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을 지탱하던 초록의 막이 걷히면, 알록달록하게 물든 숲이 펼쳐지고 길 위에는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수북이 쌓입니다. 그렇게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고, 나무들은 단풍으로 겨울을 준비합니다.
기온이 낮아지고 햇빛이 줄어들면 나무는 엽록소 생성을 멈춥니다. 그러면 평소 녹색에 가려 있던 카로티노이드(Carotenoid)의 노란빛과 주황빛이 드러납니다. 여기에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커지면, 나무는 마지막 힘을 짜내듯 안토시아닌(Anthocyanin)을 만들어 잎을 물들입니다. 매년 기다려온 단풍의 빛깔이 완성되는 순간이죠.
사람들은 찰나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오래 전부터 길을 떠났습니다. 일본에는 헤이안 시대부터 귀족들이 말을 타고 교외로 나가 붉게 물든 숲을 감상하는 ‘모미지가리(紅葉狩り)’ 풍습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의 문인들이 가을 산행을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19세기 말, 미국 뉴잉글랜드와 캐나다 동부에서 철도의 발달과 함께 단풍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지금도 북미의 단풍 로드트립은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가을 여행으로 꼽힙니다.
한번은 꼭 가봐야 할 세계 곳곳의 단풍 명소들을 소개합니다. 나무들이 마지막 빛을 발하며 붉게 타오르는, 짧지만 강렬한 가을의 아름다움을 만끽해 보시길 바랍니다.
미국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을 단풍’을 소개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미국 테네시주와 노스캐롤라이나 경계에 걸쳐 뻗어있는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Great Smoky Mountains)입니다. 아침마다 숲 사이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마치 연기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처럼, 이곳은 자연의 장엄한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은 산맥 전체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단풍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 국립공원(Great Smoky Mountains National Park)을 가리킵니다. 1934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뒤, 1983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이 곳은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공원이기도 합니다. 약 2,000㎢에 이르는 광대한 숲에 100여 종이 넘는 낙엽수가 울창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가을이 오면 산 정상에서 계곡까지 노랑, 주황, 붉은 빛이 차례로 물드는 장관이 펼쳐집니다.

이곳은 오랫동안 체로키(Cherokee)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이후 이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교회를 세우며 정착했는데, 지금도 케이즈 코브(Cades Cove) 계곡에는 당시의 통나무집과 방앗간이 남아있어 옛 생활의 흔적을 전해줍니다.
광활한 만큼 단풍을 즐길 수 있는 명소도 다양합니다. 산맥의 가을빛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클링맨스 돔(Clingmans Dome) 전망대, 드라이브 명소로 꼽히는 뉴파운드 갭 로드(Newfound Gap Road), 단풍과 함께 사슴이나 칠면조 같은 야생동물을 만날 수 있는 케이즈 코브, 그리고 굽이굽이 이어지는 풍광이 일품인 풋힐스 파크웨이(Foothills Parkway) 등이 대표적입니다.
올해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의 단풍은 10월 중순에 물들기 시작해 11월 초 절정을 이룰 것으로 전망됩니다.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알맞아 예년보다 더욱 선명하고 화려한 색채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일본 닛코
신칸센과 기차를 타고 도쿄 북쪽으로 가는 도중에 도시의 소음이 잦아들고 산과 숲이 시야를 가득 메우면, 닛코에 들어섰다는 신호입니다. 도쿄에서 두 시간 남짓 거리에 호수와 폭포, 사찰과 신사가 어우러져 다채로운 풍경을 보여주는 곳은 흔치 않습니다.

닛코에서는 어딜 가도 단풍을 즐길 수 있지만 일방통행도로인 이로하자카는 특별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합니다. 내리막 전용도로와 오르막 전용도로에 총 48개의 급커브가 반복되죠. 사람에 따라 커브가 심하게 느껴질 수 있어 멀미약을 챙기는 게 좋다지만, 단풍이 절정을 이뤘을 때의 모습은 일본에서 손꼽히는 명소 답습니다.

