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여행 트렌드로 주목받고 있는 책스케이프(Bookscape)를 소개합니다. 책(Book)과 탈출(Escape)이 결합된 일명 ‘책스케이프’가 전 세계 여행자들 사이에서 빠르게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화려한 랜드마크 대신 오래된 책방이나 도서관, 소설 속 배경들을 따라 도시를 깊이 있게 여행하고 영감을 얻는 새로운 여행 스타일입니다.
책스케이프는 왜 떠올랐을까?
숏폼과 도파민 중독에 지친 현대인들이 종이책이 주는 몰입감을 갈망하기 시작하면서 책을 읽고 사유하는 행위 자체를 힙하고 세련된 라이프스타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책을 통해 진정한 쉼과 사색을 하고, 겉핥기식 관광이 아닌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싶어하는 심리가 더해졌죠. 좋아하는 소설 속 주인공이 걸었던 거리를 직접 걸으며 남들과는 다른 경험을 원하는 사람들의 갈증도 책스케이프 열풍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책을 매개로 진정한 쉼과 사색을 할 수 있는, 책스케이프 떠나기 좋은 세계 4개 도시를 소개합니다.
런던 ㅣ 영국 문학의 심장, 헤리티지가 살아 숨 쉬는 도시
영국 런던은 셰익스피어부터 조앤 K. 롤링까지 영문학의 본고장답게 유서깊은 서점들과 도서관들이 도시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책스케이프하기 좋은 도시입니다.
베이커 스트리트 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던트 북스(Daunt Books) 메릴본 지점이 있습니다. 에드워드 시대의 우아함이 깃들어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중 하나로 꼽히는 곳입니다.


천장의 길게 뻗은 채광창으로 쏟아지는 자연광과 오크나무 갤러리가 어우러져 마치 20세기 초의 런던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이 듭니다. 유럽 고전 여행서를 비롯하여 수백 년 전의 낡은 지도책부터 최신 여행 에세이까지, 여행이라는 주제로 정성스럽게 큐레이션된 책들이 각 섹션을 채우고 있습니다.
저명한 여행 작가들이 이곳에서 영감을 받아 책을 집필했을 정도로 던트 북스는 런던의 문학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목재 향과 책장의 부드럽게 삐걱거리는 소리, 고풍스러운 조명 아래 반짝이는 서적들. 모든 것이 책스케이프에 완벽히 맞춰진 듯한 공간입니다.

세인트 판크라스(St. Pancras) 지역에 위치한 영국 국립도서관(The British Library)은 문명의 기억이 집대성된 세계 최대 규모의 도서관입니다. 1753년 설립 이래 약 1억 7천만 점 이상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거대한 지식의 보고입니다.
영국 국립도서관의 진정한 가치는 소장품의 깊이에 있습니다. 인류 민주주의의 상징인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부터 셜록 홈즈의 창조자 아서 코난 도일의 자필 원고, 비틀즈가 직접 쓴 악보까지. 인류사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눈 앞에서 마주하는 전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도서관 로비 중앙에는 거대한 유리 탑인 킹스 라이브러리 타워(King’s Library Tower)가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합니다. 이 타워에는 조지3세가 수집한 개인 장서가 6층 높이의 탑을 채우고 있습니다. 아들인 조지4세가 국가에 기증했으며, 약 65,000권의 장서와 19,000여 점의 소논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책들은 엄격한 보안 절차에 따라 연구자들이 열람하여 실제로 읽을 수 있답니다. 조지3세가 수집한 책 중에는 셰익스피어 초판본, 구텐베르크 성경 등 희귀본도 있습니다.
런던 책스케이프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은 런던에서 조금 떨어진 헤이온와이(Hay-on-Wye)입니다. 헤이온와이에는 기차역이 없어서 주변 도시인 헤리퍼드(Hereford)에 도착해서 버스로 환승하거나, 렌터카를 이용해서 가는 게 일반적입니다.
헤이온와이는 웨일즈 국경 끝자락에 자리한 세계 최초이자 최대의 헌책방 마을입니다. 1961년, 괴짜 사업가이자 자칭 책의 왕이었던 리처드 부스(Richard Booth)가 버려진 성과 헛간에 헌책을 쌓아 올리며 시작한 실험적인 마을이 지금은 연간 수십만 명의 책 애호가와 컬렉터, 작가와 편집자를 불러들이는 문학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인구는 몇 천 명에 불과하지만, 거리에는 30곳이 넘는 헌책방이 늘어서 있습니다. 어떤 서점은 19세기 초판본과 고서만 취급하고, 어떤 곳은 여행기와 지도, 또 다른 곳은 SF와 판타지로만 선반을 채우고 있습니다. 또한 리처드 부스가 서점으로 사용했던 헤이 성(Hay Castle)도 복원 작업을 통해 외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매년 5월이면 조용한 시골 마을 헤이온와이에 뜨거운 열기가 가득 찹니다. ‘헤이 페스티벌 헤이온와이(Hay Festival Hay-on-Wye)’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비롯해 전 세계의 저명한 작가와 철학가, 독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문학을 논하는 축제이기에 지적 해방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올해는 5월 21일부터 31일까지가 축제 일정이니 참고하세요!
리스본 ㅣ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감성 문학 도시
리스본은 포르투갈이 낳은 두 거장, 페르난도 페소아(Fernando Pessoa)와 노벨 문학상 수상자 주제 사라마구(José Saramago)의 도시입니다. “나의 조국은 포르투갈어다”라고 말했던 페소아는 리스본의 골목과 카페를 전전하며 수많은 이명(Heteronym, 다른 이름)으로 시를 썼고, ‘눈먼 자들의 도시’를 쓴 사라마구의 문학 재단이 있는 카사 도스 비쿠스(Casa dos Bicos) 역시 리스본 문학 여행의 성지입니다.


