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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100주년] (1) 일평생 ‘수송보국’에 몸바친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
2020.03.05 링크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수송보국(輸送報國)’ = “수송으로 조국에 보답한다”

3월 5일(음력 2월 11일), 조중훈 창업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한진그룹의 ‘수송보국’ 경영 철학이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1945년 11월 1일 인천에 한진상사 창업으로 한진그룹의 태동을 시작한 조중훈 창업주는 ‘수송보국’ 정신을 바탕으로 한 나라의 동맥인 수송 사업을 발전시켜 국가 경제를 발전시켰다.

조중훈 창업주

조중훈 창업주가 수 많은 업종 중에서 수송/ 물류업을 택한 것은 국가에 헌신하기 위해서다. ‘교통과 수송은 인체의 혈관처럼 정치ㆍ경제ㆍ문화ㆍ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기간산업’이므로 수송으로 우리나라의 산업화에 이바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중훈 창업주의 ‘수송보국’ 이념은 당시 부실 기업인 대한항공과 한진해운 인수 과정에서 엿볼 수 있다. 대한항공 인수시 “밑지면서도 계속 해야 하는 사업이 있는 것. 대한항공공사 인수는 국익과 공익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소명”이라고 했으며, 한진해운 인수때는 “타산적인 차원으로 관계자들의 고뇌와 업계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했다.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이라는 의미를 담고 한진그룹은 수송사업으로 우리 민족을 잘 살게 하겠다는 그의 신념을 반영하고 있다.

조중훈 창업주의 수송보국 경영이념은 故조양호 선대회장을 거쳐 지금의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한진그룹의 핵심 DNA다. 한진그룹의 수송보국은 국가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면서 국민의 기업으로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참된 기업가 정신을 요구한다.

눈 앞의 단기적 재무 실적에 치중하기 보다는 긴 호흡으로 산업을 발전시키고 경제의 대동맥으로서 기업의 사회적인 책임을 다해야 하는 물류 수송 산업의 본질적인 가치를 수송보국은 이야기하고 있다.

■ 어린 시절 고난 속에서도 견문 넓힌 조중훈 창업주… 한진그룹 태동의 밑거름

조중훈 창업주는 1920년 2월 11일(음력) 서울시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조명희 선생과 태천즙 여사의 4남 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0대째 서울 토박이로 살아온 가문에서 비교적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부친이 운영하던 직물점이 1930년대 후반 대공황과 화재로 부도를 맞으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가세가 기울자 조중훈 창업주는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국비 교육기관이었던 경남 진해의 해원(海員)양성소를 선택했다.

조중훈 창업주

원래 기계에 대한 호기심이 유별났던 조중훈 창업주는 2년 만에 해원양성소 기관과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일본 고베에 있는 조선소의 수습생으로 발탁되면서 열 일곱 어린 나이에 세계로의 첫발을 내디뎠다. 조중훈 창업주는 낮에는 조선소에서 기술을 익히느라 쉴 틈이 없었지만, 밤에 하숙방에 돌아와 책을 놓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헌 책방에서 고서를 빌려 침을 발라가며 읽다가 폐결핵을 앓기도 했다.

1940년 조선소 수습기간을 마치고 일본 운수성으로부터 2등 기관사 자격증을 받은 조중훈 창업주는 일본 화물선을 타고 상하이, 홍콩, 동남아 등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세계 문물을 익히고, 견문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셈이다.

1942년 귀국한 조중훈 창업주는 일본에서 구상한 엔진 재생 전문 자동차 수리업체인 이연공업사(理硏工業社)를 설립했다. 효제동 한 모퉁이에서 시작한 이연공업사는 규모는 작았지만 10여명의 직원을 고용하여 마모된 트럭엔진을 수리하는 알찬 사업이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조선총독부는 1943년 모든 물자와 산업시설을 군수지원체제로 편입했다. 이연공업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조중훈 창업주는 징용 영장을 받게 된다. 전쟁터에서 총알받이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조중훈 창업주는 ‘용산공작창’에 기술 직원으로 취직하게 된다. 이 때부터 해방을 맞기까지 2년간 사업의 꿈은 접었지만, 평생의 반려자인 김정일 여사와 1944년 5월 결혼하게 된다.

■ 트럭 한대로 시작한 한진상사… 고난과 시련 속 ‘신용’의 힘 믿어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대한민국 경제는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인천항에는 중국 상해에서 건너온 운동화, 양복, 밀가루 등 생필품들이 밀려 들었다.

