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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재발견] 밤 르네상스_ CHESTNUT
2025.12.30 링크주소 복사 버튼 이미지 페이스북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카카오톡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X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링크드인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인쇄하기 버튼 이미지
일상의 재발견 밤 겨울철 국민간식!

겨울이 내려앉은 거리를 걷다 보면 어디선가 나는 군밤 냄새.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밤 한 봉지를 손에 들고 걷는 따뜻함은 추운 날씨도 잠시 잊게 만듭니다.

제과점과 카페마다 밤을 주제로 한 시즌 메뉴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대형 프랜차이즈부터 동네의 작은 골목 상점까지 밤 크림을 듬뿍 채운 크루아상, 밤 앙금이 가득한 도넛, 밤의 풍미를 살린 밤 라떼 등 다양한 메뉴를 선보입니다. 밤을 구우면 전분이 당화되어 단맛이 증가하고, 특유의 고소한 향이 배가 됩니다. 정제당 대신 자연스러운 단맛을, 인공 첨가물 대신 천연 식재료를 선호하는 흐름 속에서 밤은 완벽한 소재죠. 소셜 미디어에는 #밤디저트, #밤스타그램 등의 해시태그가 이어지며 트렌드로 자리 잡았습니다. 감히 밤 르네상스라 부를 만한 현상입니다.

이번 주인공은 겨울에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밤’입니다. 작고 소박한 밤 한 알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구운 밤 vs 삶은 밤

밤은 ‘자연이 만든 에너지바’라 불러도 좋을 만큼 완전식품에 가깝습니다. 100g당 200㎉ 남짓한 열량이지만 지방은 거의 없고, 복합탄수화물과 식이섬유가 풍부합니다. 다른 견과류에는 없는 비타민C가 들어 있어 한겨울 피로를 덜고 면역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신기하게도 밤의 전분이 비타민C를 감싸기 때문에 불에 구워도 영양 손실이 적습니다. 칼륨은 체내 나트륨 배출을 돕고, 식이섬유는 천천히 포만간을 채웁니다. 작은 알맹이 하나에 의외로 완벽한 균형이 숨어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밤

구운 밤과 삶은 밤의 차이도 흥미롭습니다. 구운 밤은 열에 의해 전분이 당으로 바뀌어 단맛이 강하고 향이 진해집니다. 대신 수분이 빠져 식감이 포슬포슬해지며, 열에 약한 비타민C는 일부 손실될 수 있습니다. 반면 삶은 밤은 수분이 유지되어 부드럽고 담백한 맛을 지니며, 비타민C가 상대적으로 잘 보존됩니다. 열량 차이는 크지 않지만, 구운 밤은 당화로 인해 약간 더 높은 당분을, 삶은 밤은 수분이 많아 포만감이 오래가는 장점이 있습니다. 구운 밤은 향과 단맛을 즐기는 간식용, 삶은 밤은 영양과 소화를 중시하는 건강식에 어울립니다.

인류가 처음 만난 단맛

이제 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볼까요. 밤나무는 약 1천만 년 전부터 지구에 존재해왔으며,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이를 채집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밤을 ‘나무의 빵(Bread of the tree)’이라 부르며 곡식 대신 섭취했고, 유럽에서는 17세기까지 농민들이 밀가루 대신 밤가루로 빵을 구워 먹었다고 합니다. 특히 알프스와 아펜니노산맥 일대에서는 밤이 주식이었으며, 한 해의 수확량이 가족의 생존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작물이었습니다.

밤

동양에서도 밤은 역사가 꽤 오래되었습니다. 한반도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자생 밤나무가 분포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밤이 궁중의 진상품으로 지정되어 각 지방에서 임금에게 올려졌고, 정월 대보름에는 한해의 풍요를 기원하는 음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추운 겨울, 오래 저장할 수 있는 귀한 식량이자 마음을 나누는 열매였던 셈입니다.

