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강남구 정도의 아담한 도시, 암스테르담. 누군가는 이곳을 ‘자전거의 도시’라 부르고, 또 누군가는 ‘운하의 도시’, 혹은 ‘자유의 도시’라 말합니다. 하지만 이 짧은 수식어만으로는 암스테르담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보다 훨씬 더 깊고 복합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암스테르담을 찾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의외성’ 입니다. 이 도시는 예상보다 더 아름답고, 더 복잡하고, 더 철학적이죠.
낮에는 고요한 미술관과 아기자기한 시장, 평화로운 자전거 길이 펼쳐지지만, 밤이 되면 세계 최대의 EDM 도시답게 클럽에서 터져 나오는 에너지와 비트가 도시 전체를 흔듭니다. 렘브란트와 반 고흐의 고전 예술이 숨 쉬는가 하면, 날카롭고 실험적인 현대 미술 역시 동시에 살아 있습니다. 400년 된 운하 가옥 사이로 신식 건축물이 우뚝 솟아있고, 그 사이로 세계 각국의 퓨전 레스토랑들을 볼 수 있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전과 모순이야 말로 암스테르담의 진짜 힘입니다.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혁신, 차분함과 열정이 균형을 이루는 도시이기에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자전거 페달과 트램으로 이동하며 이 도시의 다채로운 얼굴을 기록해봅니다. 서울로 따지면 마포에서 성수, 한남, 이태원까지 한 바퀴 도는 느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빠르게, 그리고 느리게 흐르는 암스테르담의 24시간을 시작합니다.
08:00 A.M. ㅣ 자전거와 커피로 시작하는 아침
센트럴 역 근처에서 자전거를 대여한 뒤, 운하를 따라 15분쯤 페달을 밟으면 암스테르담 여행의 첫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2021년 오픈한 커피 아카데미(Koffie Academie)는 커피 애호가들의 성지라 불리는 곳으로 노출 콘크리트 벽과 미니멀한 인테리어가 눈을 사로잡는 카페입니다. 에티오피아 싱글 오리진 커피와 비건 크루아상을 주문하고 창밖의 운하를 배경삼아 오늘 하루 일정을 천천히 정리하기 좋은 시간입니다.
09:00 A.M. ㅣ “예술은 늘 진행형이다” 스테델릭 미술관
뮤지엄플레인(Museumplein)은 암스테르담의 대표 미술관들이 모여 있는 공공 문화 공간입니다. 라이크스뮤지엄, 반 고흐 뮤지엄 등 유서 깊은 미술관 사이에서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는 유독 눈에 띄는 하얀 건물 하나. 일명 ‘욕조’라 불리는 스테델릭 뮤지엄(Stedelijk Museum)입니다.

1895년에 설립된 스테델릭 뮤지엄은 현대 미술과 디자인의 보고입니다. 뮤지엄 광장의 보석 같은 존재로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현대 미술관이죠. 피카소, 몬드리안, 말레비치부터 현대 설치미술까지 20세기 이후 예술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줍니다.
2012년에 기존 고전적인 건축물에 대담한 흰색 곡선 디자인의 확장관이 추가되면서 욕조를 닮은 외관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넓고 밝은 전시 공간, 감각적인 뮤지엄숍, 여유로운 카페까지. 예술과 일상을 모두 품고 있는 공간입니다.
11:00 A.M. ㅣ 현대 예술의 신성지, 하마 갤러리
스테델릭 미술관을 나와 자전거로 10분 거리, 데 파이프(De Pijp) 지역에 있는 하마 갤러리(Hama Gallery)로 향합니다. 2021년 오픈한 이 갤러리는 쿠르드계 네덜란드인 니나 하마(Nina Hama)에 의해 설립된 갤러리로 ‘예술과 사람이 경계 없이 만나는 공간’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화이트 큐브 갤러리의 틀을 깨고, 실험적이고 접근 가능한 예술 경험을 추구하며 암스테르담 미술계에서 빠르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특히 NFT 아트, 인터랙티브 설치 작품 등 디지털 시대의 예술 흐름을 보여주는 젊은 아티스트들의 실험적인 작품들이 전시되며, 젊은 관객층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단순한 전시 공간을 넘어 워크숍, 이벤트, 그리고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통해 예술가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탐구할 수 있는 실험실 역할도 하고 있다고 합니다.
12:30 P.M. ㅣ NDSM, 그래피티와 컨테이너 사이
센터를 역에서 무료 페리에 자전거를 싣고 암스테르담 북쪽으로 강을 건너면 NDSM 워프(NDSM Wharf)에 도착합니다. 과거 조선소였던 NDSM 워프는 유럽에서 가장 실험적인 예술 창작 허브로 거듭났습니다.
녹슨 철판, 깨진 유리창, 컨테이너 건물들 사이로 거대한 그래피티와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컨테이너를 쌓아 만든 스튜디오, 중고 가구가 놓인 아티스트 라운지 등 정제되지 않았기에 더욱 진짜 같은 예술 에너지가 살아 있습니다. 기존 미술관보다도 더 거칠고 솔직한 공간이기에 암스테르담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날 수 있습니다.
13:00 P.M. ㅣ NDSM의 새로운 핫플에서 점심
2022년 오픈한 넥스트(NEXT)는 항구를 바라보며 칵테일과 퓨전 요리를 즐기기에 좋은 공간입니다. 코로나 이후 NDSM의 새로운 핫플이 된 곳이죠. 메스칼 옐로우 샤르트뢰즈로 만든 칵테일 ‘Doctor Earth’와 팬케이크가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입니다. 유리창 너머 페리 스케줄을 확인하며 여유롭게 식사한 뒤, NDSM의 그래피티 골목을 자전거로 가볍게 돌아보며 천천히 오후를 시작합니다.
좀 더 자연주의적 분위기를 원한다면, 재활용 컨테이너를 개조한 비건 레스토랑 플렉(PLLEK)도 좋은 선택입니다. 강을 앞에 두고, 예술적인 구조물과 철제 조형물이 배경처럼 놓여 있어서 왠지 오감이 모두 열리는 기분이 드는 곳입니다.
14:30 P.M. ㅣ 거리 예술이 모인 스트라트 뮤지엄
점심 후 NDSM 중심에 자리한 세계 최대의 스트리트 아트 박물관, 스트라트 박물관(STRAAT Museum)으로 갑니다. 2020년 문을 열었으며, 32개국 140여 명의 아티스트가 창작한 180점 이상의 대형 거리예술 작품들이 거대한 창고 공간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정치, 환경, 인권, 젠더 등의 사회적 주제를 솔직하고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공간입니다.

