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위스’하면 공통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풍경이 있습니다. 융프라우의 만년설, 인터라켄의 청록색 호수, 깨끗한 공기과 들판, 그리고 독일어로 인사하는 현지 사람들.
그런데 알프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면 우리가 아는 스위스와는 조금 다른 도시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이탈리아어로 ‘차오(Ciao)’라고 인사하고, 광장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홀짝입니다.
바로 스위스 티치노(Ticino) 주의 로카르노(Locarno) 입니다. 이곳은 이탈리아 국경에서 불과 20㎞ 정도 떨어져 있으며, 마조레 호수 북쪽 끝에 자리해서인지 스위스에서 가장 따뜻하고 햇살이 가득한 도시입니다. 7~8월 한낮 기온은 25도를 웃돕니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책을 읽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자주 봅니다. 이탈리아어로는 이를 ‘돌체 파르 니엔테(dolce far niente)’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달콤함’ 로카르노는 이 단어가 잘 어울리는 도시입니다.
로카르노는 마조레 호수의 호반, 그 위쪽의 피아차 그란데, 그리고 뒤쪽 언덕의 구시가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눠집니다. 호수에서 광장까지 도보 5분, 광장에서 구시가지 골목 안쪽까지 다시 5분. 한 시간이면 도시 전체를 가로지를 수 있습니다. 신시가지라 부를 만한 곳은 따로 없습니다. 도시 자체가 마을 하나 크기입니다. 면적은 서울의 2% 정도로 용산구 절반 정도 크기이며, 시내 인구는 약 1만 6천 명에 불과합니다. 인근 아스코나(Ascona)와 합쳐도 약 5만 6천여 명 입니다. 로카르노가 한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매년 8월에는 칸, 베니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유럽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로카르노 국제영화제가 10일 동안 열립니다. 거리 곳곳에는 영화제의 상징인 황금 표범 깃발이 휘날리고, 골목마다 영화인들이 넘쳐나며 이탈리아어·프랑스어·영어가 뒤섞여 들립니다.
로카르노를 가장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여정을 소개합니다. 낮에는 알프스 자락의 지중해를 만끽하고, 밤에는 별 아래에서 세계적인 명장들의 영화를 즐기는 꿈 같은 여행을 떠나보세요.
09:00 A.M. 그란데 광장에서 시작하는 하루
로카르노의 하루는 도시의 중심, 그란데 광장(Piazza Grande)에서 시작합니다. 이름 그대로 ‘큰 광장’이라는 뜻이죠. 이곳은 로카르노의 역사를 그대로 대변하는 장소입니다.

파스텔톤 건물들이 광장을 둘러싸고, 그 아래로는 롬바르디아식 아케이드가 길게 이어집니다. 한쪽에는 오래된 시계탑(Torre Comunale)이 단정하게 서 있습니다. 광장 바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그란 자갈들이 촘촘히 깔려 있는데, 19세기 초 인근 마지아(Maggia) 강에서 가져온 돌들이라고 합니다.

1년 중 이곳이 가장 주목받는 8월, 로카르노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10일 동안은 거대한 야외 극장으로 변신합니다. 광장 한가운데에 대형 스크린이 세워지고, 그 앞으로는 해가 지면 전 세계에서 모여든 관객들로 가득찰 수천 개의 의자가 놓입니다. 광장 주변에는 영화제 굿즈 부스와 라디오 부스, 야외 카페가 들어서고, 오늘 밤의 상영작을 고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오늘의 첫 커피는 광장 안에 자리한 오래된 카페, 그란 카페 베르바노(Gran Caffè Verbano)에서 마셔봅니다. 높은 천장과 빈티지한 실내 분위기는 오래된 영화 세트장을 떠올리게 하고, 야외 테라스에서는 광장 전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에 버터 향이 풍기는 크루아상, 혹은 티치노식 단빵을 곁들이면 아침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그란데 광장에는 영화제가 시작되는 시간에 다시 올테니, 저녁 시간을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해봅니다.
10:30 A.M. 중세의 흔적이 깃든 구시가지
그란데 광장 뒤편으로 발길을 옮기면 정지화면 같은 구시가지(Città Vecchia)가 펼쳐집니다. 골목은 좁고 가파릅니다. 차는 다니지 않죠. 빨래가 발코니에 걸려 있고, 작은 정원을 가진 주택들이 보입니다. 모퉁이에는 부티크, 수공예 보석 가게, 빈티지 책방들이 숨어 있습니다. 영화제 기간에는 작은 갤러리들이 70년 넘은 영화제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영화 포스터 전시회를 열기도 합니다.
구시가지의 중심 골목은 치타델라 거리(Via Cittadella)와 산 안토니오 거리(Via Sant’Antonio)입니다. 치타델라 거리는 광장에서 곧장 언덕 위로 이어지고, 산 안토니오 거리에는 골동품 가게와 수공예 작업실이 줄지어 있습니다.

