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항공 직항으로 2시간 40분이면 닿는 치토세(千歲). 삿포로에서는 기차로 40분 거리입니다. 대부분 이곳을 신치토세 공항 덕분에 홋카이도의 관문으로만 기억합니다. 하지만 잠시라도 머물러보면 알게 됩니다. 치토세가 진짜 ‘힐링의 도시’라는 사실을요. 달려야 할 이유도, 서둘러야 할 필요도 없는 도시가 치토세입니다.
가을이면 치토세강을 거슬러 연어들이 힘차게 올라오고, 시코쓰 호는 사계절 내내 맑은 물빛으로 여행자를 맞이합니다. 타루마에 산의 고요한 능선과 마루코마 온천의 따뜻한 물은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고단함을 달래줍니다.
그래서인지 일본 사람들 역시 ‘바쁘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 싶을 때 이 도시를 찾는다고 합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나를 돌보고 싶은 이들에게 제대로 된 힐링을 선물해주는 도시 치토세는 청정한 공기와 단풍이 어우러진 9월과 10월이 가장 머물기 좋은 계절입니다.
짧지만 오래 기억될 치토세 힐링 여행을 지금 떠나보세요.
07:30 A.M. 시코쓰 호
이번 치토세 힐링 여행의 시작이자 끝은 시코쓰토야(Shikotsu-Toya) 국립공원 안에 자리한 시코쓰 호(Lake Shikotsu)입니다. 일본에서 여덟 번째로 크다는 시코쓰 호는 일본에서 가장 맑은 호수입니다. 수만 년 전 화산 폭발로 형성된 칼데라 호수로, 거대한 분화구가 빗물과 지하수로 채워져 탄생했습니다. 면적은 약 78.4㎢에, 최대 수심은 363m죠.

시코쓰 호에는 오래전부터 ‘얼지 않는 호수’라는 별칭이 있습니다. 한겨울 홋카이도 전역이 눈과 얼음에 덮여도 시코쓰 호는 수심이 깊고 화산열에 의해 수온이 일정하게 유지되기에 결빙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호수 깊은 곳에 거대한 용신(龍神)이 살고 있어 늘 물을 휘어저 얼지 않게 한다는 이야기도 있죠.
시코쓰 호에서 패들보트나 카약을 타고 미끄러지듯 나아가면 아침 햇살을 머금은 수면이 수정처럼 반짝이며 거울처럼 산과 하늘을 품어냅니다. 호숫가를 따라 난 산책로에서는 물빛과 숲향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어 힐링 코스가 됩니다. 자전거로 한 바퀴 도는 라이딩 코스도 마련되어 있는데, 특히 가을이면 호숫가의 숲이 단풍으로 붉게 물들어 청록빛 호수와 어우러진 색 대비가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10:00 A.M. 다루마에 산
시코쓰 호에서 몸을 풀었다면, 이제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볼 차례입니다. 차로 약 30분을 달리면 일본의 대표적인 활화산 중 하나인 다루마에 산(Mount Tarumae)에 닿습니다. 가을 단풍철과 겨울에는 절경이 펼쳐져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죠. 해발 1,041m로 비교적 완만한 길이 이어져 초보자도 부담없이 오를 수 있습니다. 초보자 코스는 약 1시간이면 충분하며, 분화구 둘레를 도는 상급자 코스도 3~4시간이면 완주가 가능합니다.