밤은 언어마다, 나라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립니다. 영어권에서는 체스트넛(Chestnut), 프랑스에서는 고급 품종을 마롱(Marron), 일반 품종을 샤테뉴(Châtaigne)라 부릅니다. 독일과 스위스 거리에서는 구운 밤을 마로니(Maroni)라 하고, 이탈리아에서는 산촌의 주식이나 축제의 상징으로 카스타냐(Castagna)라 부릅니다.

두 이름, 체스트넛과 마롱은 비슷해 보이지만 엄밀히는 다른 품종입니다. 일반적으로 체스트넛은 한 송이에 여러 알이 달리는 야생종으로, 껍질 안에 얇은 속껍질(내피)이 붙어 있어 벗기기 어렵습니다. 반면 마롱은 인공적으로 개량된 품종으로 한 송이에 한 알만 자라며, 모양이 크고 속껍질이 잘 벗겨져 디저트용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그래서 프랑스를 대표하는 디저트 ‘몽블랑(Mont Blanc)’이나 ‘마롱 글라세(Marron Glacés)’에 쓰이는 밤은 대부분 이 마롱 품종이죠.

마롱 글라세

마롱 글라세는 밤을 바닐라 향 설탕 시럽에 여러 차례 졸여 만드는 정성과 인내의 디저트입니다. 수작업으로 며칠에 걸쳐 완성되어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크리스마스 선물로 인기가 높습니다. 몽블랑은 눈 덮인 알프스 산을 형상화한 디저트로, 머랭 위에 휘핑크림과 밤 페이스트를 얹어 완성합니다.

카스타냐초

이탈리아 토스카나와 피에몬테 지방에서는 밤과 우유로 끓인 카스타냐 수프(Zuppa di Castagna)가 사랑받으며, 가을이면 거리마다 직화로 구운 칼다로스테(Caldarroste)가 등장합니다. 밤가루로 만든 카스타냐초(Castaganccio)는 올리브 오일, 로즈마리, 잣, 건포도를 넣어 구운 소박한 케이크로, 달콤하면서도 허브 향이 어우러진 독특한 맛을 냅니다.

일본에서는 밤이 황금빛 행복을 상징합니다. 쿠리노 칸로니(栗の甘露煮)는 설탕과 미림으로 졸인 밤이고, 새해 음식 쿠리킨톤(栗きんとん)은 밤과 고구마로 만든 노란 디저트로 부와 번영을 의미합니다. 나가노현 오부세는 밤의 명산지로 알려져 있으며, 밤밥과 밤양갱 등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나라별로 밤은 각양각색이지만, 밤 껍질을 벗길 때마다 퍼지는 고소한 향, 한 알의 단맛은 자연의 선물 그대로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어디를 가든 밤의 맛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계의 밤 축제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밤 축제들은 서로 다른 언어와 식문화에 따라 지역의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어, 알아보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프랑스 남동부 아르데슈(Ardèche) 지역에서는 매년 10월 조아외즈(Joyeuse)와 프리바(Privas), 라불(Laboule)을 비롯한 여러 마을에서 ‘레 카스타냐드(Les Castagnades)’가 릴레이 형식으로 열립니다. 예로부터 아르데슈에서는 밤 생산이 중요한 농업 활동이었고, 특히 ‘샤테뉴 다르데슈(Châtaigne d’Ardèche)’라는 프리미엄 밤으로 유명합니다. 덕분에 밤을 중심으로 한 문화와 축제가 이 지역의 일상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프랑스 카스타냐드

이름 그대로 밤의 축제를 뜻하는 이 행사는 밤 재배 전통이 깊은 아르데슈 주민들의 자부심이 담긴 지역 대표 행사입니다. 2000년대 초부터 본격화되었죠.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밤 산지의 문화를 계승하며, 마을마다 서로 다른 개성을 뽑냅니다. 조아외즈에서는 거리 전체가 무대가 되어 퍼레이드와 음악 공연, 불꽃쇼가 펼쳐지고, 프리바는 농부들이 직접 수확한 밤과 밤가루 빵, 크레페, 밤 맥주 등을 파는 장터가 중심이 됩니다.

