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알프스 아래 에너지 가득한 도시, 취리히
모두가 반짝이는 고급 시계를 차고 치즈와 와인을 끼니마다 먹고 마시는 풍족하고 럭셔리한 이 도시에 이렇게 편하고 행복하게 오래 머무를 줄이야. 걱정했던 불편함과 이질감은 온데간데없고 감사한 마음으로 깊이 들이쉬는 맑은 알프스 공기와 착하고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다.
크면서 작고, 빠르면서 느린, 매력 넘치는 대조적인 도시
여러 번 스쳐 지나며 꽤 괜찮은 곳이었지, 정도로 기억됐던 취리히에 오래 머물기로 하고 산더미 같은 짐을 풀던 첫날, 평생 소중하게 간직할 추억을 한 아름 만들게 될 것이라 직감했다. 취리히는 이런 곳이군, 하고 짐작하려 하면 이내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성당 몇 개와 잔잔히 흘러 바다처럼 넓은 취리히 호수로 이어지는 리마트강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면 어제가 그제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도시구나, 싶다가도 매일 새로운 맛집이 하나둘씩 문을 열고, 공용어가 영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세계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기술력과 창의력을 자랑해 ‘코즈모폴리턴의 도시’라는 면모를 뽐낸다.
이렇게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발전하는 스위스 최대 도시 취리히의 매력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하이디가 뛰어 내려올 것만 같은 언덕에서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고, 해가 지면 간판도 잘 보이지 않는 스피크이지 스타일 바에서 맛있는 칵테일로 하루를 마무리하던 여러 날을 반복하며 곱씹은 생각이다.
수천 년 전부터 고스란히 보존되어온 자연과 트렌디한 ‘힙함’이 멋지게 균형을 이루는 곳. 4개 문화권으로 나뉘는 스위스에서 독일어권에 포함되는 취리히는 역시 정확하고 시간을 어기지 않으나, 목요일부터 주말처럼 노는 열정 넘치는 젊은이들의 아지트인 취리히 웨스트 지역을 엿보면 이보다 세련되고 새로운 도시가 없다. 그래서 정의할 수 없는 이 도시에서의 한 달은 장기 여행이 아니라 너무나 아쉽고 짧은 기간이다.
산자락을 들이마시고 호숫물을 삼키는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취리히 한 달 살기를 추천한다. 취리히에서 24시간을 보내도, 1년을 살아도 매일 가고 싶은 올드 타운은 중앙역에서 호숫가로 시원하게 뻗은 반호프슈트라세를 따라 걷다가 양옆 작은 골목을 함께 돌아보며 구경한다.
도시의 수호성인 펠릭스와 레굴라가 묻혀 있던 곳에 지었다는 설이 있는 그로스뮌스터, 유럽에서 가장 큰 시계가 붙어 있는 성 페터 교회를 보고 트램 종소리를 들으며 다리를 건너면 자코메티와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유명한 프라우뮌스터가 있다. 과연 종교 개혁의 도시라 불릴 만한 큼직한 예배당들이다.
스위스 디자인 박물관, 예술의 집인 쿤스트하우스, 스위스 국립 박물관은 취리히에서 딱 3곳의 전시장을 찾아야 한다면 추천하는 곳들로, 하루에 한 군데씩 가보라고 조언하고 싶을 정도로 전시가 방대하고 규모가 상당하다. 사실 역사가 오래됐고 기록이 잘 보존·전시되어 있는 유럽의 도시들을 여행하며 겪는 고충은 여러 전시를 하루에 몰아서 봐야 한다는 것인데, 한 달 살기를 하면서는 그런 걱정이 없다. 한 작품에 할애할 수 있는 마음의 동요는 진폭이 크고 상념의 깊이는 깊으니 시계를 들여다보지 않고 온전히 눈앞의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취리히 웨스트에서 보물 찾기
공장 지대였던 중앙역 뒤편은 10년 전만 해도 정말 아무것도 없던 동네였지만 지금은 프라우뮌스터보다도, 크루즈 보트가 물살을 가르는 호숫가보다도 주목받는 힙한 동네다. 젊고 예술적인 에너지로 개성 넘치는 이 지역은 옛 모습을 모두 무너뜨리고 새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장 지대 특유의 인더스트리얼한 느낌을 간직한 채 21세기의 기술과 창의성을 덧칠한다. 원래 무엇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도록 뼈대를 그대로 살린 창고 건물들이 클럽과 라운지, 콘서트장과 스타트업 사무실로 새 이름표를 달고 문을 열었다.