오르막 도로를 이용하거나, 아케치다이라 로프웨이를 이용해서 정상에 도착하면 아케치다이라 전망대가 나옵니다. 이곳에서는 게곤폭포와 주젠지 호 등 닛코의 대표적인 자연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색으로 물든 산과 호수의 푸른 빛이 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쉽게 볼 수 없는 화려함을 뽐냅니다.
닛코의 가을은 고도와 일교차에 따라 단풍 시기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올해는 10월 초부터 고지대가 물들기 시작해, 닛코 시내와 도쇼구 신사 주변은 11월 초까지 화려한 단풍이 이어질 전망입니다.
영국 포레스트 오브 딘
영국 서부 글로스터셔 주, 와이 강과 세번 강 사이에 자리한 포레스트 오브 딘(Forest of Dean)은 웨일즈 경계를 따라 펼쳐진 잉글랜드의 몇 안 되는 고대 숲입니다. 1066년 노르만 정복 이전부터 왕실림으로 지정된 이 숲은 천년의 세월을 견디며 지금까지도 그 위상을 지켜왔습니다.

가을이 되면 참나무, 너도밤나무, 자작나무, 라치, 스위트 체스트넛이 저마다의 빛깔로 물들어, 200제곱마일에 달하는 광대한 숲 전체가 거대한 색채의 파도를 이룹니다. 낙엽을 밟을 때 들려오는 바스락거림, 습기 어린 흙냄새,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부드러운 햇살이 어우러져 포레스트 오브 딘만의 독특한 가을 정취가 완성됩니다.

이곳의 역사는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로마인들의 철광석을 캐냈던 이 숲은, 중세에 헨리 2세에 의해 왕실 사냥림으로 지정되며 엄격한 산림법 아래 보호받았습니다. 13세기부터 본격화된 석탄 채굴은 훗날 영국 산업혁명의 불씨가 되었고, 지역 주민들에게는 ‘프리 마이너(Free Miner)’라는 독특한 채굴권이 주어졌습니다. 이 권리는 지금까지 이어져 일부 후손들이 여전히 그 권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17세기에는 영국 해군 전함을 만드는 참나무 공급지였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에는 목재와 석탄을 전쟁 물자로 내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숲길을 걷다 보면 오래된 광산 터널, 버려진 철로, 광부들의 오두막터가 역사의 잔향처럼 남아 있습니다. 한편 포레스트 오브 딘은 로빈후드 이야기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주 무대는 셔우드 숲이지만, 이곳 역시 중세 무법자와 사냥꾼들의 은신처였다고 전해지죠.
올해 단풍 절정은 10월 말에서 11월 초 사이로 예상됩니다. 천 년 세월 동안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켜온 숲, 포레스트 오브 딘에서 역사와 자연, 그리고 옛 이야기가 겹쳐진 가을을 만나보세요.
스페인 피레네 산맥
고도 3,000m에서 너도밤나무 숲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피레네 산맥은 단숨에 유럽 최고의 단풍 여행지가 됩니다. 북쪽으로는 프랑스, 남쪽으로는 스페인의 카탈루냐(Catalonia) 와 나바라(Navarra)까지 이어지는 이 산맥은 봉우리와 계곡, 호수와 숲이 겹겹이 펼쳐져 있습니다. 가을이 다가오면 공기는 유리알처럼 맑아지고, 숲은 녹색의 옷을 벗고 황금 빛과 붉은 빛 비단으로 갈아입습니다.

피레네 산맥은 지역별로 여러 국립공원으로 나뉩니다. 스페인 쪽에는 아라곤 지방의 오르데사 이 몬테 페르디도 국립공원(Parque Nacional de Ordesa y Monte Perdido), 카탈루냐의 아이귀에스토르테스 이 에스타니 데 산트 마우리시 국립공원(Aigüestortes i Estany de Sant Maurici), 나바라와 바스크의 보호구역들이 있고, 프랑스 쪽에도 피레네 국립공원이 자리합니다. 고산 지대에서 먼저 불길처럼 단풍이 타오른 뒤, 10월 중순부터는 중간 고도의 숲이 짙은 적갈색으로 물들며 절정을 맞이합니다.
계곡과 강가에서는 단풍과 물줄기가 만나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냅니다. 오르데사 국립공원은 깊은 계곡과 수직의 절벽, 은빛 폭포가 단풍과 어우러져 가장 드라마틱한 절경을 선사하고, 아이귀에스토르테스 국립공원에서는 수많은 호수들이 거울처럼 단풍을 품어냅니다. 때로는 붉은 잎과 하얀 첫눈을 한번에 담아내기도 하죠.