구시가지 한복판에는 로카르노 시립 미술관인 ‘피나코테카 카사 루스카(Pinacoteca Casa Rusca)’가 있습니다. 18세기 귀족 가문의 저택을 개조한 갤러리로, 천장은 높고 창은 큽니다. 이곳의 영구 소장품은 프랑스 추상 조각가 장 아르프(Jean Arp)의 작품들입니다.
광장의 서남쪽 끝에는 매년 3월부터 10월까지만 문을 여는 카스텔로 비스콘테오(Castello Visconteo)가 있습니다. ‘비스콘티 가문의 성’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의 첫 기록은 무려 천 년 전인 998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4세기에 밀라노를 다스리던 비스콘티 가문이 이 성을 차지하면서 지금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한때는 다섯 개의 탑이 있었지만, 1532년 스위스 동맹군이 밀라노군을 무찌르는 과정에서 대부분 허물어졌고, 다섯 개 중 하나만 살아남았습니다.
그 생존의 공간이 지금은 로카르노 시립 고고학 박물관(입장료 10프랑)이 되었습니다. 중세의 무기, 로마 시대의 유리잔, 그중에서도 인근에서 출토된 ‘새 모양 잔’이 유명합니다. 한 켠에는 1925년 세계 평화의 초석이 되었던 ‘로카르노 조약’을 다룬 작은 전시실도 있어 역사의 무게를 더합니다.
그리고 당시 허물어진 카스텔로 비스콘테오의 돌들을 모아 가까운 곳에 교회를 지었는데, 바로 산 프란체스코(San Francesco) 교회입니다. 지금도 교회 벽 어딘가에는 한때 치열한 전쟁터의 요새였던 성의 파편들이 박혀 존재하고 있는 거죠.
광장 근처에는 또 다른 교회 ‘키에사 누오바(Chiesa Nuova)’도 있습니다. 이름을 직역하면 ‘새 교회’라는 뜻이지만 1628년에 지어졌습니다. 어느 덧 400년의 세월을 가진 교회가 되었죠. 입구에는 거대한 성 크리스토포로의 조각상이 있는데, 커다란 덩치와 달리 발만 유난히 작아 시선을 끕니다. 조각가의 실수였을지, 혹은 의도한 부분이었을지는 지금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12:30 P.M. 그로토에서 즐기는 로카르노의 점심
로카르노 구시가지에서는 ‘그로토(Grotto)’라는 단어가 붙은 식당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로토는 원래 알프스 산자락의 바위 동굴이나 지하 저장고를 와인·치즈 저장소로 쓰던 곳이었습니다. 그 앞에 돌 벤치와 돌 테이블을 놓고, 오래된 밤나무 그늘 아래에서 가족끼리 한 끼를 먹기 시작한 것이 그로토의 시작입니다.