다루마에 산의 또 다른 매력은 계절마다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봄이면 등산로를 따라 야생화가 피어나 길을 수놓고, 여름에는 초록빛 숲이 발 아래로 끝없이 펼쳐집니다. 가을에는 붉게 물든 단풍이 산을 부드럽게 감싸며, 겨울에는 새하얀 눈과 검은 화산암이 어우러져 강렬한 대비 속 또 다른 세상을 그려냅니다.
정상에 서면 공기부터 다릅니다. 은은한 유황 냄새와 함께 지면에서 피어오르는 열기가 발끝을 스치고, 바람이 불면 분화구 안쪽에서 낮게 울리는 숨결 같은 소리가 들려옵니다. 오래전부터 아이누족은 이곳을 ‘불의 신이 깃든 산’이라 불렀고, 화산의 숨결을 신성하게 여겨왔습니다. 지금도 그 기운은 변함없이 살아 있는 듯합니다.
다루마에 산은 서봉, 중앙봉, 동봉 세 봉우리로 나뉘며, 그중 중앙봉에는 독특한 용암 돔(Lava Dome)이 자리합니다. 수천 년 전 분출된 용암이 식으며 만들어진 이 돔은 마치 외계 행성의 한 조각처럼 비현실적인 풍경을 빚어냅니다. 날씨가 맑은 날, 분화구 둘레를 따라 걷다 보면 시코쓰 호와 홋카이도의 산자락은 물론, 멀리 태평양까지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습니다.
13:00 P.M. 로그 베어
다루마에 산에서 내려오면 허기진 몸을 달래고 떨어진 당을 채워야 합니다. 발길이 향하는 곳은 시코쓰 호 관광 안내소 옆에 자리한 통나무집 카페, 로그 베어(Log Bear). 둥근 통나무 건물의 문을 열면, 높은 천장 아래 벽난로가 따뜻하게 타오르고, 묵직한 목재 테이블들이 아늑하게 놓여 있습니다. 이곳은 무려 29년 전인 1990년대 후반에 지어진 로그 하우스 스타일 건물로, 1층은 17석 규모의 작은 카페, 2층은 통나무집 코티지 형태의 숙박 공간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메뉴 구성도 센스가 돋보입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건 직접 로스팅한 커피로, 부드럽고 깔끔한 맛의 로그 베어 블렌드는 이 지역에 꽤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시그니처 메뉴로는 진한 우유 향과 부드러운 식감이 매력적인 수제 아이스크림, 시원하고 깊은 맛의 아이스 카페, 그리고 진득한 풍미의 초콜릿 케이크가 있습니다. 햄과 치즈가 듬뿍 들어간 샌드위치, 따뜻한 수프와 빵 네뉴도 있어 등산 후 허기를 채우기에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죠. 급할 것 없는 여행이니 창 밖에 펼쳐진 호수와 숲 풍경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잠시 숨을 고릅니다.
14:30 P.M. 110년 역사의 온천
치토세 힐링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온천입니다. 시코쓰 호숫가에는 1915년 문을 열어 1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리를 지켜온 일본 전통 노천탕, 마루코마 온천 료칸이 있습니다. 호수 수면과 거의 같은 높이에 설계되어 탕에 몸을 담그면 마치 호수 속으로 스며든 듯한 착각이 듭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청록빛 물결과 고요한 숲, 그리고 따스한 온천수가 온몸을 감싸며, 세상의 시계를 잠시 멈추고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곳입니다.

료칸 내부는 은은한 다다미 향이 퍼지는 전통 객실과 현대적인 편의시설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숙박 없이도 온천을 이용할 수 있어 삿포로에서 주말을 즐기러 오는 당일치기 여행객들도 자주 찾습니다. 료칸 내 식당에서는 로그 베어에서 채우지 못한 허기를 든든히 달랠 수 있습니다. 호수를 바라보며 맛보는 홋카이도산 연어 소금구이 정식, 신선한 사시미와 현지 채소를 곁들인 가이세키 스타일의 메뉴는 이곳의 자랑입니다. 여기에 부드럽게 녹아드는 유바(두부피) 요리를 곁들이면 더 완벽한 한끼 식사가 완성됩니다.
이곳의 온천수에는 나트륨, 칼슘, 마그네슘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 피부 보습과 탄력 유지, 혈액순환 개선, 피로 회복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시코쓰 호의 푸른 물결, 바람이 건네는 잔잔한 파도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몸과 마음이 따뜻하게 녹아드는 시간. 이것이야말로 마루코마 온천 료칸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작은 사치가 아닐까요.
16:30 P.M. 수채화를 닮은 길, 나카지마 탐방로
온천에서 몸이 말랑해진 후, 다시 시코쓰토야 국립공원 안에서 여정을 이어갑니다. 오늘 하루 코스- 시코쓰 호와 다루마에 산, 그리고 온천 료칸까지- 모두가 이 국립공원 안에 있습니다. 남산 공원의 140배, 한라산 국립공원의 절반 이상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이기에, 자연 속 힐링 테마파크라 부를 만합니다.

