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전문가칼럼

진시황이 견제한 전설의 도읍_난징
2019.12.11 페이스북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트위터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링크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추천여행지] 전설을 여행하다_ ① 난징

손권의 오나라부터 주원장의 명까지 여러 나라의 도읍으로 중국 역사에 자주 등장한 난징은 오늘날에도 학술과 문화 그리고 공업의 발달을 거듭하며 과거의 영광을 이어가고 있다.
손권의 오나라부터 주원장의 명까지 여러 나라의 도읍으로 중국 역사에 자주 등장한 난징은 오늘날에도 학술과 문화 그리고 공업의 발달을 거듭하며 과거의 영광을 이어가고 있다.

드넓은 중국 대륙을 천신만고 끝에 통일한 진시황은 불로불사의 꿈을 꾸며 진(秦) 천하가 천세 만세 이어지길 바랐다. 그런 그에게 “500년 뒤 금릉(金陵)에서 천자가 난다”는 예언은 청천벽력 같은 비보였으리라.

※ 금릉(金陵): 춘추 시대에 사용된 ‘난징’의 옛 이름

진시황은 금릉을 직접 찾아 강과 산을 훑어보고는 물길을 돌리고 산의 맥을 끊으라고 지시했다. 지명도 ‘여물 언덕’이라는 뜻의 말릉(秣陵)으로 바꿔버렸다. 진시황의 노여움을 단단히 산 이 땅은 이후 수차례 이름이 바뀌며 오래도록 부침을 겪었으나 천자의 기운이 있다는 예언이 허언은 아니었나 보다.

5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삼국지의 영웅 손권이 이 땅을 주목했고 지명을 건업(建業)이라 바꾼 뒤 오(吳)나라의 수도로 정했다. 이 칼럼의 제목을 본 독자는 이미 짐작했겠지만 손권의 건업이 바로 지금의 난징(Nanjing)이다.

강 위에 놓인 난징 창장(장강) 대교는 교통의 중심이자 동시에 도시 야경의 한 축을 담당한다.
난징을 가로지르는 양쯔강(또는 창장)은 조조의 위(魏)나라와 대치한 오나라에 천혜의 방어막이 되어 주었다. 오늘날에는 난징의 중요한 수상 교통로로 기능한다. 강 위에 놓인 난징 창장(장강) 대교는 교통의 중심이자 동시에 도시 야경의 한 축을 담당한다.

장쑤성(강소성)의 성도인 난징은 오나라를 비롯해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 그리고 명(明) 등 여러 왕조의 도읍이었다. 왕조의 영광이 어린 유적, 도심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양쯔강(장강), 북쪽과 동쪽을 지키고 선 산맥 덕에 명승고적이 많기로 유명하다.

푸쯔먀오의 야경과 그 앞을 흐르는 친화이하. 친화이하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양옆으로 전통 양식의 가옥이 줄을 서 고즈넉한 멋을 즐길 수 있다.
푸쯔먀오의 야경과 그 앞을 흐르는 친화이하. 친화이하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양옆으로 전통 양식의 가옥이 줄을 서 고즈넉한 멋을 즐길 수 있다.
푸쯔먀오의 야경과 그 앞을 흐르는 친화이하. 친화이하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양옆으로 전통 양식의 가옥이 줄을 서 고즈넉한 멋을 즐길 수 있다.

하물며 진시황이 물길을 돌리면서 생긴 인공 운하도 도시의 명소가 됐다. 난징의 젖줄로 생태와 관광을 동시에 책임지는 친화이허(진회하)는 야경을 벗 삼아 뱃놀이를 하기에 좋고, 연말연시에는 축제의 장으로 변신한다. 물길 옆으로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 푸쯔먀오(부자묘)와 전통 양식을 고수한 건축물들이 자리해 독특한 운치를 더한다.

주원장의 명 나라는 도읍의 방어막을 단단히 쌓기 위해 지형에 따라 성벽을 다르게 지었다. 그중에는 말이 달릴 만큼 폭이 넓은 성벽도 있었다. 전쟁을 거치며 상당부분이 유실됐음에도 난징에서는 돌담과 성벽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주원장의 명 나라는 도읍의 방어막을 단단히 쌓기 위해 지형에 따라 성벽을 다르게 지었다. 그중에는 말이 달릴 만큼 폭이 넓은 성벽도 있었다. 전쟁을 거치며 상당부분이 유실됐음에도 난징에서는 돌담과 성벽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난징을 커다랗게 두르고 있는 오래된 성벽은 명나라의 유산으로 태조 주원장이 직접 지시해 건축한 것이다. 원(元)나라 말기, 혼란의 시대에 태어나 가난으로 고생하다 농민 반란 조직 홍건적 곽자홍의 수하로 들어간 그는 입단하고 몇 년 만에 2인자 자리를 차지하고 곽자홍의 양녀인 마(馬)씨와 결혼한다. 이 여인이 주원장의 든든한 정치적 조력가인 마 황후이다.
차근차근 세를 키우고 기회를 기다렸다가 난징에서 대업을 선포한 주원장은 마침내 명을 세웠다. 난징이란 이름도 그때 지어졌다.