시내에도 특유의 분위기를 잘 살린 레스토랑들이 있습니다. 그로토 발마게세(Grotto Valmaggese)가 대표적입니다. 점심시간이면 현지인들로 자리가 빠르게 찹니다. 추천 메뉴는 단연 메를로 리소토(Risotto al Merlot)와 루가니게(Luganighe) 소시지 입니다. 메를로 와인으로 졸여낸 리소토는 보랏빛이 감도는 짙은 색을 띠는데, 그 위에 그릴에 구운 통통한 돼지고기 소시지가 올라갑니다. 와인의 깊은 향과 쌀의 크리미함, 그리고 소시지의 짭조름한 맛이 동시에 터집니다. 후식으로는 묵은 빵과 우유, 견과류, 건포도로 만든 시골풍 디저트, 토르타 디 파네(Torta di pane)를 가라파 한 잔과 함께 즐기면 좋습니다.
예약이 어렵다면 구시가지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리스토란테 치타델라(Ristorante Cittadella)도 좋은 대안입니다. 고풍스럽고 아늑하면서도 로맨틱한 분위기가 감도는 레스토랑이죠. 매장 한 쪽에 마련된 오픈 그릴에서 즉석으로 구워내는 신선한 생선 요리와 해산물 요리로 현지에서 유명합니다.
14:30 P.M. 절벽 위의 성당, 마돈나 델 사소
식사를 마치고 구시가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의 푸니쿨라(funicular) 정류장으로 향합니다. 이곳의 푸니쿨라는 1906년에 개통되어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순례자들과 여행객들을 싣고 산 위를 오르내렸습니다. 5분이면 해발 440m의 오르셀리나(Orselina) 역에 도착합니다.
내린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절벽에 매달린 듯한 노란 성당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돈나 델 사소 성당(Santuario della Madonna del Sasso) 입니다. 성당 안의 화려한 프레스코화가 인상적이며, 발아래로 펼쳐지는 붉은 지붕들과 그 너머 옥빛으로 반짝이는 마조레 호수도 그림 같습니다.

성당의 자취는 15세기부터 찾을 수 있습니다. 1480년 어느 날, 프란체스코회의 한 수도사가 이 절벽에서 성모 발현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1485년, 그는 그 자리에 작은 예배당을 세웁니다. 이후 수세기에 걸쳐 예배당은 성당이 되고, 그 옆에 박물관이 생기고, 산길을 따라 14개의 작은 예배당이 줄지어 들어섰습니다.
이 당시 로카르노는 스위스 동맹군과 밀라노 군대의 대립으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마돈나 델 사소’는 전쟁의 공포에 떨던 일반 시민들이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습니다. 아무리 자비 없는 군대라 할지라도 신성한 성역에 침범하여 신의 저주를 받는 것은 두려워했기 때문에 도피처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종교적 금기라는 방패가 이 성당을 수백 년간 지켜온 셈입니다.
16:00 P.M. 로카르노의 지붕, 카르다다-치메타 정상
성당을 나와 바로 옆 정류소에서 카르다다(Cardada, 해발 1,340m)까지 케이블카로 올라가고, 거기서 다시 체어 리프트를 갈아타면 치메타(Cimetta, 해발 1,670m) 정상에 닿습니다.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풍경에서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마조레 호수가 길게 누워 있고, 눈 높이를 살짝만 높이면 사방으로 알프스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날이 맑은 날에는 멀리 몬테로사(Monte Rosa)와 마터호른(Matterhorn)의 실루엣까지 시야에 들어옵니다.
정상 전망대 주변에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짧고 평탄한 트레킹 코스가 있어서 가볍게 걸으며 로카르노의 웅장한 자연을 온 몸으로 느끼기 좋습니다. 다만 내려가는 막차 시간이 이른 편이니, 시간을 확인하며 풍경을 눈에 담는 걸음걸이를 조절하는 것이 좋습니다.
18:30 P.M. 마조레 호숫가에서의 저녁
산을 내려와 저녁을 먹으러 마조레 호수(Lago Maggiore)로 향합니다. 마조레는 이탈리아어로 ‘더 큰’이라는 뜻입니다. 인근의 오르타 호수, 베레세 호수보다 크다는 단순한 이유로 이름이 붙었습니다. 길이는 약 65㎞로 이탚ㄹ리아에서 가장 긴 호수이자 두 번째로 큰 호수입니다. 약 20%는 스위스의 영토에 속해 있고, 그 끝자락에 로카르노가 있습니다.