그 해 11월 1일 조중훈 창업주는 이연공업사를 정리할 때 받은 보상금과 그 동안 저축해 둔 돈을 모아 트럭 한 대를 장만하고, 인천시 해안동에 한진상사를 설립했다. ‘한진(韓進)’은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이라는 의미를 새긴 것으로, 사업을 통해 우리 민족을 잘 살게 하겠다는 조중훈 창업주의 신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진상사는 장비와 자금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카바이트와 인견사 유통업을 병행하며 해방 직후의 혼돈 속에서도 꾸준한 성장을 이어갔다. 2년 만에 화물자동차 열 대를 보유하게 되었고, 1947년에는 교통부로부터 경기도 일원에 대한 화물자동차 운송사업 면허를 정식으로 받아 수송사업의 기틀도 마련했다.

사업 초기부터 조중훈 창업주가 사업가의 기본 소양이라고 생각한 것은 다름아닌 ‘신용’이였다. 빌린 자금의 상환 기일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을 정도였다. 이를 바탕으로 한진상사는 사업 시작 5년만에 종업원 40여명, 트럭 30여대를 보유한 단단한 회사로 성장했다.

그렇지만 조중훈 창업주가 서른 살이 되던 해 발발한 한국전쟁은 한진상사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차량과 장비들은 군수물자로 동원돼 뿔뿔이 흩어졌다. 체념한 조중훈 창업주는 사업을 정리하고 처분한 자금을 동고동락했던 직원들에게 모두 나눠줬다. 1953년 봄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조중훈 창업주는 인천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한진상사의 시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쑥대밭이 된 땅과 은행 빚만 남아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조중훈 창업주는 폐허 위에 가건물을 세우고 피난 때 몰고 갔던 트럭 한 대로 밤낮없이 회사 재건에 몰두했다. 이 때 그 동안 조중훈 창업주가 쌓아온 ‘신용’이 빛을 발했다. 신용으로 투자자들에게 무담보로 대출을 받고, 예전 단골 손님들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 휴전 2년 후인 1955년에는 한국전쟁 이전의 사세를 거의 회복할 정도였다.

그러던 1956년 어느 트럭회사로부터 임차한 차량의 운전기사가 수송을 맡은 미군 겨울파카 1,300여 벌을 차떼기로 남대문 시장에 팔아 넘긴 사고가 발생했다. 하지만 조중훈 창업주는 직원 한 명을 남대문 시장에 상주시키고 도난 당한 물건이 시장에 유통되면 전부 사들이도록 했다. 금전적으로 당시 3만달러라는 엄청난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군들은 금전적인 부분보다는 조중훈 창업주의 확고한 ‘신용’을 확인했다. 한진상사의 문제해결 능력, 신용에 대한 열의는 미군들의 믿음으로 이어진 것이다. 조중훈 창업주가 평소 했던 “사업은 지고도 이기는 것이고,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다”라는 말의 참 의미였다.

조중훈 창업주

■ 땅에서 하늘로 사업 확장… 월남전 미군 물자 수송사업은 한진그룹의 성장기 이끌어

조중훈 창업주의 ‘신용’으로 한진상사는 미군 운송권을 독점하다시피 따냈다. 그리고 1957년 1월 자본금 1,000만환의 한진상사주식회사로 전환했다. 1959년에는 ‘대한민국 경제 1번지’라 불렸던 소공동 반도호텔에 사무실을 열었다. 1960년에는 한 해 220만달러의 외화를 벌고, 500대의 보유차량을 거느린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1960년은 한진그룹이 땅을 딛고 올라서 하늘로 사업의 영역을 늘린 해다. 1960년 8월 15일 조중훈 창업주는 ‘수송보국(輸送報國)’의 꿈을 이제 하늘에서도 펼쳐 보겠다고 마음먹고 4인승 세스나 비행기 한 대로 에어택시(Air Taxi) 사업을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주식회사 한국항공(Air Korea)’ 설립 신고도 냈다. 기대 이상의 성과에 힘입어 1961년 2월 40인승 컨베어-240기를 추가로 사들여 서울-부산 노선을 운항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국항공은 정부에서 대한국민항공사(KNA)를 전폭 지원함에 따라 경쟁력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이 때문에 조중훈 창업주는 항공사업의 꿈을 접게 된다. 대신 1961년 8월 주한미군 통근버스 20대를 매입하여 서울-인천 구간에서 한국 최초의 ‘좌석버스’ 사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한진고속의 시초였다.

