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 물질적·공간적·시간적으로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상태. 단어만 놓고 보면 여유를 만끽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법도 한데 바삐 돌아가는 일상, 특히 추위에 몸을 움츠리게 되는 이즈음이면 한 톨의 여유도 갖기 어렵다. 바쁜 일상에 치이고 움츠러든 마음에 훈풍을 불어넣어줄 여행이 절실하다.
VIENNA – 도시가 선물하는 삶의 여유
‘여유’의 필수 조건은 공간이다. 잠깐이나마 내 공간이라고 여겨지는 곳, 마음도 몸도 편히 누일 수 있는 공간이 없다면 마음이 쫓기기 마련. 그래서 여행자들은 숙소에 신경을 쓰고 정부는 국민과 시민의 주거 안정에 공을 들인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는 빈부 격차를 줄이고 시민의 주거 안정을 도모하고자 임대와 분양 주택을 골고루 배치했다. 주택 정책을 한 수 배우고 가려는 ‘공무원들의 순례지’라는 우스갯소리가 붙을 정도다.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는 비엔나의 주택 정책도 한때는 시행착오를 겪었다. 질보다는 양, 여러 세대를 공급해야겠다는 욕심이 앞서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지 못한 것이다.
시 당국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유명 건축가들에게 공공 주택의 설계를 의뢰했다. 아름다운 도시 비엔나의 풍경과 멋들어지게 어울리는 공공 주택을 세울 건축가, 그중 한 명은 오스트리아가 사랑한 건축가 훈데르트바서였다. 조각가이자 건축가, 화가이자 환경 운동가였던 훈데르트바서는 경직되고 획일화된 모습을 거부했다. 자연에서 온 유기체적인 형상과 나선, 곡선을 사랑한 그의 작품에는 직선이 거의 없다. 그의 이런 성향은 비엔나 공공 주택의 역작으로 꼽히는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비엔나 제3구역에 있는 이 아담한 아파트에는 52세대가 살고 있다. 이 주택의 가장 큰 특징은 52가구의 창문이 모두 다르다는 것.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다. 벽도 한두 가지 색으로 통일하지 않고 잘게 구역을 나눠 서로 다른 질감과 색으로 처리했다. 어린아이에게 찰흙과 물감을 비롯한 각종 재료를 주고 마음껏 집을 만들어보라고 하면 이와 비슷할까. 구불구불한 창문과 벽면을 타고 식물이 자라고 옥상에는 초록빛이 무성하다. 시민에게 각자의 공간과 더불어 자연의 공간도 함께 선물하고자 한 그의 의지가 느껴진다.
공간에서 비롯된 여유는 삶의 다양한 즐거움과도 연결된다. 미술관에는 클림트의 ‘키스’가 걸려 있고 곳곳에 음악 공연장이 들어선 비엔나는 예술의 천국. 특히 클래식 음악 팬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클래식 공연, 하면 어렵고 관객 에티켓도 까다로우며, 결정적으로 티켓이 비싸다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비엔나에서는 이러한 편견을 접어도 좋다. 150년 전통을 자랑하는 국립 오페라극장에서는 연중 70회가 넘는 오페라와 발레 공연을 올리는데 이 중에는 고작 커피 한 잔 값인 공연도 있다. 클래식이 번성하던 시기, 실제 귀족들이 음악을 접하는 수단이었던 살롱 음악회도 골목골목의 소규모 공연장에서 열린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트라우스 등 음악가의 곡들을 당대 살롱 음악과 똑같은 편성으로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함께 듣는다. 왕정 시절의 귀족처럼 연주자와 가수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클래식을 즐기는 시간. 티켓 가격은 40에서 70유로 사이로 비교적 저렴하다. 커피 한 잔 값으로 즐기는 가벼운 공연부터 특별한 날 특별한 사람과 함께 정장을 빼입고 즐기는 공연까지, 취향 따라 상황 따라 골라 즐길 수 있는 음악이 곳곳에서 연주되는 비엔나. 삶의 여유가 가득해 늘 마음이 따뜻한 도시의 클래식답다.
DUBAI – 붉은 사막 위의 풍족한 여유
180여 년 전 아부다비에서 독립해 두바이에 둥지를 튼 알 막툼과 800여 명의 부족은 오늘의 번성을 예견했을까? 가능성은 수 세기 전부터 존재했다. 두바이는 아랍어로 ‘메뚜기’를 뜻하는데 이곳이 아랍 일대 상인들이 운집한 중계 무역의 기지였다는 점에서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16세기 무렵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진출하려는 유럽 열강의 각축장이었으니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금세공과 유통 산업으로 돈을 벌고, 중동 최대 규모의 항구를 통해 세계 무역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더니 복권에 당첨된 격으로 땅 밑에서 석유가 발견된 나라.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사막 위에 기적을 이룬 두바이에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없는 것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인 부르즈 칼리파를 필두로 독특한 디자인의 높고 화려한 건축물이 즐비하며 그 안에는 각종 글로벌 기업과 호텔, 대규모 쇼핑몰과 수족관, 각종 여가 시설이 꽉꽉 들어차 있다.
세계 각국에서 각계각층의 사람이 몰려드는 만큼 미식의 기준도 까다롭다. 산해진미와 볼거리, 살 거리, 즐길 거리가 풍부한 나라. 그래서 그런지 화려하고 정신없는 도시일 거라는 생각에 느긋한 여유를 만끽하고 싶은 이들의 선택지에서 제외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선셋 비치의 한적한 풍경은 이러한 편견을 깨기에 적절하다.