난징 성벽 건축에 쓰인 돌은 철저한 검수 과정을 거쳤다. 지금도 벽 일부에서 당시의 산지와 관리 담당자의 정보가 찍힌 벽돌을 관찰할 수 있다.
난징 성벽 건축에 쓰인 돌은 철저한 검수 과정을 거쳤다. 지금도 벽 일부에서 당시의 산지와 관리 담당자의 정보가 찍힌 벽돌을 관찰할 수 있다.

황제가 된 주원장은 책사 주승(朱升)의 조언에 따라 성벽을 올리기 시작했다. 공사는 일종의 실명제로 진행돼, 벽돌에 산지와 만든 이의 이름을 찍었다. 만약 품질 검사에서 불합격하면 관련된 사람들이 처벌받기도 했다. 고된 노동을 하고도 혼이 나야 했던 이들은 안타깝지만, 이토록 엄격하게 건축한 덕분에 오늘날까지 수백 년을 단단히 버티고 서 있는 게 아닐까.

주원장이 마 황후와 함께 묻힌 곳까지 닿으려면 길목을 지키고 선 동물 석상을 지나야 한다. 근엄한 얼굴로 보초를 서는 한 쌍의 탁타 뒤로, 교대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또 다른 낙타 한쌍이 보인다.
주원장이 마 황후와 함께 묻힌 곳까지 닿으려면 길목을 지키고 선 동물 석상을 지나야 한다. 근엄한 얼굴로 보초를 서는 한 쌍의 탁타 뒤로, 교대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또 다른 낙타 한쌍이 보인다.
주원장이 마 황후와 함께 묻힌 곳까지 닿으려면 길목을 지키고 선 동물 석상을 지나야 한다. 근엄한 얼굴로 보초를 서는 한 쌍의 낙타 뒤로, 교대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또 다른 낙타 한쌍이 보인다.

난징 동쪽에는 주원장이 마 황후와 함께 묻힌 밍샤오링(명효릉)이 있다. 주원장은 생전에 자신이 묻힐 곳을 직접 정하고 공들여 무덤 터를 닦았다. 무덤까지 가는 길 중간에는 듬직한 동물 석상을 두어 황제 부부의 사후 여정을 지키게 했다.
사자, 낙타, 코끼리, 말, 기린, 해태가 종류별로 4마리씩 있는 석상은 특이하게도 둘이 서고 나머지 둘은 앉아 있는 꼴이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하루 2교대로 황릉을 지키는 모습을 상징한 것이라 한다. 주 52시간 근무제에는 저촉되나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한다면, 꽤 깜찍한 조치다.

중국의 국부, 쑨원이 잠들어 있는 중산링. 쑨원의 묘 앞에는 392개의 계단이 있는데, 이는 그가 사망했을 당시의 중국 인구인 3억 9,200만 명을 상징한다.

밍샤오링에서 차로 몇 분 거리의 지척에 또 다른 전설이 잠들어 있다. 중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쑨원(손문)의 묘 중산링(중산릉)이다. 쑨원은 청(淸) 황실의 부패와 외국의 침략에 분노해 혁명에 투신한 인물로 공화제를 창시했다.

중산링은 규모가 워낙 커서 쑨원의 묘에 다다르려면 대형 광장과 참배로를 지나 392개의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가는 길이 멀지만 방문객, 특히 중국인 방문객들은 오르고 또 오르는 수고를 좀처럼 마다치 않는다. ‘난징에서 중산링에 들르지 않는다면 중국인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손권부터 쑨원까지, 난세의 영웅들이 난징에서 꿈을 펼치고 난징에 잠들었다. 후대의 사람들은 비단 중국인뿐 아니라 세계의 여행자들도 난징에 오면 전설의 흔적을 찾는다. 진시황이 듣고 분노했던 난징에 대한 예언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글_ 강미아
여행만큼 여행 책을 좋아하는 글쟁이. 여행을 다녀온 모든 곳이 좋았지만 실은 언제든, 어디로 가든 이륙하는 비행기 안이 제일 좋은 사람이기도 하다.

대한항공 운항 정보

인천 ~ 난징 _ 주 4회 직항 운항

※ 자세한 스케줄은 대한항공 홈페이지(www.koreanair.com)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