취리히 웨스트의 대표적인 볼거리는 트럭 덮개로 쓰는 방수포 소재로 제작하는 가방이 유명한 프라이탁의 플래그십 스토어. 컨테이너를 쌓아 올린 탑 모양의 쇼핑몰은 실용적이면서도 예술적인 취리히 브랜드들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바로 뒷골목에는 3년 전 특별 프로젝트로 잠깐만 열고 닫으려 했던 프라우 게롤즈 가르텐이 있다. 맥주 가든과 식당, 부티크 가게와 예술 전시를 겸하는 다목적 공간으로 특히 여름밤 취리히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스폿이다.
고가교 아래 아치는 ‘임 비아둑트’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나 여러 상점과 갤러리, 카페와 맛집, 시장을 수용한다. 아치 아래에서부터 리마트강으로 이어지는, 이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철길은 보행자와 자전거 도로로 개조했다. 만나는 취리히 사람들에게 매번 취리히 웨스트에서 가장 추천할 만한 곳을 알려달라고 청하면 모두가 절대 한 곳만 꼽을 수는 없다며 저마다 좋아하는 곳을 그만하라고 부탁할 때까지 읊었다.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머무름의 매력
솔직히 말하자면 ‘취리히 한 달 살기’를 망설였던 가장 큰 이유는 스위스 프랑이다. 햄버거 하나에 2만 원 가까이 써야 하는, 싱가포르 다음으로 파리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도시로 꼽히는 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니 주머니 사정을 자꾸만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비행기 티켓을 사고 막상 도착해보니 취리히는 기대 이상으로 나를 행복으로 채워주었고 물가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3개월 미만의 체류는 집을 구하는 것보다 호텔이나 호스텔에 머무는 것이 이득일 수 있다. 매일 생수가 2병씩 방에 놓이고, 조식이 포함된 가격으로 머물면 식비 지출의 1/3은 해결되니 말이다.
방을 구하려면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급격히 월세가 낮아지지만 그만큼 교통비가 발생한다. 취리히의 볼거리가 대부분 밀집된 중앙역을 중심으로 한 도심에 숙박지를 잡으면 교통비를 거의 쓰지 않고도 한 달 내내 머무를 수 있을 정도로 걷기에 최적화된 도시다. 주요 랜드마크 중 중앙역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엥게 지역의 피파 축구 박물관인데, 이마저도 2km가 되지 않아 도보로 25분이면 도착한다.
[취리히 한 달 살기! 체크리스트]
1. 취리히 카드로 첫 3일 동안 맛보기 여행
한 달 살기의 가장 큰 장점은 느긋하게 한 도시를 구석구석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내키지 않으면 숙소 밖으로 아예 나가지 않아도 되니 한 달 내내 교통권을 구입해 쓸 필요는 없다. 대신 24시간권, 72시간권으로 구매 가능한 취리히 카드를 이용해 무제한 2등석 대중교통권(케이블카와 보트 포함)과 리마트강 크루즈, 40여 개 박물관 무료·할인 입장, 그리고 올드 타운 투어 50% 할인 혜택을 누려보자. 도시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지역에 마음이 가는지, 몇 번을 더 오고 싶은지를 파악하는 처음 며칠 동안 매우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2. 기차 여행을 떠나자
도심에 있어 접근성이 훌륭한 취리히 중앙역은 대형 쇼핑몰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역 안에 볼거리가 아주 많다.
12월 크리스마스 마켓이 가장 성대하게 열리는 역내 광장은 연중에도 내내 다양한 행사를 주최한다. 심심하면 들러보기 좋은 랜드마크인 중앙역에 자주 가보라고 권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기차로 1시간이면 취리히와 사뭇 다른 매력의 주변 도시들로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젓한 호반 도시 루체른, 화려한 로코코 양식의 도서관으로 유명한 장크트 갈렌도 모두 취리히 중앙역에서 1시간이면 찾아갈 수 있다.