조중훈 창업주는 1965년 12월  한국용역군납조합 이사장으로서 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동남아 순방을 했다. 마지막 방문지였던 베트남의 퀴논항에는 하역 순서를 기다리기 위해 30여척의 화물선이 외항에 정박 중이었다. 이 광경은 조중훈 창업주의 사업 구상을 일깨웠다. 만일 한진상사가 퀴논항의 군수품을 하역하고 수송한다면 엄청난 기회가 될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조중훈 창업주는 바로 펜타곤을 방문했다. 그리고 퀴논에 파병 중인 미군들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1966년 주월 미군 사령부와 790만 달러에 달하는 군수물품 수송계약을 체결하게 됐다. 한진상사는 그 때부터 종전인 1971년까지 5년간 총 1억5천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당시 대한민국 1인당 국민소득이 125~200달러 안팎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 한진그룹을 명실상부한 육⋅해⋅공 종합수송그룹으로 키워내

조중훈 창업주는 이렇게 축적한 경험과 자금을 바탕으로 1960년대 말부터 사업을 범주를 크게 확장시켰다. 특히 설립하거나 인수한 회사들은 대부분 수송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거나 이를 보조할 수 있는 기업들이 대부분이다. 조중훈 창업주가 평생 한눈을 팔지 않고 전문분야에 집중하는 수송 외길 인생을 살아왔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조중훈 창업주는 1967년 7월에는 자본금 2억 원으로 해운업 진출을 위해 대진해운을 창립하고, 그 해 9월에는 베트남에 투입된 인원과 하역장비, 차량, 선박 등에 대한 막대한 보험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동양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를 인수했다. 1968년 2월에는 한국공항, 8월에는 한일개발을 설립하고, 9월에는 인하공대를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1969 대한항공공사 인수
대한항공공사 인수

이듬해인 1969년에는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대한항공을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항공사업에 뛰어들었다. “국적기는 하늘을 나는 영토 1번지고,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까지 그 나라의 국력이 뻗치는게 아니겠소. 대통령 재임 기간에 전용기는 그만두고서라도 우리 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여행 한 번 해보는 게 내 소망이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인 과감한 결단이었다.

하지만 정상화 과정을 밟아가던 대한항공은 1973년 10월 발생한 중동전으로 위기에 빠지게 된다. 국제유가는 항공사의 존립을 위협할 만큼 치솟았기 때문이다. 당장 한 달 안에 대금을 결제하지 않으면 연료 공급이 중단될 지경이었다. 1973년에 새로 들여온 점보기를 담보로 내놔야 할 만큼 상황이 다급했다.

당장 5,000만달러가 필요한 조중훈 창업주는 프랑스 소시에테 제네랄 은행에 도움을 요청하고, 업무상 인연을 맺었던 로제 총재에게 지불 보증을 부탁했다.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로제 총재는 뜻밖에도 흔쾌히 승락했다. 조중훈 창업주의 ‘신용’은 로제 총재에게 한진그룹이나 대한항공의 담보가치보다 더 뛰어났다는 의미다. 사업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신용’을 강조해 온 조중훈 창업주에 대한 시장의 두터운 믿음을 나타내는 일화 중 하나다.

조중훈 창업주의 발길은 바닷길까지 향했다. 1977년 5월 조중훈 창업주는 육·해·공 종합수송 그룹의 완성을 위해, 경영난을 겪고 있던 대진해운을 해체하고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인 한진해운을 설립했다. 당시 한진해운은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로 늘어나는 해운 수요를 바탕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 또한 1987년 11월 만성적인 적자에 허덕이던 대한선주를 인수, 한진해운과 합병해 생산성 제고를 토대로 인수 2년만에 경영 정상화를 이뤄냈다.

한진해운이 정상궤도에 오르자 조중훈 창업주는 조선업으로 눈을 돌렸다. 진해의 해원양성소와 일본 조선소에서 청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냈기에 조선사업에 남다른 애착과 관심이 있었고, 이국 땅 일본 고베의 조선소에서 주경야독하며 키웠던 조선사 주인이 되겠다는 청운의 꿈도 이루고 싶었던 것.
또한 한진해운의 규모가 커지면서 화물선 수요가 꾸준히 늘었고, 보유 선박의 수리 물량도 적지 않아서 수지를 충분히 맞출 수 있으리라는 자신도 있었다. 그래서 법정관리 절차를 밟고 있던 조선공사 매각 입찰에 참가해서 인수한 후 1989년 5월 한진중공업을 출범시키는데 이르렀다.