마지막 빙하기에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알프스 자락을 깎아 내려가며 길고 깊은 골을 남겼고, 그 자리에 물이 고여 호수가 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 호수를 ‘베르바누스(Verbanus)’라고 불렀습니다. 15세기부터는 밀라노의 보로메오(Borromeo) 가문이 호수와 그 안의 섬들을 소유했으며, 지금도 가문의 후손이 섬의 일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 년 동안 이름은 바뀌어도 호수는 처음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 호수를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될 만큼 마조레 호수는 마음의 평화를 줍니다.

호숫가 산책로(Lungolago)를 따라 작은 식당과 카페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를 원한다면 블루 레스토랑 앤 라운지(BLU Restaurant & Lounge)가 좋습니다. 큰 통창 너머로 호수가 펼쳐지고, 일몰 시간대에는 수면이 통째로 식당 안으로 들어옵니다. 밀라노 미슐랭 스타 셰프의 자문을 받았던 세련된 지중해식 메뉴와 스시 바를 선보이는 레스토랑으로, 신선한 생선 요리와 제철 채소를 살린 파스타가 시그니처입니다. 한쪽에는 별도의 스시 & 사시미 바도 갖추고 있습니다.
조금 더 캐주얼한 분위기를 원한다면 리스토란테 바 룽골라고(Ristorante Bar Lungolago)도 좋습니다. 테라스가 넓고, 피자와 파스타의 가격대로 합리적입니다. 호수의 전통 민물고기 요리를 맛보고 싶다면 선착장 근처의 리스토란테 데바카데로(Ristorante Debarcadero)가 좋은 선택지입니다. 그릴에 구운 페르카(perch, 농어)나 허브와 함께 팬에 구운 송어, 그리고 사이드로 나오는 폴렌타(polenta)는 두 시간 동안 구리 솥에서 저어가며 끓여 만든 진짜배기 티치노의 맛입니다.
어느 곳을 골라도 좋습니다. 영화제 시작까지 시간 여유가 충분하니 와인 한 잔을 더 시킵니다.
21:30 P.M. 황금 표범이 깨어나는 밤, 로카르노 영화제
로카르노의 하루는 다시 그란데 광장으로 돌아와 끝납니다. 로카르노 영화제(Locarno Film Festival)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해인 1946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칸, 베니스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 중 하나죠. 올해 79회를 맞으며, 8월 5일부터 8월 15일까지 행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관광객을 끌어모으기 위해 기획되었지만, 8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은 세계적인 영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황금 표범상 수상작 목록을 보면 거장으로 불리는 감독들의 작품성 뛰어난 영화가 많습니다.

‘로카르노 영화제’하면 연상되는 것이 바로 황금 표범이죠. 처음부터 표범은 아니었습니다. 초기 트로피는 ‘금의 돛(Vela d’Oro)’이었고, 1968년에 지금의 황금 표범(Pardo d’Oro)으로 바뀌었습니다. 왜 표범인지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노란 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 황금 표범들이 광장을 둘러싼 건물 외벽 곳곳에도 그려져 있습니다.
가지런히 정렬된 수천 개의 의자들이 사람들로 채워지고, 9시 30분 무렵이 되면 조명이 꺼집니다. 그리고 가로 26m, 세로 14m의 유럽 최대 야외 스크린 위로 황금 표범 로고가 미끄러지듯 지나갑니다. 야외 상영은 로카르노 영화제의 시그니처로 10일 동안 매일 밤, 다른 영화가 상영됩니다.
그란데 광장의 야외 상영은 시즌 패스를 구매하거나 별도 티켓을 구매해 관람할 수 있습니다. 인기작은 일찍 매진되니 예매가 필수입니다. 또한 영화제 기간의 시내 호텔은 1년 전부터 마감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근 도시인 아스코나(Ascona)나 무랄토(Muralto)도 좋은 대안이 됩니다.

밤하늘 가득 쏟아지는 별빛 아래,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수 천 명이 넘는 관객들과 한 곳에 앉아 거대한 스크린을 바라보는 일. 로카르노가 아니라면 마주하지 못할 특별한 순간입니다. 이토록 낭만적인 풍경 속에서 로카르노의 하루가 저물어갑니다. 오래도록 기억을 맴돌, 다시 없을 순간이 벌써부터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