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의미합니다. 반짝이는 찬란함으로 기억되는 홍콩. 사람들은 홍콩이 과거의 영광을 잃고, 오래된 간판과 낡은 기억만 남은 화양연화 같은 도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홍콩은 여전히 홍콩입니다.
격동의 시간을 지나며 상처는 입었을지 몰라도, 그만큼 깊어졌고 단단해졌습니다. 지금의 홍콩은 딤섬과 빅토리아 피크로만 기억되던 시절을 지나 낡은 골목 뒤편에서 새로운 예술이 움트고, 재개발로 재단장한 동네들에서 새로운 생기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새로운 홍콩의 맥박을 느낄 수 있는 서구룡 문화지구부터 케네디 타운의 해안가 핫플까지 둘러보는 일정을 소개합니다. 구룡에서 센트럴, 그리고 홍콩 서쪽까지 이어지는 동선이기 때문에 옥토퍼스 카드만 있으면 MTR과 트램으로 편리하게 둘러볼 수 있습니다.
단단해진도시, 세련됨을 잃지 않고 빛나고 있는 홍콩. 지금부터 새로운 홍콩을 만나보실까요?
08:00 A.M. ~ 10:00 A.M. ㅣ 서구룡 문화지구
이번 여행의 시작은 2025년 현재 홍콩 최고의 핫플인 서구룡 문화지구(West Kowloon Cultural District)에서 출발합니다. 세계 최대 규모 문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홍콩 빅토리아 하버를 따라 매립지에 조성된 문화 구역입니다. 현지 예술가들의 크리에이티브 허브로 자리 잡았죠. MTR 오스틴역(Austin Station)이나 까우룽역(Kowloon Station)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무료 셔틀버스도 운영되고 있어서 이동이 편리합니다.

서구룡 문화지구 프로젝트는 2000년대 초, 세계적인 건축사무소 포스터 앤 파트너스(Foster + Partners)가 마스터 플랜을 설계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M+ 뮤지엄을 비롯해 홍콩 팰리스 뮤지엄(2022년 개관), 시취 센터(Xiqu Centre, 중국 전통 오페라 공연장), 프리스페이스(Freespace, 현대 공연 공간) 같은 시설들이 문을 열었고, 앞으로 더 많은 극장과 공연장이 완성될 예정입니다.
2021년 11월 12일 오픈한 M+ 뮤지엄은 아시아 최초의 글로벌 현대 시각 문화 뮤지엄입니다. 20세기와 21세기의 시각 예술, 디자인, 건축, 그리고 영상 작업을 아우르는 컬렉션을 자랑합니다. 홍콩의 시각 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와 함께 아시아와 전 세계의 현대 문화를 탐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죠. 홍콩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작품들, 이를 테면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홍콩 시각 문화나 중국 현대 미술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시그 컬렉션(Sigg Collection)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건물 자체도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스위스 건축가 헤르초크 &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이 TFP 패럴스(TFP Farrells)와 협업해 설계한 역 T자 형태의 구조로, 빅토리아 하버를 마주보고 있습니다. 33개의 갤러리와 3개의 영화관, 미디어테크, 학습 허브, 루프 가든 등이 들어서 있으며, 하버를 향하고 있는 타워 외관에는 LED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어 밤이면 디지털 전시물이나 영상 작품으로 도시 스카이라인에 독특한 빛을 더합니다.
참고로 국내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으로 알려진 모수의 홍콩 분점도 M+ 뮤지엄 3층에 있답니다. 입장료는 일반 전시 기준 HKD 120 이지만, 무료로 즐길 수 있는 공간도 많습니다.
10:30 A.M. ~ 12:00 P.M. ㅣ 타이 쿤
홍콩 센트럴에 위치한 타이 쿤(Tai Kwun)은 과거와 현재, 역사와 예술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원래는 식민지 시대 1841년부터 1925년 사이 지어진 중앙 경찰서, 중앙 치안판사 재판소, 빅토리아 감옥이 들어서 있던 중앙 경찰서 복합 단지(Former Central Police Station Compound)였습니다. 100년 넘게 확장과 재건을 거듭하며 홍콩의 격동기를 함께 해오다가 세계적인 예술과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대대적인 재개발 프로젝트를 거쳐 2018년 재개관했습니다.

타이 쿤은 총 16개의 역사적인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에 현대적인 감성이 더해진 JC 컨템포러리(JC Contemporary)와 JC 큐브(JC Cube)가 추가로 세워졌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연결을 상징하는 이 건물들은 스위스 건축가 헤르초크 & 드 뫼롱이 설계했는데, 오래된 화강암 벽에서 영감을 받은 알루미늄 외관이 특징입니다. JC 컨템포러리는 현대 미술 전시를 위한 공간입니다. 매년 5~8개의 전시를 선보이며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비영리 아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죠. 반면 JC 큐브는 공연과 야외 활동을 위한 다목적 공간으로, 감옥 건물 사이에 자리잡아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옛 중앙 경찰서 건물, 배럭 블록(Barrack Block), 프리즌 야드(Prison Yard) 등 건물들을 이동하다보면 과거 빅토리아 감옥의 좁은 감방과 홍콩의 법 집행 역사인 유산 전시(Heritage Exhibitions)를 볼 수 있습니다. 타이 쿤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45분 길이의 가이드 투어도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 일정에 따라 선택하면 좋습니다.