리스본의 시아두(Chiado) 지구는 19세기부터 작가, 시인, 지식인들이 모여 토론하던 지역입니다. 가파른 언덕길을 따라 크고 작은 서점들이 지금도 발길을 붙잡습니다. 시아두 지구에서는 1732년에 문을 열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베르트랑 서점(Livraria Bertrand)이 있습니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과 수많은 역사의 파고를 견뎌낸 곳으로 서점이라기보다 문학 박물관에 가깝습니다. 아치형 천장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서가 사이사이와 시간이 쌓인 나무 선반들은 수백년 전의 리스본을 보는 듯도 합니다. 책을 구매하면 맨 뒷장에 찍어주는 ‘가장 오래된 서점 방문 기념 도장’은 오랫동안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천천히 읽다’라는 뜻을 가진 르 데바가르(Ler Devagar)는 리스본의 힙한 예술 지구인 ‘LX 팩토리’ 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본래 시아두 지역에 있다가 200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옛 폐공장 단지를 재생한 이곳은 과거 인쇄소였던 공간을 그대로 살려 낡음과 새로움, 기계와 문학이 기묘하게 어우러진 서점으로 탄생시켰죠.
높은 층고를 가득 채운 책장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자전거를 탄 여인의 조형물은 이곳의 시그니처입니다. 멈춰버린 거대한 인쇄 기계 사이사이에는 테이블이 놓여 있어 커피 한 잔과 함께 책을 읽거나 예술적인 영감을 채우기에 완벽합니다.
도쿄 ㅣ 세계 최대 고서점 거리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와 오에 겐자부로(1994) 등 2명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문학 강국 일본. 그 중심인 도쿄는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종이책의 힘을 보여주는 도시로 고서점의 묵직한 역사와 현대적인 라이프스타일 서점이 공존하는, 아시아 책스케이프의 허브입니다.



진보초 역(도쿄 메트로 한조몬선, 도에이 미타선/ 신주쿠선 등) 부근의 간다 진보초(Kanda Jimbocho)는 세계 최대의 고서점 밀집 지역입니다. 책과 공간이 주는 몰입감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안성맞춤인 곳이죠.
약 170여 개의 소서점들이 빽빽하게 밀집해 마치 거대한 책의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절판된 인문학 도서부터 박물관급 희귀본, 예술 서적, 그리고 만화책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책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곳의 서점들이 대부분 북쪽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강한 햇빛에 책이 바래는 것을 막기 위한 지혜로, 책을 대하는 이 도시의 경건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죠. 거리마다 짙게 밴 묵은 종이의 향기를 맡으며 전문 서점들을 탐방하다 보면, 나만의 보물을 찾아가는 듯한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밖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 세계를 집대성한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The Haruki Murakami Library)은 와세다 대학 내에 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와세다 대학 국제문학관’으로, 건축가 쿠마 켄고가 설계한 터널 같은 내부의 목조 아치가 인상적입니다.
하루키가 기증한 수천 장의 레코드와 초판본, 자필 원고를 볼 수 있으며, 그가 운영했던 재즈 카페를 재현한 공간에서 음악을 들으며 독서에 잠길 수 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팬덤을 보유한 작가였던 만큼 이 공간은 팬들에게 큰 의미를 갖습니다.
뉴욕 ㅣ 지성과 욕망이 교차하는 메트로폴리스
뉴욕은 미국 문학사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도시이자, 전 세계 지성인들이 모여드는 도시입니다. 브루클린의 북카페부터 미드타운의 트렌디한 큐레이션 서점, 그리고 개성 넘치는 독립 서점들까지 각기 다른 스타일의 책스케이프를 한 도시 안에서 모두 경험할 수 있습니다.