선셋 비치는 두바이 해안을 따라 좀 더 한적한 곳에 넓게 자리 잡고 있어 그림처럼 아름다운 페르시아만을 보며 휴식을 취하기 좋은 장소다. 다이내믹한 수중 스포츠나 서핑 대신 노을 속 저녁 산책이 더욱 어울리는 해변. 저 멀리 두바이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부르즈 알 아랍이 우뚝 서 있어 사진 찍기 좋은 장소라는 구색도 갖췄다. 시내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만 벗어나면 붉은 모래 언덕이 나타난다.
두바이의 붉은 사막을 즐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이른 새벽에 떠나는 선 라이즈 투어는 이름 그대로 사막에서 일출을 맞이하는 시간. 하늘도 땅도 붉게 물든 사막의 고요한 아침, 운이 좋다면 사막에 오기 위해 부지런히 서둔 여행자들보다 약간 늦잠을 잔 야생 동물들이 막 잠에서 깨어나 어슬렁거리는 모습도 구경할 수 있다. 새벽부터 일어나 움직이느니 아예 사막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출을 보는 것도 좋겠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에는 베두인 캠프에서 즐기는 연회와 야영을 할 기회가 포함돼 있다. 캠프에서 아랍 스타일의 뷔페 식사와 전통 공연을 즐기고 나면 이제 잠들 시간. 조명을 탁 끄고 침낭 안에 들어가 누우면 쏟아질 것만 같은 수많은 별이 이불처럼 펼쳐진다.
MALDIVES –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할 자유
애니메이션 세상의 현자(賢者)로 숱한 어록을 남긴 ‘곰돌이 푸’는 이런 말도 했다. “아무것도 안 하다 보면, 대단한 뭔가를 하게 돼.” 푸는 1970년대의 애니메이션부터 작년 10월에 개봉한 영화 버전에서까지 언행일치를 이룬다. 그는 거창한 무언가를 계획 세워 하지 않았다. 당뇨 걱정 없이 좋아하는 꿀을 마음껏 퍼먹고 숲속 친구들 그리고 크리스토퍼 로빈과 종일 노닥거린다. 그러면서 푸는 늘 행복했고 그를 사랑한 독자와 관객들도 덕분에 행복했노라 말한다.
그런데 푸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것도 안 하기’에 성공하려면 우선 장소가 중요하다. 푸와 같은 달인이 아니라면 매일 거주하는 집은 썩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작정하고 ‘아무것도 안 하기’에 도전하려면 떠나야 한다. 이러한 미션에 어울리는 장소는 어디인가? 곰돌이 푸와는 결이 매우 다른 한국 영화 <내부자들>에서 ‘안상구’ 역을 맡은 이병헌은 이러한 명대사를 남겼다. “모히토 가서 몰디브 한잔?” 해외 사정에 어두운 안상구가 주워들은 말을 거꾸로 내뱉은 것이지만 극 중에서 ‘몰디브’는 ‘전쟁터 같은 현실을 탈출해 닿고 싶은 어딘가’로 묘사된다.
실제로도 그렇다. 1,190여 개의 작은 산호섬으로 이뤄진 몰디브는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 특히 잔잔하고 한적한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집 한 채 겨우 들어선 작은 섬부터 배낭여행자의 성지인 마푸시섬까지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섬들은 ‘라군’을 끼고 있다. 라군은 섬을 둘러싼 산호 벽과 섬 사이의 수심이 얕은 바다를 말한다. 높은 파도를 막아주어 섬 주변이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다.
오붓한 독채 숙소의 창가에 앉아 잔잔하다 못해 고요한 바다를 하염없이 보아도 좋고, 그러다 좀 움직여야겠다 싶으면 조용한 해변을 걸어도 좋다. 걷다가 발도 담그고 얕은 물에 누워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세상 근심도 씻겨나간다. 혹자는 이토록 아름다운 섬까지 오기 위해 들인 시간과 비용이 생각나 가만히 쉬는 것이 아쉬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했다’는 느낌이 들면서 몸은 피곤하지 않은 크루즈 투어를 추천한다. 리조트마다 다양한 크루즈를 운영하는데 그중 ‘선셋 크루즈’는 몰디브의 석양을 보다 가까이서 느껴보는 투어 프로그램이다.
오후와 초저녁 사이, 아담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 그사이, 내내 푸르렀던 바다가 금빛으로 물든다. 하늘도 금빛, 바다도 금빛, 화려한 수식어 대신 오로지 감탄사만 읊게 되는 풍경이다. 평범한 일상에서는 접하지 못했던 경이로운 순간이 오래도록 추억으로 남을 터. 이것이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대단한 무언가를 하게 되는 신기한 경험이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했다’는 느낌이 들면서 몸은 피곤하지 않은 크루즈 투어를 추천한다. 리조트마다 다양한 크루즈를 운영하는데 그중 ‘선셋 크루즈’는 몰디브의 석양을 보다 가까이서 느껴보는 투어 프로그램이다.
오후와 초저녁 사이, 아담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 그사이, 내내 푸르렀던 바다가 금빛으로 물든다. 하늘도 금빛, 바다도 금빛, 화려한 수식어 대신 오로지 감탄사만 읊게 되는 풍경이다. 평범한 일상에서는 접하지 못했던 경이로운 순간이 오래도록 추억으로 남을 터. 이것이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대단한 무언가를 하게 되는 신기한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