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이열치열, 활화산 트레킹과 온천욕
황야 같은 자갈밭을 낡은 사륜구동 자동차가 멋대로 길을 내며 달린다. 여기는 필리핀 클락(Clark). 일찌감치 들었던 사전 정보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고정관념 바깥, 오프로드에 진짜 클락으로 가는 길이 있다.
열기는 이곳으로부터, 피나투보산 트레킹
뒤에 오던 차가 맹렬한 속도로 따라붙었다. 연막탄처럼 짙은 모래바람 때문에 따라오는 줄도 몰랐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추격전이 이쪽저쪽에서 벌어졌다. 피나투보산(Mount Pinatubo) 트레킹을 막 시작한 참이었다.
1991년 첫 폭발 이후 1993년까지 분출한, 20세기 마지막 화산 대폭발로 기록을 세운 바로 그 산이다. 1991년 폭발 당시 화산폭발지수는 6이었다. 역사에 기록된 최고 화산폭발지수가 8이었으니 피나투보산의 폭발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이었을지 짐작할 만하다.
수치보다 더 드라마틱한 것은 실제 현장이다. 거대한 강물이 흘렀던 흔적처럼 남은 끝없는 자갈밭, 규칙 없이 깎여 내려간 절벽과 화산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계곡 등. 지금도 화산 활동이 감지되는 활화산이라는 사실이 괜히 긴장감을 일으켰다.
트레킹 시작 지점까지 이동을 돕는 게 사륜구동 자동차다. 자갈과 모래로 뒤덮인 오프로드를 지나야만 트레킹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험심이 강한 여행자들은 일부러 지붕이 없는 오픈카를 고르기도 한다. 기시감이 드는 것은 영화 <매드맥스>의 추격신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본격적으로 트레킹이 시작되면 단단히 무장해야 한다. 정상까지 2시간 동안 용암이 흘러내린 길 그대로를 따라 오른다. 데크와 계단이 놓인 상냥한 길이 아니다. 인공적이라 할 만한 것은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 뿐.
왕복 6차선에서 8차선 도로 정도의 폭을 오가는 계곡은 자갈과 돌과 바위가 뒤죽박죽이다. 꼭대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길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제멋대로 방향을 바꾼다. 트레킹화가 가볍고 물에 젖어도 괜찮은 것이어야 하는 이유다. 물길을 피해 가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피해 갈 길이 없는 상황이 꼭 벌어지니까.
다행인 것은 울퉁불퉁할 뿐 난도는 낮다는 것이다. 전문적인 기술 없이도 차분히 걷기만 하면 용암이 낸 길을 따라가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 길 양쪽으로 이어지는 절벽엔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이 그대로다. 용암은 한순간에 억겁의 역사를 쓸어내리고 자신의 흔적을 새겨놨다.
피나투보산 정상은 호수다. 화산 분출로 칼데라호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분화구를 둘러싼 봉우리들이 오목한 호수를 감싸고 있다. 폭발의 현장이란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하고 평화롭다. 수면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부터 들려왔다.
뜨거운 것이 좋아, 푸닝 온천
활화산의 열기를 온몸으로 느껴보기로 했다. 화산이 있는 곳에는 온천이 있는 법. 피나투보산의 동쪽 지대에 푸닝 온천(Puning Hot Spring)이 있다. 클락 시내에서는 서쪽, 차량으로 약 30분 거리다. 실제 푸닝 온천은 단순히 온천만을 칭하는 것은 아니다. 화산의 열기를 이용한 온천, 모래찜질 그리고 머드팩까지 여러 가지 즐길 거리를 아우르기 때문이다. 화산 종합 세트라고 하면 좋을까? 덕분에 2004년 개발된 이후 클락의 대표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푸닝 온천 방문자 센터에서 빌려주는 반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고 나면 본격적인 투어가 시작된다. 사륜구동 자동차에 올라 방문자 센터에서 온천장까지 다시 30분을 달린다. 피나투보산 트레킹과 마찬가지로 오프로드지만 좀 더 폭이 좁고 굽이진 길이다. 솔솔 퍼지는 유황 냄새가 짙어지는 것 같으면 목적지에 다 온 것이다.
작은 산 언덕배기 전체가 계단식으로 이뤄진 온천탕이다. 화산의 열기로 데워진 온천수는 온도별로 총 11개 노천탕을 꽉 채우고 있다. 산에서 흘러나온 지하수가 수증기를 뿜으며 흘러내리는 것도 보인다. 필리핀의 낮 기온이 추울 리 없건만 탕에서 몸을 일으키면 훅 찬 바람이 지나가는 것 같다.
뜨끈하게 몸을 데우고 재빨리 모래찜질방으로 이동한다. 이곳 모래도 화산의 열기로 데운단다. 얼굴을 제외한 전신을 모래로 덮고 그 위에 사람이 올라가 꾹꾹 발에 힘을 줘 마사지를 한다. 이불을 덮거나 물속에 있는 기분과는 또 다르다. 수만 개의 손이 전신을 꽉 잡고 있는 기분이다.
온천이 담금질의 과정이었다면 모래찜질은 비로소 열기를 내재화하는 과정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탈 모래를 털고 나오자 손끝, 발끝이 찡하게 따뜻했다.
글_ 차민경
여행 기자로 7년 차. 아름다움은 도처에 있고, 그것을 담아내는 일을 한다.
대한항공 운항 정보
인천 ~ 클락 _ 매일 직항 운항
※ 자세한 스케줄은 대한항공 홈페이지(www.koreanair.com)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