NDSM 워프의 창의적 DNA와 완벽히 맞물리는 스트라트 뮤지엄은 스트리트 아트의 본질인 자유, 저항을 유지하면서도, 깊이 있는 큐레이션을 제공하고 있어 연간 20만 명 이상이 방문할 정도로 인기가 높습니다.
뮤지엄 외벽은 암스테르담 최대 ‘그래피티 명예의 전당’으로, 공공 페인팅이 허용되는 자유로운 공간입니다. 예술가들은 거대한 벽돌 벽과 25m 높이의 천장을 캔버스 삼아 대부분의 작품들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작업했다고 합니다.
브라질 아티스트 에두아르도 코브라(Eduardo Kobra)의 안네 프랑크 벽화 ‘Let Me Be Myself’는 240㎡ 규모에 450개의 스프레이 캔과 35ℓ의 페인트를 사용해 제작되었습니다.
이 밖에 뉴욕의 그래피티 전설 데이즈드(DAZE), 콜롬비아의 글레오(Gleo), 네덜란드의 스니크(Snik) 등 세계적 아티스트들이 도시 환경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도 선보이고 있습니다.
16:00 P.M. ㅣ 요르단(Jordaan)의 새로운 핫플
NDSM의 거칠과 실험적인 분위기를 뒤로 하고, 시내로 돌아와 요르단으로 향합니다. 원래 요르단은 17세기 황금시대에 노동자와 가난한 아티스트들,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건너온 이민자를 위해 조성된 곳이었습니다. 20세기 초까지는 빈민가로 인식되었지만 1960년대부터 젊은 예술가와 히피들이 모여들고, 힙한 카페들과 부티크 숍들이 들어서며 중산층과 아티스트들이 공존하는 보헤미안 분위기로 변모했습니다. 현재는 렘브란트와 안네 프랑크 같은 역사적 인물들의 삶의 흔적도 남아있고, 현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최적의 동네가 되었습니다.
‘나인 스트리트(Nine Streets)’도 여전히 유명하지만, 최근에는 2022년 오픈한 더 메이커 스토어(The Maker Store)가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암스테르담의 로컬 디자이너들이 만든 지속 가능한 패션, 재활용 가방, 홈 데코 아이템, 세라믹 머그 등 개성있고 감각적인 제품들이 가득하죠.
쇼핑 후에는 당 충전을 위해 초콜릿 칩 쿠키로 유명한 반 스타펠레(Van Stapele)를 찾아 갑니다. 코로나 이후 테이크아웃 중심으로 재단장했습니다. 여전히 줄은 길지만 자전거를 세우고 기다릴 가치가 충분합니다. 쿠키를 손에 들고 본델파크(Vondelpark) 잔디 위에서 잠시 쉬어갑니다. 따뜻한 오후 햇살을 즐기면서 말이죠.
17:30 P.M. ㅣ 녹색 오아시스 ‘플란타지’
암스테르담의 번잡한 도심에서 동쪽으로 살짝 벗어나면, 고요한 매력으로 가득한 ‘플란타지(Plantage)’라는 동네가 나옵니다. 17세기 말, 도시 확장 계획의 일환으로 조성된 이곳은 당시 부유층이 별장을 짓고 정원을 가꾸던 부티크 지역이었습니다. 지금도 당시의 우아한 흔적과 클래식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넓은 가로수길, 붉은 벽돌 저택, 잔잔한 운하가 어우러져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자연적인 동네로 꼽히기도 합니다.

