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의 인파가 빠져나간 로마는 여행하기 가장 좋은 때입니다. 평소라면 한두 시간을 서서 기다려야만 들어갈 수 있는 박물관에서 조금은 여유있게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올려다볼 수 있고, 트레비 분수 앞에서도 어깨를 부딪히지 않고 긴 소원을 말할 수 있으니까요. 기온은 10도에서 17도. 숨 막히는 여름의 더위도, 뼈를 에는 겨울의 추위도 없이 걷는 것조차 완벽한 날씨입니다.
다만 올해는 가톨릭교회의 25년 주기로 돌아오는 ‘희년’입니다. 로마 4대 대성당의 성문을 통과하며 ‘잠벌을 한번에 면제받는’ 전대사를 받을 수 있어, 가톨릭신자들에게는 더없이 특별한 해입니다. 그래서 올해에 인파가 많이 몰리고 있지만 이 외에도 로마에 가야할 이유는 많습니다.
전통의 로마 재즈 페스티벌과 연극과 무용, 디지털 아트가 뒤섞인 로마유로파 페스티벌, 재능 넘치는 젊은 감독들을 만날 수 있는 로마 독립영화제. 축제들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랍니다. 그리고 프랑스에 보졸레 누보가 있다면, 이탈리아에는 비노 노벨로가 있습니다. 갓 짜낸 노벨로 올리브 오일과 갓 빚은 비노 노벨로 와인을 마시는 일은 이 계절에 허락되는 작은 기쁨입니다.
영화 <로마의 휴일>처럼 짧지만 오래 기억에 남을 로마의 하루를 안내합니다.
08:00 A.M. 바티칸 시국

로마 시내에서 도보로 약 20분 거리에 있는 바티칸으로 여행을 시작합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장엄한 돔을 감상하고,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까지 들어가서 미켈란젤로 천장화도 볼 수 있습니다.

화제가 되고 있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동상도 찾아보세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외벽에 자리하고 있으며, 2021년 9월 김대선 신부 순교 177주년을 기념해 세워졌습니다. 동양인 성상으로는 최초입니다. 높이 3.77m의 전신상은 갓과 도포를 입고 두 팔을 벌린 채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유명한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를 연상케 한다는 이야기가 퍼지며 바티칸 최고의 인기 스팟이자 글로벌 인증샷 명소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운이 좋다면 교황의 미사를 직접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매주 수요일 열리는 일반 알현이나 특별한 날의 미사에 참여해 교황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겁니다.
10:00 A.M. 로마유로파 페스티벌
바티칸의 장엄한 아침을 뒤로하면 또 다른 로마가 기다립니다. 바로 현대 예술의 최전선, 로마유로파 페스티벌(Romaeuropa Festival) 입니다. 1980년 시작되었으며 이제는 세계적인 현대 예술 행사가 되었죠. 올해는 45주년을 맞아 의미가 한층 더 깊습니다. 9월 4일부터 시작된 페스티벌은 11월 16일 화려하게 피날레를 장식할 예정입니다.

페스티벌은 로마 전역에 흩어진 극장과 문화 센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집니다. 아우디토리움 파르코 델라 무지카 엔니오 모리코네(Auditorium Parco della Musica Ennio Morricone), 로마 오페라 극장(Teatro dell’Opera di Roma), 국립 현대미술관 MAXXI(Museon nazionale delle arti del XXI secolo), 마타토이오(Mattatoio), 빌라 메디치(Villa Medici) 등등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축제 무대가 됩니다.
올해는 스페인 국립 발레단(Compañía Nacional de Danza de España),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 안무가 아크람 칸(Akram Khan), 작가 알레산드로 바리코(Alessandro Baricco)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대거 참여합니다. 또한 시네 콘서트(Ciné-concert), 신진 예술가들의 실험 무대, 가족 단위 관객을 위한 프로그램까지 마련되어 있어 세대와 취향을 가리지 않는 다양한 공연들이 로마의 가을을 채웁니다.
로마유로파 페스티벌 공식 웹사이트: romaeuropa.net
12:00 P.M. 노벨로 오일과 비노 노벨로 와인을 맛보다
여행에서 먹는 것은 보는 것만큼이나 중요합니다. 11월 초에 수확한 포도로 빠르게 만든 와인인 ‘비노 노벨로(Vino Novello)’와 노벨로 오일(Olio Novello) 중 10월 말~11월 초의 올리브로 짜낸 한정판 오일을 맛볼 수 있는 경험은 특별한 즐거움이 됩니다.
마음에 드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갓 구운 빵 위에 신선한 노벨로 오일을 올리고, 메뉴에서 노벨로 오일을 듬뿍 두른 수제 파스타를 찾아보는 것도 좋습니다.

좀 더 가볍게 즐기고 싶다면 주변의 작은 트라토리아(Trattoria)도 좋은 선택입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풍경을 배경으로 브루스케타(Bruschetta)와 하우스 와인(Vino della Casa)으로 간단한 점심을 즐기다 보면, 로마의 현지 일상을 함께 나누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13:30 P.M. 로마 독립영화제
점심을 마친 뒤에는 로마 독립영화제가 열리는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2001년 시작된 이탈리아 최초의 국제 독립영화제로, 매년 약 100편 안팎의 작품을 선보이는 아담한 규모지만 그 안에 담긴 에너지만큼은 작지 않습니다.

