니다. 땅 속에서 자라는 전분질 식재료라 비슷해 보이지만 식물학적 분류나 맛, 질감, 쓰임새 모두 다릅니다.
고구마는 단맛이 비교적 뚜렷하고, 품종에 따라 촉촉하거나 포슬포슬한 식감이 납니다. 자색고구마는 보라색이라 우베와 자주 혼동되지만 어디까지나 고구마의 일종입니다. 반면 마(얌)는 여러 종류의 마과 식물을 넓게 가리키는 말로, 오래 전부터 아프리카·아시아·태평양 지역 등에서 중요한 주식 작물이었습니다. 고구마보다 단맛은 약하고, 전분감이 더 강합니다.
우베는 그 마 계열 중에서도 보라색을 지닌 품종입니다. 맛은 크게 달지 않습니다. 은은하고 고소합니다. 그래서 코코넛밀크, 연유, 버터, 바닐라, 우유, 크림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재료와 잘 어울립니다. 비슷하게 혼동되는 식재료로 토란(taro)도 있습니다. 토란 역시 보라색 디저트에 쓰이지만 우베와는 다른 식물입니다. 토란은 흙내와 견과류 같은 향이 강한 반면, 우베는 좀 더 달콤하고 부드러운 디저트 향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베의 고향
우베가 언제 처음 발견되었는지 정확하게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보랏빛 작물은 아주 오래 전부터 열대 아시아와 섬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재배되고 섭취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덩이줄기를 잘라 심는 특유의 재배 방식 덕분에 인류의 이동 및 교역을 통해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따라서 특정 국가나 시점을 원산지로 보기보다는, 열대 아시아권 전체의 오래된 토착 작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 중에서도 필리핀은 우베의 역사가 가장 깊은 나라입니다. 필리핀에서 우베는 명절, 생일, 축제, 가족 모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친숙한 디저트 재료입니다. 우베 할라야, 우베 아이스크림, 우베 케이크, 우베 크링클 쿠키, 우베 토핑까지. 필리핀 사람들에게는 어릴 때부터 길들여진 맛이죠. 팥이 빙수, 떡, 빵, 죽, 과자에 두루 쓰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베의 영양
우베는 전분이 풍부한 뿌리채소입니다. 고단백 식품이라기보다 포만감을 주는 복합 탄수화물 식재료에 가깝습니다. USDA 영양 데이터에 따르면 삶거나 구운 마(얌) 1컵(약 136g)에는 탄수화물 37.4g, 식이섬유 5.3g, 단백질 2g, 지방 0.19g, 비타민 C 16.5㎎, 칼륨 911.2㎎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영양학적으로는 식이섬유, 칼륨, 비타민 C, 그리고 보라색을 내는 안토시아닌 계열 색소가 눈에 띱니다. 식이섬유는 포만감과 장 건강에, 칼륨은 체내 수분 균형과 나트륨 배출에 관여합니다. 안토시아닌 색소 덕분에 우베는 항산화 이미지와도 연결됩니다.
다만 우베를 모두 건강식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베 자체는 담백한 뿌리채소지만, 우베 할라야나 라떼, 케이크에는 설탕, 연유, 버터, 코코넛밀크, 크림이 함께 들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베 디저트는 식이섬유와 보라색 식물성 색소가 더해진 달콤한 간식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베 활용법
우베는 생으로 먹기보다 익혀서 사용하는 식재료입니다. 감자나 고구마처럼 삶거나 찌거나 구운 뒤, 부드럽게 으깨어 디저트나 음료의 베이스로 활용합니다. 우베가 디저트에 잘 어울리는 이유는 단맛이 너무 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본 맛이 은은하고 고소해서 다른 재료를 잘 받아들입니다.