서부 피레네의 이라티 숲(Irati Forest)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너도밤나무와 전나무 군락지 중 하나로, 바스크 민족의 원시 신앙과 전설이 깃든 성스러운 숲입니다.
이곳에는 바스크 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존재, ‘숲의 주인’이라 불리는 바사자운(Basajaun)이 산다고 전해집니다. 털로 뒤덮인 거대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는 가축을 보호하고, 인간에게 농업과 철기 기술을 전해준 선한 정령이라고 하죠. 가을이면 나무들에게 고운 옷을 입혀주는 것도 그의 몫이라 믿었습니다.
올해 피레네의 단풍은 10월 중순부터 11월 초 사이 절정을 맞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산악 지대의 밤에는 갑작스럽게 서리나 첫눈이 내릴 수 있으니, 여행을 계획한다면 일기 예보를 수시로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중국 장자제 국가삼림공원
3억 년 전 바다 속에서 형성된 사암 기둥 3,000여 개가 거대한 돌기둥 숲을 이룬 장자제 국가삼림공원(张家界 國家森林公園, Zhangjiajie National Forest Park)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은 세계적 명소입니다. 1982년 중국 최초의 국가삼림공원으로 지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일부 소수민족만 알고 있던 비밀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다 2010년, 제임스 캐머런이 남천일주(南天一柱) 봉우리를 영화 아바타 ‘아바타 할렐루야 산(阿凡达-哈利路亚山, Avatar Hallelujah Mountain)’의 배경으로 삼으면서 전 세계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이름도 영화 속 이름으로 변경되었죠.

장자제 국가삼림공원은 후난성 북서부, 우링위안(武陵源, 무릉원) 경관구 안에 자리합니다. 빽빽한 숲과 해발 1,000m에 이르는 돌기둥들이 안개 속에서 숨었다 나타나는 풍경 덕분에, 1992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올해도 고지대 봉우리들이 10월 중순부터 붉게 물들기 시작해, 골짜기와 계곡 주변은 11월 초까지 화려한 단풍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장자제의 가을 단풍은 마치 SF 영화 속 우주를 떠오르게 합니다. 1,000m 높이의 수직 절벽 사이로 색색의 나무들이 흔들릴 때, 이곳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감상 포인트도 다양합니다. 먼저 천자산 케이블카에서는 현실과 환상이 겹친 듯 안개 속에서 떠오르는 아바타 할렐루야 산을 볼 수 있습니다. 금편계곡(金鞭溪)의 붉고 노란 단풍이 길게 늘어선 단풍 터널을 걸으면, 마치 계절의 문을 통과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또한 거대한 석회암 동굴인 황룡동(黃龍洞)은 고요한 지하 세계와 지상 숲의 화려한 단풍이 극적인 대조를 이루며 또 다른 감동을 더해줍니다. 높이 326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야외 엘리베이터인 백룡 엘리베이터(百龍天梯, 백룡천제)는 장자제의 스케일을 압도적으로 체감하게 합니다.
그리고 숲길을 따라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에서는 절벽 사이로 스며드는 단풍빛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고, 곳곳의 전망대마다 구름과 단풍이 맞닿은 풍경이 기다립니다. 특히 아찔한 글래스 브릿지(Glass bridge/ 장가계 대협곡 유리다리, 張家界 大峽谷玻璃橋) 위에 서면, 발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는 돌기둥 숲과 불타오르는 단풍이 한눈에 펼쳐지는 짜릿한 순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짧지만 긴 여운

가을 단풍은 봄의 새싹과 여름의 푸르름을 지나, 자연이 건네는 가장 화려한 마지막 인사입니다. 짧지만 강렬한 그 빛은 오래도록 마음을 물들이며, 계절을 넘어 기억 속에 남습니다. 잠시 스쳐가는 계절임에도 우리가 가을을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 거리에 흩날린 잎을 밟아 보세요.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에 귀 기울이고, 숲을 붉게 물들이는 계절의 호흡을 느껴보는 겁니다. 단 몇 주 동안만 허락되는 찰나의 아름다움이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테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