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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내비게이터] 도시를 여행하는 가장 우아한 방법_ 세계의 정원
2026.08.18 링크주소 복사 버튼 이미지 페이스북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카카오톡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X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링크드인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인쇄하기 버튼 이미지
트렌드 내비게이터 세계의정원 도시를 가다 가든스바이더베이 빌라 데스테

정원은 도시의 온도를 낮추고 소음과 오염을 완화하는 녹색 인프라이자, 사람들이 걷고 쉬며 만나는 일상의 공공 공간입니다. 무엇보다 도시가 자연을 이해하고 있는 방식과 자연과 어떻게 공존하고자 하는지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여행에서 정원이 빠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도시의 기후와 역사, 미적 취향은 물론 자연을 가꾸고 다루는 방식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시의 정원을 보면 그 도시가 지나온 시간과 고유한 미적 감각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각자의 개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다섯 개의 정원을 소개합니다.

70년의 잠에서 깨어나다
_ 잃어버린 헬리건 정원

영국 잉글랜드 남서쪽 콘월에 자리한 잃어버린 헬리건 정원(The Lost Gardens of Heligan)은 16세기 후반부터 트레메인(Tremayne) 가문 영지였습니다. 1766년 담장을 두른 화원을 시작으로 1907년 이탈리아식 정원까지. 140여 년에 걸쳐 콘월을 대표하는 명원(名園)으로 가꾸어졌죠.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정원을 돌보던 정원사들이 전장으로 떠났고, 상당수가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주인을 잃은 정원은 이후 70여 년간 가시덤불과 담쟁이 아래 잠들어 있었습니다.

헬리건 정원

1990년, 음악 프로듀서 출신의 팀 스밋(Tim Smit)과 트레메인 가문의 후손 존 윌리스(John Willis)가 폐허 속에 묻혀 있던 정원을 재발견했습니다. 낡은 작업실 벽에 남아 있던 옛 정원사들의 이름과 흔적은 복원을 결심하게 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죠. 정원을 원래 모습대로 되살리는 작업은 1991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1992년 일반에 공개됐습니다. 오늘날 헬리건은 유럽 최대 규모의 정원 복원 프로젝트이자 최고의 성공 사례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약 80만㎡(200에이커)에 이르는 정원의 백미는 ‘정글(The Jungle)’입니다. 가파른 계곡이 만들어낸 독특한 미기후 덕분에 나무고사리와 야자, 대나무가 울창한 아열대 숲을 이룹니다. 그 사이를 잇는 흔들리는 로프 다리와 목재 산책로는 마치 미지의 원시림을 탐험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헬리건 정원의 진흙 처녀와 거인의 머리

200종이 넘는 과실과 채소를 옛 방식 그대로 길러내는 ‘생산 정원(Productive Gardens)’, 그리고 대지에 누워 잠든 듯 이끼로 덮인 조각 ‘진흙 처녀(Mud Maid)’와 ‘거인의 머리(Giant’s Head)’ 역시 놓칠 수 없는 명소입니다. 흙과 식물로 이루어진 조각상들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푸른 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모습은 인간이 만든 조형물이 자연의 일부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1992년 개장 이후, 2024년 누적 방문객 800만 명을 기록했으며, 지금도 매년 35만 명 이상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완벽한 ‘자연으로의 회귀’를 증명해낸 헬리건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영감을 주는 살아있는 정원으로 숨 쉬고 있습니다.

식물학의 성지
_ 큐 왕립 식물원

템스강변, 런던 남서쪽에 펼쳐진 큐 왕립 식물원(Royal Botanic Gardens, Kews)은 1759년 왕실 정원으로 출발했습니다. 조지 3세의 어머니 오거스타 공주가 왕실 영지 안에 약 36,000㎡(9에이커) 규모의 식물원을 조성했고, 1840년 국가 기관으로 전환되면서 일반에 공개됐습니다.

2003년에는 정원과 건축물, 식물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큐 가든에서는 식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식물을 수집하고 분류하며 이해해온 방식의 변화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큐가든

큐 가든은 압도적인 컬렉션부터 남다릅니다. 단일 부지 기준, 세계 최대의 살아 있는 식물 컬렉션을 보유해 기네스 기록에 올랐고, 700만 점에 이르는 표본을 소장한 세계 최대급 식물 표본관과 방대한 도서관을 갖춘 식물 보전·연구의 중심지입니다. 수백 명의 과학자가 상주하며 지구가 직면한 생물다양성 문제의 해답을 이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큐가든의 팜 하우스 외관

건축적 볼거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팜 하우스(Palm House)는 건축가 데시무스 버튼과 철공 리처드 터너가 1848년 완공한 유리 온실입니다. 배를 건조하던 철골 기술을 응용하여 큐 가든에서 가장 먼저 지어졌으며, 이곳의 상징적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습니다. 곡선을 이루는 철제 구조와 거대한 유리 표면이 빅토리아 시대의 기술적 자신감을 보여줍니다.