코코넛밀크를 넣으면 열대의 향이 살아나고, 연유를 넣으면 달콤한 밀크 디저트가 됩니다. 버터를 넣으면 풍미가 깊어지고, 바닐라나 크림을 더하면 케이크와 아이스크림에도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필리핀을 대표하는 우베 할라야(Ube Halaya)는 잼 또는 푸딩 같은 디저트입니다. 그냥 먹기도 하고, 케이크 필링, 빵의 속 재료, 아이스크림, 할로할로 토핑으로도 두루 쓰입니다. 만드는 방법은 삶은 우베를 으깬 뒤 코코넛밀크, 연유, 무가당 연유 또는 우유, 버터, 설탕 등을 넣어 끓이며 걸쭉해질 때까지 계속 저어 주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우베 할라야는 여름 음료 베이스로도 잘 어울립니다. 차갑게 식힌 우베 할라야 2큰술을 컵 바닥에 넣고 얼음을 채운 뒤 우유나 코코넛밀크 180~200㎖를 부어 줍니다. 더 달게 마시고 싶다면 연유를 조금 추가하고, 커피 맛을 더하고 싶다면 에스프레소 1샷을 넣어도 좋습니다. 우베의 고소한 단맛, 코코넛의 부드러운 향, 얼음의 시원함이 어우러지는 여름 디저트 음료입니다.
좀 더 진하게 즐기고 싶다면 우베 할라야와 우유, 얼음을 믹서에 함께 갈아 우베 밀크쉐이크처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이나 휘핑크림을 올리면 한 잔의 보라색 디저트가 완성됩니다. 단 맛을 줄이고 싶다면 연유를 빼고 무가당 연유나 코코넛워터를 사용해도 됩니다.
세계의 우베 축제
우베는 이제 세계로 뻗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필리핀 스타일의 베이커리와 디저트 숍을 중심으로 먼저 알려졌고, 영국에서는 우베 라떼·우베 프라푸치노·우베 크림 음료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최근 영미권 카페·베이커리에서는 우베를 도넛, 라떼, 에스프레소 마티니, 케이크 등에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고, 호주와 캐나다에서도 대도시의 필리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우베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우베 축제는 필리핀 보홀(Bohol)에서 열리는 우비 페스티벌(Ubi Festival)입니다. 보홀에서는 우베를 우비(Ubi)라고 부르는데, 그 중에서도 키남파이(Kinampay) 품종을 특별하게 여깁니다. 오래 전 보홀에 가뭄과 기근이 닥쳤을 때 다른 작물은 자라지 못했지만 우비만은 땅 속에서 살아남아 사람들의 식량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비는 하늘이 준 선물에 가까운 생존과 회복력을 상징합니다.
2000년부터 시작된 우비 페스티벌은 본래 우비 수확기인 1월에 진행되다가 최근에는 12월로 옮겨 개최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우비 품종과 가공식품 전시, 요리 경연, 거리 퍼레이드 등을 축제에서 즐길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서부와 동부 모두에서 우베 축제가 활발하게 열립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매년 여름 롱비치에서 열리는 우베 페스티벌(Long Beach Ube Festival)을 비롯해, 매년 봄 세리토스 공연예술센터에서 대규모로 개최되는 LA 카운티 우베 페스트(LA County UbeFest)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 축제들은 지역의 작은 팝업으로 시작해, 지금은 회당 수만 명에서 많게는 10만 명에 이르는 인파가 다녀가는 대형 문화 행사로 성장했습니다.
동부 뉴욕에서는 뉴욕 최초의 필리핀 거리 축제인 필리핀 페스트(Philippines Fest)가 정기적으로 열려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특히 이 축제에서 우베를 주인공으로 선보이는 특별 팝업 행사, 뉴욕 우베랜드(UBELAND)가 보랏빛 미식의 향연으로 유명합니다. 올해 가을에는 ‘필리핀계 미국인 역사의 달’을 맞아 10월 초 유니언 스퀘어 인근에서 가을 시즌 행사가 펼쳐질 예정입니다. 20곳이 넘는 푸드 부스들이 총출동해 우베를 활용한 화려한 디저트와 음료는 물론, 이색적인 한 끼 메뉴까지 선보인다고 하네요.
보랏빛 우베
초록색의 말차가 차분한 쌉싸름함으로 사랑받았다면, 보라색 우베는 부드럽고 달콤한 낯섦으로 다가옵니다. 주변에서 우베를 활용한 메뉴를 발견한다면 어떤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한 번 맛보세요. 맛으로 깊어지는 경험은 언제나 즐겁고 새롭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