야외에는 퍼레이드 그라운드(Parade Ground)가 조성되어 있어 대규모 이벤트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위치는 할리우드 로드(Hollywood Road), 올드 베일리 스트리트(Old Bailey Street) 등 센트럴의 핵심 거리와 맞닿아 있어 MTR 센트럴 역이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로 쉽게 갈 수 있습니다.
12:30 P.M. ~ 14:30 P.M. ㅣ PMQ
타이 쿤의 할리우드 로드를 벗어나 애버딘 스트리트(Aberdeen Street)로 접어들면, 왼쪽에 낡은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홍콩의 숨겨진 보석, PMQ(Police Married Quarters)입니다. 과거 경찰 숙소였던 투박한 건물 외관 안에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상상력이 숨 쉬고 있습니다. 관광객이 많은 란콰이퐁이나 소호와는 달리, 현지 크리에이터들의 예술 감성이 보다 진하게 느껴집니다.
이 자리에는 홍콩 최초의 공립학교인 중앙학교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학교 건물이 철거된 후 경찰 사택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고, 경찰 사택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건물이 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흔적이 남은 이곳이 대규모 리모델링을 거쳐 2014년에 크리에이티브 산업을 뒷받침하는 홍콩 디자인 허브로 재탄생했습니다. 이름도 기존 그대로 PMQ를 유지하면서도, 이제는 ‘Police Married Quarters’가 아니라 ‘Premier Makers Quarters’라는 새로운 의미를 담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PMQ는 두 개의 건물동과 그 사이를 잇는 야외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약 100여 개의 스튜디오와 매장이 입주해 있고, 현지 디자이너, 아티스트, 공예가들이 만든 의류, 액세서리, 세라믹, 가구 등도 판매하거나 전시합니다.
쇼룸에선 신진 디자이너들이 작품을 볼 수 있고, 팝업 키친도 종종 열립니다. 중앙 광장인 코트야드(Courtyard)는 공연, 마켓, 워크숍 같은 이벤트가 열려서 항상 북적이고, 건물 꼭대기엔 루프톱 공간도 있어 도시 전경을 즐기며 쉴 수 있죠. 맛있는 음식과 음료를 판매하는 레스토랑과 바도 있어서 낮에는 쇼핑과 전시를, 밤에는 칵테일과 분위기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5:00 P.M. ~ 17:00 P.M. ㅣ 사이 잉 푼
홍콩 섬 서쪽, 사이 완(Sai Wan) 지역에 자리 잡은 사이 잉 푼은 중서구(Central and Western District)에 속한 동네입니다. 홍콩의 브루클린, 홍콩의 홍대라고 일컬어지며 대학생들과 젊은 아티스트들이 빈티지 쇼핑과 스케치를 즐기는 동네죠. 이름은 광둥어로 ‘서쪽 캠프’를 뜻하는데, 1840년대 영국군이 여기에 정착해 군사 기지를 세운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사이(西)’는 ‘서쪽’, ‘잉푼(營盤)’은 ‘군영’을 의미합니다.
사이 잉 푼은 쥬라기 후기에 형성된 화강암 위에 세워졌는데, 과거엔 바다였던 곳입니다. 19세기 중국 이민자들이 타이 핑 샨 서쪽으로 이주해 정착하기 시작했고, 유럽인들은 하이 스트리트(High Street) 위쪽에 거주하며 한때 중국인 거주가 제한되기도 했었습니다. 2015년 3월 MTR 아일랜드 라인(Island Line)에 사이 잉 푼역이 개통되면서 이곳은 큰 변화를 맞았습니다. 원래 조용했던 곳이었지만, 역 개통과 함께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며 트렌디한 카페, 바, 레스토랑이 속속 들어섰습니다.

사이 잉 푼은 옛 홍콩의 향수와 새로움이 뒤섞인 곳입니다. 투박하지만 예술적이며 개성이 넘치죠. 센트럴의 화려함이나 코즈웨이 베이의 쇼핑 센터 대신 젊은 크리에이터와 외국인, 현지인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어 좀 더 느긋한 현지만의 감성이 느껴집니다.
하이 스트리트의 스트리트 아트, 특히 아트 레인(Art Lane)은 현지와 해외아티스트들의 화려한 벽화로 유명해 인스타 감성 사진 명소로 떠올랐습니다. 전통적인 건어물 시장과 낡은 퉁 라우(Tong Lau, 전통 저층 건물) 옆으로 세련된 공간들이 공존하며 매력을 뿜어냅니다.
아트 레인은 MTR 사이 잉 푼역 B3 출구 근처, 충 칭 스트리트(Chung Ching Street)와 키 링 레인(Ki Ling Lane) 주변으로 아티스트들이 오래된 건물 벽을 캔버스 삼아 그린 벽화가 가득합니다. 브루스 리 초상화부터 기하학적 벌, 유머러스한 병아리까지 다채롭죠.