또 다른 마을 라불에서는 밤나무 숲을 따라 걷는 생태 투어나 전통 음악 공연이 열려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축제의 정취를 더합니다. 축제 기간 동안 아르데슈 전역은 구운 밤 냄새와 음악,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합니다. 이 밖에 어린이를 위한 체험 프로그램과 지역 예술가들의 공연도 이어져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축제입니다.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Galicia), 아스투리아스(Asturias), 카스티야이레온(Castilla y León)지역에서 11월 초에 열리는 전통 축제 마고스토(Magosto)는 수확의 끝과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의식에서 유래했습니다. ‘마고스토’라는 이름은 라틴어로 ‘거대한 불’을 뜻하는 magnus ustus에서 왔다고 합니다. 오래 전 켈트족이 숲 속에서 모닥불을 피우며 수확을 기념하던 의식이 훗날 성 마르틴의 날(11월 11일) 축제와 만나 지금의 모습으로 이어진 것이죠.

마고스토

참고로 성 마르틴의 날은 가을의 마지막,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유럽 전통 명절입니다. 마고스토는 그 정신이 밤과 와인으로 이어진 ‘따뜻한 수확의 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모닥불 주위에 모여 구운 밤과 햇포도주를 나누며, 전통 악기인 가이타(Gaita)와 탬버린 소리에 맞춰 춤을 춥니다. 얼굴에 밤 재를 묻히며 웃고 떠드는 풍습도 있고, 아이들은 주머니를 들고 집집마다 다니며 밤을 받습니다. 도시 광장에서는 음악 공연과 시식 부스, 퍼레이드가 같이 이어져 지역 주민들이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한편 일본 나가노현의 작은 산간 마을 오부세(小布施)에서는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오부세 밤 축제(おぶせ栗まつり, Obuse Kuri Matsuri)가 열립니다. 구리(栗)는 일본어로 밤을 뜻하며, 이곳은 에도 시대부터 일본 최고의 밤 산지로 손꼽혀 왔습니다. 1800년대 초, 지역 제과업자가 밤가루를 이용해 만든 전통 과자가 인기를 끌면서 오부세의 밤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부세 구리 마츠리

일본인에게 밤은 가을의 정취를 상징하는 맛입니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편의점 디저트부터 고급과자까지 밤을 주제로 한 제품이 쏟아지고, 결혼식과 명절 음식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쿠리킨톤(栗きんとん)은 노란색의 밤 디저트로 부와 번영을 뜻해 새해 음식인 오세치(お節料理)에 빠지지 않으며, 구리 오코와(밤밥)는 집에서 가을을 느끼는 가장 전통적인 방식 중 하나입니다. 일본 사람들에게 밤은 계절의 변화를 알리고, 풍요와 따뜻함을 함께 상징하는 존재인 셈입니다.

축제 기간 동안 마을 중심부에는 밤을 직접 구매할 수 있는 농가 부스가 늘어서고, 구리 오코와, 쿠리킨톤, 몽블랑 등 밤을 활용한 요리와 디저트를 맛볼 수 있습니다. 밤 껍질 벗기기 대회와 어린이 체험 프로그램도 함께 열려 가족 단위 관광객으로 붐빕니다.

또한 오부세는 세계 미술사에 깊은 흔적을 남긴 일본의 거장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가 말년을 보낸 마을로도 유명합니다. 호쿠사이는 오부세에서 머물며 사찰 천장화와 벽화를 그렸고, 그 작품들이 지금도 호쿠사이 미술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부세 구리 마츠리는 먹거리 축제를 넘어 예술이 공존하는 문화 축제와 같습니다.

겨울의 작은 즐거움, 군밤 한 봉지

군밤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거리의 군밤. 밤은 겨울을 따뜻함으로 기억하게 하는 열매입니다. 이번 겨울에도 군밤 한 봉지가 주는 일상의 즐거움을 놓치지 마세요. 다음 겨울이 오기 전, 아쉽지 않을 만큼 가족, 친구들과 함께 많이 나누고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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