큐가든의 템퍼릿 하우스 외관

세계 최대 규모의 빅토리아 시대 유리 온실로 알려진 템퍼릿 하우스(Temperate House)에서는 희귀하거나 야생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인 온대 식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10개의 기후대를 한 건물 안에 구현한 프린세스 오브 웨일스 온실(Princess of Wales Conservatory), 1762년 세워진 10층 높이의 그레이트 파고다(Great Pagoda)도 놓치기 어렵습니다.

물로 완성한 르네상스 정원
_ 빌라 데스테

이탈리아 로마 근교 티볼리 언덕의 빌라 데스테(Villa d’Este)는 1550년, 티볼리 총독으로 부임은 이폴리토 2세 데스테 추기경이 옛 로마의 영광에 견줄 낙원을 꿈꾸며 조성한 정원입니다. 화가이자 고고학자, 건축가였던 피로 리고리오가 총설계를 맡았고, 1572년 추기경이 세상을 떠날 무렵 대부분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빌라 데스테 정원의 다양한 분수들

이 정원이 특별한 이유는 자연의 원리만으로 완성한 물의 공학에 있습니다. 빌라 데스테의 수많은 분수는 펌프 없이 오직 중력으로만 작동합니다. 높은 지대를 흐르는 아니에네(Aniene) 강물을 수로로 끌어와 자연 낙차와 수압만으로 물을 뿜어 내는 16세기의 정교한 수리(水利) 공학이죠.
‘경이의 정원(Giardino delle meraviglie)’의 초기 모델로서 이후 유럽 전역의 정원 디자인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빌라 데스테의 오르간 분수

낙하하는 물의 힘으로 파이프를 울려 음악을 연주하는 ‘오르간 분수(Fontana dell’Organo)’는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과 공학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빌라 데스테에서는 분수 하나하나를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궁전에서 아래쪽 정원으로 천천히 내려가며 물이 그려내는 축과 높낮이, 시야의 다양한 변화를 감상해야 진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빌라 데스테의 100개 분수와 오바토 분수

정원의 중심을 가로지르며 백여 개의 물줄기가 길게 이어지는 ‘백 개의 분수(Le Cento Fontane)’, 우아한 반원형의 ‘오바토 분수(Fontana dell’Ovato)’, 그리고 한 세기 뒤 바로크의 거장 베르니니가 완성한 ‘비키에로네 분수(Fontana del Bicchierone)’까지. 테라스를 한 단씩 내려설 때마다 물이 빚어내는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19세기 이곳에 머물렀던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도 영롱한 물소리에서 영감을 얻으 <에스테 가의 분수>라는 곡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미래에서 온 도시 정원
_ 가든스 바이 더 베이

싱가포르가 약 10억 싱가포르 달러를 들여 마리나베이 일대에 조성한 도시형 정원, 가든스 바이 더 베이(Gardens by the Bay)입니다. 101만㎡(101헥타르) 규모로 2012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미래지향적인 건축과 첨단 환경공학을 결합해 당시 싱가포르가 내세운 ‘정원 속의 도시(City in a Garden)’라는 국가 비전을 가장 상징적으로 구현했습니다.

가든스 바이 더 베이 전경

현재 이곳에는 남극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온 150만 그루 이상의 식물이 자랍니다. 베이 사우스(Bay South)·베이 이스트(Bay East)·베이 센트럴(Bay Central) 등 세 개의 수변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큰 베이 사우스 가든이 2012년에 먼저 문을 열었습니다.

가든스 바이 더 베이의 슈퍼트리

가든스 바이 더 베이의 상징은 높이 25~50m의 거대한 인공 나무 ‘슈퍼트리(Supertree)’입니다. 조형물이자 수직 정원인 슈퍼트리의 표면에는 난초와 양치식물, 브로멜리아드, 열대성 덩굴식물 등이 자랍니다. 전체 18그루 가운데 12그루가 슈퍼트리 그로브(Supertree Grove)에 모여 있으며, 일부에는 태양광 패널이 설치돼 야간 조명에 필요한 에너지를 생산하고, 일부는 냉방 온실의 더운 공기를 배출하는 설비로도 활용됩니다.