3. ‘쿱’은 내 친구
주방이 딸린 숙소에 머물지 않더라도 스위스 여행자들이 꼭 찾게 되는 대형 슈퍼마켓 체인 ‘쿱’을 애용하자. 반조리 식품, 다양한 종류의 맛 좋은 요깃거리, 과일, 간단한 목욕용품, 화장품, 의약품까지 규모가 클수록 없는 것 없이 다 파는 쿱과 친하게 지내도록.
매일 쿱에서 꼭 샀던 것은 바로 커피우유다. 바로 짜서 넣었나 싶을 정도로 우유의 신선도가 엄청나서,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에스프레소보다도 더 맛있다고 찬양하며 한 번에 두세 개씩 사게 되던 메이드 인 스위스 커피우유는 꼭 한 번 마셔볼 것.
4. 영화로 미리 만나는 취리히
시네필들에게 취리히는 이미 익숙한 도시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멋들어진 중세 도시들을 갖춘 스위스는 제임스 본드 <007> 시리즈 중 여러 편을 비롯해 수많은 영화의 로케이션 장소로 활약해왔다. 그중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과 <본 아이덴티티>는 취리히에서 촬영했다. 스위스 일주를 준비한다면 제네바에서 촬영한 <천사와 악마>, 융프라우 지역의 그린델발트에서 촬영한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도 추천한다.
5. 일 년 내내 즐거운 도시
스위스에서 가장 크고 북적이는 도시답게 취리히는 한 해 동안 내내 쉴 틈 없이 신나게 논다.
1월에는 국제 마장 쇼, 2월에는 아이스 쇼, 3월에는 카니발, 그리고 4월에는 16세기부터 이어져온 전통적인 봄 축제 ‘젝세로이텐’이 있다. 춘분 후 첫 월요일, 일반적으로 4월 셋째 월요일에 그로스뮌스터 성당의 종을 울려 취리히 사람들의 봄맞이를 알리는 중요한 날이며 거대한 눈사람을 태우는 신나는 퍼레이드가 하이라이트다. 5월에는 무용 축제인 취리히 탄츠, 6월에는 한 달 내내 취리히 페스티벌이 열린다.
취리히의 오페라 하우스, 시립 극장, 오케스트라, 시립 미술관인 쿤스트하우스 등 여러 공연장과 전시관이 협력해 대대적인 예술 축제를 벌인다. 7~8월에는 야외 영화관 축제, 9월에는 필름 페스티벌, 10월에는 예술제와 재즈 페스티벌, 11월에는 자동차 쇼, 그리고 12월에는 한 해의 대미를 장식하는 동화 같은 크리스마스 마켓이 중앙역을 비롯해 시내 곳곳에서 열린다.
6. 취리히 지역 특선 요리
퐁뒤와 라클렛은 스위스에서 반드시 먹어봐야 할 요리지만 한 달 내내 ‘꼬릿꼬릿’한 치즈를 매일 먹을 수는 없는 법. 시원한 수제 맥주를 종류별로 마셔보며 음미하기 좋은 취리히 지역의 대표 음식을 먹어보자.
‘취리히 스타일로 조각내다’라는 뜻의 ‘취르허 게슈넷첼테스’는 화이트 와인 데미글라스 소스를 곁들인 양고기 요리로 스튜처럼 졸여 밥이나 뢰슈티와 함께 먹는다. 웰빙 열풍의 선두주자인 뮤즐리가 스위스의 의사가 개발한 요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비르허 뮤즐리는 취리히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침 식사 메뉴로 모든 카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든든하고 건강한 뮤즐리에 사과 등 각종 과일과 견과류, 요구르트를 넣어 쉽게 만드는 고소하고 새콤한 음식이다.
글_맹지나
여행 작가이자 작사가. 저서로는 <인조이 치앙마이>, <알프스, 행복해지기 위해> <크리스마스 인 유럽> <그 여름의 포지타노> 등이 있다.
대한항공 운항 정보
인천 ~ 취리히 주 3회 운항
※ 자세한 스케줄은 대한항공 홈페이지(www.koreanair.com)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