공원 안에는 치토세의 시코쓰 호 외에도 또 다른 매력을 지닌 도야 호(Lake Toya)가 있습니다. 맑은 날이면 잔잔한 수면 위에 요테이산(羊蹄山)의 봉우리가 비치며 한 폭의 수채화를 완성합니다. 4월부터 10월까지는 매일 밤 20분동안 불꽃놀이가 열리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있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긴 기간동안 불꽃 놀이가 열리죠. 고요한 호수 위에 수놓아지는 불꽃은 낮의 청명한 풍경과는 또 다른 낭만을 선사합니다.
도야 호 한가운데에는 ‘호수 가운데에 있는 섬’이라는 뜻의 나카지마(Nakajima) 섬이 자리합니다. ‘나카지마’는 도야호 중앙의 화산섬 4개를 총칭합니다. 약 5만 년 전 화산 폭발로 솟아오른 마그마 돔이 식어 형성된 이 섬들은 울창한 숲과 기묘한 화산암 지형으로 덮여 있어 지질학적으로도 의미가 깊습니다. 그 4개의 섬 중에 여행자들이 방문할 수 있는 섬을 ‘오시마’라고 부릅니다. 여름부터 초가을까지는 카누나 유람선을 타고 섬에 들어갈 수 있으며, 섬 안에는 산책 코스가 마련돼 있습니다.

이 섬의 대표적인 산책 코스는 ‘나카지마 탐방로(Nakajima Island Walking Trails)’입니다. 자작나무와 전나무 숲이 이어지는 길을 걷다 보면 상쾌한 공기와 피톤치드 향이 몸을 감싸며, 마음은 차분해지고 몸은 한결 가벼워집니다. 또한 멀리 화산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선 호수 풍경이 수채화처럼 펼쳐지고, 숲 향기는 바람결에 실려와 자연을 느끼게 합니다.
코스는 총 3가지가 있고, 코스별로 소요되는 시간이 다르니 원하는 걸로 선택하면 됩니다. 섬 안에는 나카지마 호수의 숲 박물관(Nakajima Lake Forest Museum)도 있어 지역의 식생과 조류, 야생동물, 그리고 화산의 생성 과정을 전시로 만날 수 있습니다.
18:30 P.M. 홋카이도의 맛

치토세 힐링 여행의 마지막 저녁, 시코쓰토야 국립공원에서 차로 25분을 달려 레이크 시코쓰 츠루가 리조트 스파 미즈노 우타(Lake Shikotsu Tsuruga Resort Spa Mizu no Uta)에 도착합니다. 호수와 숲이 어우러진 이곳은 이름 그대로 ‘물(水)의 노래’를 테마로 리모델링된 리조트입니다.
로비에 들어서면 물소리와 숲내음이 어우러진 라운지가 여행객을 맞이합니다. 리조트를 대표하는 아만 뷔페 레스토랑에서는 홋카이도의 신선한 해산물과 제철 채소, 현지 소고기 등 엄선된 식재료로 만든 다채로운 요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일식당 아마 노 우타(Ama mo Uta)도 좋은 선택입니다. 가이세키 요리로 명성이 높은 이곳은 일본 전통 다도에서 유래한 가이세키 스타일을 계승해 계절별 제철 식재료를 사용하고 맛, 색, 향, 그릇까지 세심하게 조화를 이룬 코스를 선보입니다.
시코쓰 호를 바라보며 즐기는 저녁 식사는 치토세 힐링 여행을 완성하는 아름다운 피날레입니다. 바쁘게 돌아가던 일상의 톱니바퀴를 잠시 멈추고,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의 균형을 되찾는 소중한 시간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