’18마일의 책(18 Miles of Books)’이라는 슬로건으로 유명한 스트랜드 서점(Strand Book Store)은 뉴욕 책스케이프의 명실상부한 랜드마크입니다. 스트랜드 서점이 보유한 책들을 한 줄로 세우면 18마일(약 29㎞)에 달한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이제는 책이 더 늘어나서 그 길이를 훌쩍 넘어섰지만, 여전히 빽빽한 서가 사이를 걷는 것만으로도 뉴욕의 거대한 지식의 숲을 탐험하는 듯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1927년 설립 이후 뉴욕 독립 서점의 자존심을 지켜왔으며, 3층 높이의 서가에 희귀본과 중고 서적, 신간이 뒤섞여 빽빽하게 꽂힌 책들은 뉴욕의 지적 풍요로움을 상징합니다. 작가와의 만남 이벤트가 수시로 열려, 운이 좋다면 좋아하는 작가를 마주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방대한 서가의 끝인 3층 ‘희귀본실(Rare Book Room)’은 스트랜드에서도 가장 귀한 보물창고입니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초판본과 작가들의 친필 사인이 담긴 고서들이 가득해 책 애호가들에게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죠. 서점을 나서기 전, 서점의 상징인 에코백 하나를 구매해 나오는 길은 뉴욕의 지적인 자부심을 공유하는 뉴요커가 된 듯한 기분 좋은 찰나를 선물합니다.

맨해튼 한복판, 뉴욕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뉴욕 공립 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 – Stephen A. Schwarzman Building)이 있습니다. 정문 계단 양 옆에는 두 마리의 사자상이 있는데, 각각 ‘인내(Patience)’와 ‘불굴(Fortitude)’이라고 부릅니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 뉴욕 시민들에게 필요한 덕목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죠.

영화 <섹스 앤 더 시티> 속 캐리의 결혼식 장소로도 유명하지만, 책스케이프 여행자라면 3층의 로즈 메인 리딩 룸(Rose Main Reading Room)을 꼭 가봐야 합니다.
축구장 만한 크기의 거대한 홀, 높은 천장에 그려진 구름 벽화, 그리고 묵직한 오크나무 책상 위에서 켜지는 수백 개의 램프. 이 압도적인 공간에 앉아 책을 펼치는 순간, 누구나 뉴욕이라는 거대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됩니다. 무료로 개방되지만, 그 품격은 어떤 박물관보다 높습니다. 관광객의 구역과 실제 도서관 이용자들의 구역이 엄격히 나뉘어 있어 정숙을 지키는 것이 에티켓입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인근의 모건 라이브러리 & 뮤지엄(The Morgan Library & Musem)은 억만장자의 화려한 개인 서재를 엿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금융 재벌 J.P. 모건(J.Pierpont Morgan)이 평생 수집한 희귀본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개인 도서관이죠.
1906년에 완공되었으며, 내부는 해리포터 영화 속 호그와트나 중세 유럽의 성에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 3층 높이의 벽면을 가득 채운 금박 장식의 고서들, 화려한 벽화와 스테인드글라스는 어느 귀족이 소유한 비밀 도서관을 보고 있는 느낌을 들게 합니다. 또한 전 세계에 몇 권 남지 않은 구텐베르크 성경을 3권이나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장소이며, 모차르트의 악보 같은 보물들도 전시되어 있죠. 책을 넘어 예술과 문명의 정수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성인 기준 약 $25~$30의 입장료가 있지만, 압도적인 볼거리 덕분에 아깝지 않다는 평이 지배적입니다. 여행 경비를 아끼고 싶다면 매주 금요일 오후 5시~8시 무료 개방 시간을 노려봐도 좋습니다. 단, 인기가 높아 1주일 전에 오픈되는 온라인 사전 예약은 필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