주류 영화제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실험적이고 날것 그대로의 작품들이 상영되는데, 바로 그것이 이 영화제가 가진 가장 큰 매력입니다. 올해는 11월 21일부터 28일까지 열리며, 세계 각국의 신진 감독들이 다큐멘터리, 단편, 애니메이션, 실험 영화 등 다채로운 장르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올해는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탐구하는 AI 섹션 ‘(r)evolution AI’가 새롭게 신설됩니다. AI 기술을 활용한 영화 및 비디오 제작 부문으로, RIFF가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영화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함께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제는 로마 시내의 소규모 극장에서 나뉘어 개최됩니다. 테르미니역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자리한 사보이 시네마(Cinema Savoy)는 1930년대부터 이어져 온 역사 깊은 극장입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클래식한 외관과 아담한 상영관이 마치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또 다른 주요 상영관인 누오보 시네마 아퀼라(Nuovo Cinema Aquila)는 피냐토(Pigneto) 지역 라퀼라(Via L’Aquila)에 위치해 있으며, 시내에서 대중교통으로 약 15분 거리입니다. 기존 상영관을 리노베이션해 아트하우스로 재탄생시킨 이곳은 로컬 예술가들과 젊은 창작자들의 아지트 같은 공간으로, 감각적인 기운이 느껴집니다.
두 극장 모두 좌석 수는 많지 않지만, 그 덕분에 관객과 작품 사이의 거리가 한층 더 가까워집니다. 상영이 끝나면 종종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이어져서 작품의 창작 의도와 제작 뒷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것도 이 영화제만의 특별한 순간입니다.
로마 독립영화제 공식 웹사이트: riff.it
16:30 P.M. 골목골목 구경하며 젤라또 먹기
햇살이 부드러워지는 오후. 로마의 매력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는 방법은 젤라또(Gelato) 한 스쿱을 손에 들고 골목길을 거니는 것입니다. 젤라또의 기원은 르네상스 시대, 건축가 베르나르도 부온탈렌티(Bernardo Buontalenti)가 메디치 가문(Casa Medici)의 요청을 받아 우유, 꿀, 달걀, 시트러스 향을 더해 만든 디저트에서 비롯됩니다. 이후 시칠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코 프로코피오 데이 콜텔리(Francesco Procopio dei Coltelli)가 파리에서 카페 프로코프(Café Procope)를 열며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오늘날 젤라또는 이탈리아 미식 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로 향할 곳은 몬티(Monti) 지구입니다. 콜로세움(Colosseo)과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 사이에 자리한 이곳은 빈티지 숍과 디자이너 아틀리에가 모여 있는 로마의 보헤미안 거리로, 좁은 골목마다 작은 가게들이 숨어 있어 보물찾기 같은 즐거움을 줍니다. 현지에서는 크림빵 마리토초(Maritozzo)로 유명한 파스티체리아 몬티(Pasticceria Monti), 그리고 개성있는 독립 서점 알트로콴도(Altroquando)가 특히 사랑받는 공간이니 들러볼 만합니다.
이어지는 발걸음은 캄포 데 피오리(Campo de’ Fiori) 뒷골목입니다. 낮에는 활기찬 시장으로 유명하지만, 해가 기울면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냅니다. 작은 공방과 갤러리들이 하나둘 불을 밝히고,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트라토리아(Trattoria)와 바(Bar)가 문을 열며 로마의 저녁 풍경에 낭만을 더해줍니다.
18:30 P.M. 미식 도시 로마의 저녁 만찬
여행 예산이 조금 초과되더라도 로마의 저녁만큼은 제대로 즐길 가치가 있습니다. 올해만 미슐랭 가이드(Michelin Guide)에 무려 18개의 레스토랑이 이름을 올린 2,000년 역사의 미식 도시니까요. 무엇보다 재료 본연의 맛을 최대로 끌어낸 요리들로 유명한 로마입니다. 스파게티 알라 카르보나라(Spaghetti alla Carbonara), 카치오 에 페페(Cacio e Pepe), 아마트리치아나(Amtriciana) 같은 세계적인 파스타가 모두 로마에서 탄생했으며, 라치오(Lazio) 지역의 신선한 채소, 올리브 오일(Olio d’Oliva), 페코리노 로마노 치즈(Pecorino Romano) 같은 최상급 재료들을 사용해 요리하기 때문에 맛은 보장됩니다.
그렇다고 미식의 진수를 꼭 고급 레스토랑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지에서 ‘힙하다’는 평을 듣는 곳 중 하나가 트라스테베레(Trastevere)의 트라토리아 다 에노 알 벤티노베(Trattoria Da Enzo al 29)입니다. 소박한 공간이지만 시그니처 메뉴인 카르보나라와 카르초키 알라 주디아(Carciofi alla Giudia, 유대식 아티초크 튀김)는 현지 미식가들에게조차 ‘로마 최고의 맛’으로 꼽힙니다.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재료의 신선함만을 고집하는 태도 덕분에 미슐랭 가이드에 꾸준히 소개되고 있으며, 해외 유명 배우나 스포츠 스타들이 단골로 찾는 맛집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테스타치오(Testaccio) 지구의 플라비오 알 벨라베보데토(Flavio al Velavevodetto)는 고대 로마 시대 도기 파편이 쌓여 형성된 몬테 디 코치(Monte dei Cocci) 기슭에 자리해, 역사 유적지를 배경으로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공간입니다. 시그니처 메뉴는 카치오 에 페페와 아마트리치아나. 전통 파스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솜씨가 탁월해 현지 젊은 층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마 미식의 정점은 프라티(Prati) 지구의 라 페르골라(La Pergola)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로마 유일의 미슐랭 3스타(Michelin 3-Star) 레스토랑으로, 세계적인 셰프 하인즈 벡(Heinz Beck)이 이끄는 곳입니다. 거의 ‘예술 작품 같은 만찬’을 내놓는 곳으로 명성이 자자합니다. 시그니처 메뉴인 푸아그라 카펠레티(Foie Gras Cappelletti)와 허브 인퓨전 송어(Trout with Herb Infusion)가 유명하며, 수많은 셀러브리티가 찾는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20:00 P.M. 로마 재즈 페스티벌
1976년 첫선을 보인 로마 재즈 페스티벌은 반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음악 축제입니다. 처음에는 여름 축제로 시작했지만 일정이 옮겨지면서 가을과 초겨울의 로마 밤을 책임지는 대표적인 문화 행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동안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칙 코리아(Chick Corea), 파로아 샌더스(Pharoah Sanders) 등 재즈의 거장들이 무대를 거쳐갔고, 전통 재즈부터 실험적인 퓨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올해는 11월 1일부터 23일까지 약 20여 개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신예 뮤지션들과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함께 무대에 오르며, 올해 라인업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합니다. 현대 재즈의 혁신가 마카야 맥크래이븐(Makaya McCraven), 색소폰 거장 데이비드 머레이 쿼텟(David Murray Quartet), 네오소울 싱어 빌랄(Bilal), 그리고 전설적인 드러머 피터 어스킨(Peter Erskine)까지.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뮤지션들이 재즈의 전통과 실험, 세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협연 무대로 로마의 밤을 뜨겁게 물들입니다.