가든스 바이 더 베이의 밤

낮 동안 그늘을 드리우던 슈퍼트리는 밤이 되면 음악과 빛이 어우러지는 ‘가든 랩소디(Garden Rhasody)’의 무대로 변합니다. 두 그루의 슈퍼트리를 연결한 길이 128m, 지상 22m 높이의 공중 산책로 ‘OCBC 스카이웨이(OCBC Skyway)’에 오르면 정원과 마리나베이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펼쳐집니다.

가든스 바이 더 베이 냉방 온실

두 개의 거대한 냉방 온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플라워 돔(Flower Dome)’은 지중해와 남아프리카, 호주 등 서늘하고 건조한 지역의 기후를 재현한 공간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유리 온실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등재됐습니다. 기둥 없이 이어지는 곡선형 유리 구조물 아래 올리브나무와 바오밥나무, 선인장과 다육식물 등 서로 다른 건조 기후대의 식물이 한데 모여 있습니다.

가든스 바이 더 베이의 클라우드 포레스트

바로 옆 ‘클라우드 포레스트(Cloud Forest)’는 해발 약 2,000m의 열대 고산지대를 재현합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35m 높이의 실내 폭포가 안개 자욱한 인공 산을 따라 쏟아지고, 공중 산책로를 오르내리며 양치식물과 이끼, 식충식물 등 서늘하고 습한 운무림의 식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유리 온실이 식물을 따뜻하게 보호하는 공간이라는 통념을 뒤집고, 열대도시 한가운데에 서늘한 산악 기후를 만들어낸 점이 인상적입니다.

가든스 바이 더 베이는 태양광과 식물 폐기물을 에너지원으로 활용하고, 냉방과 환기, 수자원 관리 시스템을 정원 전체와 연결합니다. 정원이 에너지와 물, 생태계를 관리하는 하나의 도시 시스템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세계를 한자리에 모은 테마 정원
_ 헌팅턴 보태니컬 가든

미국 로스앤젤레스 근교 산마리노(San Marino)에 자리한 헌팅턴 보태니컬 가든(The Huntington Botanical Gardens)은 철도 사업가 헨리 E. 헌팅턴이 1903년 사들인 목장을 정원으로 가꾸어 1928년 대중에게 공개한 곳입니다. 도서관과 미술관, 식물원이 어우러진 복합 문화기관으로, 정원부지가 약 52만㎡(130에이커)에 이릅니다.

 헌팅턴 가든

헌팅턴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유는 하나의 부지에 지구촌 생태계를 압축해 담아낸 16개의 테마 정원 덕분입니다. 약 2만 8천여 종의 식물이 문화권별로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어 여러 세계를 여행하는 듯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헌팅턴 사막 정원

대표적인 ‘사막 정원(Desert Garden)’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선인장·다육식물 컬렉션 중 하나로 꼽히며, 5천 종이 넘는 식물이 60개의 화단을 빼곡히 채우고 있습니다. 커다란 기둥선인장과 둥근 금호, 알로에와 아가베가 겹겹이 펼쳐지는 풍경은 남부 캘리포니아의 건조한 기후와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집니다.

헌팅턴

동아시아 정원의 완성도도 손꼽힙니다. 1912년에 조성된 ‘일본 정원’은 굽이진 길을 따라 풍경이 바뀌는 회유식(回遊式) 정원으로 일본식 가옥과 문 다리, 분재, 젠 가든을 품고 있습니다. ‘중국 정원(류방원,流芳園·흐르는 향기의 정원)’은 호수와 누각, 돌다리와 폭포, 차실을 갖춘 공간으로, 중국 밖에 조성된 고전 정원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완성도도 높은 곳으로 평가됩니다.

여기에 장미원, 동백 컬렉션, 호주 정원, 셰익스피어 정원까지 더해져 식물과 문화를 함께 읽는 즐거움이 있는 종합 식물원입니다.

정원으로 도시를 읽다

가든스 바이 더 베이

정원에는 그 도시와 시대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그들이 만들고 싶었던 삶의 모습이 함께 보입니다.

헬리건은 사라진 시간과 사람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묻고, 큐 가든은 지구의 식물을 어떻게 기록하고 지켜낼지 고민합니다. 빌라 데스테는 자연을 예술과 권력의 언어로 바꾸고, 가든스 바이 더 베이는 자연과 기술이 공존하는 미래 도시를 실험합니다. 그리고 헌팅턴은 서로 다른 기후와 문화가 하나의 정원 안에서 만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정원은 도시를 읽는 가장 느린 방법이자, 가장 아름다운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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