이 밖에 사이 잉 푼에는 윈스턴 커피(Winstons Coffee)와 같이 홍콩 커피 허브로 손꼽히는 카페도 많고 전통 찰솥밥으로 유명한 콴 키 클레이팟 라이스(Kwan Kee Claypot Rice)와 모던 이탈리아 레스토랑 루 케일(LucAle)과 같은 맛집들도 꽤 모여있습니다.
17:30 P.M. ~ 20:00 P.M. ㅣ 케네디 타운
여행 일정의 마지막은 홍콩 섬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케네디 타운(Kennedy Town)입니다. 동쪽으로는 사이 잉 푼, 남쪽으로는 폭푸람 로드(Pokfulam Road)와 마운트 데이비스(Mount Davis)가, 북쪽으로는 하버가 경계를 이룹니다. 바다 내음과 에스프레소 향이 뒤섞인 케네디 타운은 도시가 아닌 바다와 맞닿아 있습니다. 빅토리아 하버를 따라 펼쳐진 매립지와 언덕이 뒤섞인 지형을 가지고 있어서 홍콩의 ‘웨스트 엔드(West End)’라고도 불리기도 합니다.
케네디 타운의 시작은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국 식민지 시절, 주로 조선소와 창고가 많은 산업 지역이었고, 어부와 노동자들이 모여 살던 소박한 동네였습니다. 캐칙 스트리트(Catchick Street)나 데이비스 스트리트(Davis Street) 같은 이름에서도 초기 유럽 정착민들의 흔적이 보입니다.
1880년대부터 매립이 시작되고 지역이 확장되면서 20세기 중반엔 홍콩 전염병 관리를 위한 지역으로 활용되기도 했지만, 꽤 오랫동안 케네디 타운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홍콩의 끝’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그러다 2014년, MTR 아일랜드 라인(Island Line)이 연장되고 케네디 타운역이 개통되면서 젊은 층과 외국인 주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낡은 공장, 창고들은 세련된 레스토랑과 바로 바뀌었고, 해안가는 새로운 홍콩의 핫플로 떠올랐죠.
SNS 감성 사진 명소로 유명한 인스타그램 피어(Instagram Pier)는 해안가의 낡은 부두입니다. 정식 명칭은 서부 화물 컨테이너 부두(Western District Public Cargo Working Area)인데, 석양과 하버 뷰를 담기 위해 전 세계 사진 작가들과 관광객이 많이 찾다보니 인스타그램 피어라는 별칭이 붙었습니다. 2023년 폐쇄한다는 루머가 있었지만, 여전히 현지인과 여행자들이 찾는 곳으로 남아 있습니다.
벨처 베이 프롬나드(Belcher Bay Promenade)는 케네디 타운의 해안가를 따라 펼쳐진 산책로입니다. 매립과 재개발을 통해 공공 공간으로 조성되었는데 잔디밭과 벤치, 조깅 트랙이 마련돼 있어 현지인들이 아침 운동이나 저녁 산책을 즐기러 옵니다. 특히 석양이 물에 반사될 때는 숨을 멈추게 할 만큼 아름답습니다. 반려견과 산책하는 사람들, 아이들과 노는 가족들도 쉽게 볼 수 있어 동네 특유의 느긋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사이 완 수영장(Sai Wan Swimming Shed)은 케네디 타운 서쪽에 있는 보석 같은 곳입니다. 공식 이름은 빅토리아 로드 수영장(Victoria Road Swimming Shed)인데, 현지인들은 그냥 사이 완 수영장이라 부릅니다. 원래는 지역 주민들이 수영하거나 낚시를 즐기던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SNS 감성 사진 명소로 더 유명해졌습니다. 물 위로 이어진 다리와 하버 뷰가 어우러져 빈티지하면서도 낭만적인 느낌을 주는데, 아침이나 해질녘이면 빛이 부드럽게 떨어져 사진 찍기에 좋습니다. 단, 수영장이지만 수영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 전통 야채 시장과 정육점 등 홍콩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스미스필드(Smithfield) 마켓도 둘러보면 좋습니다.
케네디 타운에는 맛집도 많습니다. 1970년대부터 이어져 온 홍콩 전통 딤섬을 맛볼 수 있는 선 힝 레스토랑(Sun Hing Restaurant)은 새벽 3시부터 문을 여는 맛집입니다. 진한 홍콩식 밀크티와 부드러운 찐빵, 저렴한 가격으로 현지인이 좋아하는 곳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낡은 타일과 선풍기가 돌아가는 내부는 옛 홍콩의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구경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갓 구운 바게트와 크루아상이 맛있는 프렌치 빵집 메종 카이저(Maison Kayser)와 캐주얼한 분위기에서 바삭한 피쉬 앤 칩스를 비롯한 홍콩 해산물 요리를 즐길 수 있는 피쉬 앤 칙(Fish & Chick)도 유명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