헤드라인 공연을 비롯한 주요 무대는 아우디토리움 파르코 델라 무지카 엔니오 모리코네에서 펼쳐집니다. 로마 북부 플라미니오(Flaminio) 지구에 자리한 이 세계적인 콘서트홀 단지는 2002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가 렌초 피아노(Renzo Piano)가 설계한 공간입니다. 세 개의 대형 홀과 야외 아레나로 구성된 복합 공연장으로, 탁월한 음향 시설을 자랑해 세계 각국의 음악 축제와 오케스트라 무대가 주로 이곳에서 열립니다.
로마 재즈 페스티벌을 온전히 즐기려면, 대형 무대에서 펼쳐지는 헤드라이너 공연뿐 아니라 카사 델 재즈(Casa del Jazz)나 몽크(Monk) 같은 소규모 클럽에서의 즉흥 연주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 재즈 페스티벌 공식 웹사이트: romajazzfestival.it
22:00 P.M. 트라스테베레, 낭만의 골목
로마 하루의 끝은 와인잔을 기울이는 순간에 완성됩니다. 테베레 강(Fiume Tevere)을 건너 도착한 트라스테베레(Trastevere)는 로마의 밤을 가장 로마답게 보여주는 동네입니다. 담쟁이덩굴이 드리운 골목마다 작은 와인바가 불을 밝히고, 좁은 길에 놓인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와인을 나눕니다. 특히 비콜로 델 친퀘(Vicolo del Cinque)와 스칼라 거리(Via della Scala) 일대는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와인 골목입니다.

와인바 중에서도 아치형 천장이 인상적인 에노테카 페라라(Enoteca Ferrara)는 1,600여 종의 와인을 보유한 로마의 전설적인 와인 셀러로, 현지 미식가들이 강력 추천하는 곳입니다. 조금 더 자유롭고 캐주얼한 분위기를 원한다면 프레니 에 프리치오니(Freni e Frizioni)도 좋습니다. 과거 정비소를 개조한 이곳은 힙한 인테리어와 창의적인 칵테일로 유명하며, 저녁 시간대에는 젊은 로마인들로 늘 북적이는 핫플입니다. 이 밖에도 와인과 작은 플레이트 메뉴를 곁들여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오스테리아 다 지 움베르토(Osteria da Zi Umberto)가 있습니다.
골목마다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 속에서 로마의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로마의 밤을 가장 로마답게 완성하는 방법 중 하나죠. 여행의 마지막을 따뜻하게 편안하게 마무리하며 다음을 기약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