또한 플란타지에는 식물원과 박물관, 극장이 서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638년 설립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원인 호르투스 보타니쿠스(Hortus Botanicus)에는 유리온실과 약 6,000종 이상의 식물들이 숨 쉬고 있고, 1838년에 문을 연 유서 깊은 아르티스 왕립 동물원(ARTIS Royal Zoo)에는 플라네타리움과 수족관, 박물관도 있습니다.
플란타지의 매력은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동네 이름을 딴 드 플란타지 카페-레스토랑(Café-Restaurant De Plantage)은 19세기 온실을 개조한 공간으로, 2021년 세련된 리모델링을 거쳤습니다. 아르티스 동물원 메인 출입구 바로 옆에 위치해 있으며, 본델파크에서는 자전거로 약 15~20분이면 닿습니다. 이곳은 지중해식 요리가 메인입니다. 가지와 타히티 플래터, 해산물 파스타, 신선한 샐러드가 인기이고 비건과 글루텐 프리 옵션도 풍부합니다. 온실의 높은 유리 천장 아래, 초록 식물에 둘러싸여 특별한 저녁 식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19:30 P.M. ㅣ 운하의 밤, 자전거로 누비다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이 되면 암스테르담은 황금빛 햇살을 뒤로 하고, 서서히 은은한 검푸른빛으로 물들어갑니다. 운하 위로 잔잔히 퍼지는 조명과 물결의 반짝임이 어우러지는 순간, 야간 자전거 라이딩은 암스테르담의 또 다른 매력을 만날 수 있는 선택이 됩니다. 특히 ‘황제의 운하’라 불리는 카이저스흐라흐트(Keizersgracht)를 따라 페달을 밟는 시간은,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마법 같은 경험을 선사합니다. 17세기 암스테르담의 황금시대에 조성된 이 운하는 헤렌흐라흐트, 프린센흐라흐트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전조등을 켠 자전거가 고요히 달리는 밤, 고풍스러운 운하 주택이 창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따스한 불빛, 다리 위 가로등이 드리우는 부드러운 그림자가 하나의 풍경화처럼 펼쳐지는 야간 라이딩을 즐기며 암스테르담의 낭만을 느껴보세요!
21:30 P.M. ㅣ EDM의 수도, 암스테르담의 밤은 뜨겁다!
이제 ‘세계 EDM의 수도’로 불리는 암스테르담의 진짜 밤이 시작됩니다. 매년 10월 중순, 암스테르담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전자음악 페스티벌이자 컨퍼런스인 ADE(Amsterdam Dance Event)가 열립니다. 클럽뿐 아니라 공곤 미술관, 대학교 강의실, 카페 등 200개 이상의 장소에서 1,000개가 넘는 공연과 이벤트가 펼쳐지며, 도시 전체가 하나의 무대로 변신합니다. 1996년 소규모 컨퍼런스로 시작된 ADE는 5일 동안 약 50만 명의 방문객과 2,900명 이상의 아티스트가 참여하는 글로벌 음악 축제로 성장했습니다.

첫 번째로 향한 곳은 웨어하우스 엘리멘슈트라트(Warehouse Elementenstraat). 이곳은 암스테르담 테크노 씬의 중심지라 할 수 있습니다. 공장 창고를 개조한 공간은 거칠면서도 에너지 넘치는 분위기를 자랑하며, 현지 DJ들의 생생한 비트가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자전거는 클럽 앞 주차장에 안전하게 세워두고, 암스테르담의 음악을 즐길 시간입니다.
다음 행선지는 A’DAM 타워 지하에 위치한 언더그라운드 테크노 클럽, 쉘터 암스테르담(Shelter Amsterdam). ADE의 주요 무대 중 하나이기도 한 이곳은 미니멀한 인테리어 속에서 오롯이 음악에 몰입할 수 있는 곳입니다. 입장은 보통 밤 11시부터 가능하며, 이른 아침까지 이어지는 긴 밤 동안 전 세계 유명 DJ들이 무대를 뜨겁게 달굽니다.
04:30 A.M. ㅣ 새벽 운하와 일출
쉘터를 나서면 다시 고요가 찾아옵니다. 센트럴 역 방향으로 자전거를 달려 오스터독(Oosterdok) 근처를 지나, 네모 사이언스 뮤지엄(NEMO Science Museum) 옥상에 올라봅니다. 아직 어두운 하늘이 서서히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순간, 암스테르담의 아침이 열립니다. 새벽 5시경 도시 위로 떠오르는 일출은 낮에도 밤에도 다채로운 얼굴을 가진 이 도시의 또 다른 반전입니다.

08:30 A.M. ㅣ 아침식사, 그리고 여정의 끝
일출을 만끽한 후엔 자전거로 약 15분 거리의 베이커스 & 로스터스(Bakers & Roasters)로 향합니다. 뉴질랜드 스타일의 브런치를 선보이는 이곳은 암스테르담 브런치 명소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에그 베네딕트와 진한 플랫 화이트는 긴 하루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기에 최고의 메뉴입니다.
자전거를 반납하며 짧지만 감도 높은 24시간 여정을 마무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