■ 인재양성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다 해야… 사재 털어가며 지원

조중훈 창업주는 기업이 사회 복지 증진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방법 중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은 바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취지에서 1968년 인하학원을 인수하고, 1979년에는 한국항공대학교를 인수해, 학교시설의 확충과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최대한 재정 지원을 했다.

특히 정석고등학교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돌산을 깎아 교사를 건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젊은 학생들이 인천 시가지와 인천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호연지기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고 조중훈 창업주는 2년여에 걸친 교사 신축공사 기간 중 거의 매주 현장에 내려가 직접 감독을 할 만큼 애착을 가졌다.

그 밖에도 정석교육상과 정석장학금 제도를 통해 우리나라 교육발전에 이바지했다. 또한 1988년부터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의 기회를 갖지 못한 직원들을 대상으로 국내 최초의 사내 산업대학인 한진산업대학(現 정석대학)을 개설해 직원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으며, 조중훈 회장의 교육열은 현재까지도 한진그룹의 교육공헌 사업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조중훈 창업주는 “죽을 때 동전 두 닢 갖고 가는데 다 쓰고 가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의미가 있는 곳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사재를 털어가며 아낌없는 투자를 했지만 조중훈 회장은 “칭찬을 받자고 시작한 일도 아니고 그런 것을 기대하지도 않는다”며 자신이 육영사업에 기울인 정성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조중훈 창업주는 생전에 모은 사재 가운데 1,000억 여원을 공익재단과 그룹 계열사에 기부하는 한편, 그 중 500억 원은 수송·물류 연구발전과 육영사업기금으로 학교법인 인하학원과 정석학원, 재단법인 21세기한국연구 등 세 곳에 배분했다.

특히 인하학원에 대한 기부금은 조중훈 회장이 생전에 강한 애착을 보인 최첨단 전자도서관인 인하대 정석학술정보관 건립기금으로 사용되었는데, 인하대 학술정보관 1층 로비 한쪽 벽에는 조중훈 회장이 평소 입버릇처럼 되뇌던 중국의 고서 관자(管子)에 나오는 명언 ‘종신지계 막여수인(終身之計 莫如修人) : 한 평생을 살면서 가장 뜻있는 일은 인재를 키우는 것’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수송외길 걸어온 수송거목 조중훈 회장의 경영철학… 사업을 예술로 승화시켜

조중훈 창업주는 평소 “한 예술가의 혼과 철학이 담긴 창작품은 수천 년이 지나도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듯이, 경영자의 독창적 경륜을 바탕으로 발전한 기업은 오랫동안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면서 “사업은 예술과 같다”고 했다. 예술가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창조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기업가도 예술가의 신념과 노력으로 사업에 전념해야 한다는 의미다.

조중훈 창업주는 평소 남을 흉내내는 모방사업을 배척했다. 모르는 사업에 뛰어들어 확장을 거듭하는 무모한 행동도 자제했다. ‘낚시대를 열 개 스무 개 걸쳐 놓는다고 해서 고기가 다 물리는 게 아니다. 진정한 낚시꾼은 한 대의 낚시대로도 많은 물고기를 잡는다’는 조중훈 창업주의 ‘낚시대 경영론’에 따라 한진그룹은 수송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업만 운영하는 종합물류그룹으로 성장한 것.

또한 조중훈 창업주는 기업은 반드시 ‘국민 경제와의 조화’라는 거시적 안목에서 운영해야 하고, 눈앞의 이익 보다는 국익을 위해 기업이 일정 부분의 손해도 부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부실덩어리였던 대한항공공사, 대한조선공사와 같은 공기업을 인수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와 같다.

뿐만 아니라 조중훈 창업주는 ‘행운은 남이 거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기업을 발전시키거나 위기 상황에서 구하는 것은 운이나 요행수가 아니라 최고경영자의 시의적절한 판단과 결단력, 미래를 내다보는 비전, 그리고 무엇보다 뼈를 깎는 노력만이 기업이 생명력을 잃지 않고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또한 한 걸음 한 걸음 건실하게 사업을 추진하면서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 것, 즉 ‘지고 이기는 것’이야말로 성공의 비결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경영에 임했다.

조중훈 창업주

조중훈 창업주는 항공사 경영을 통해 쌓은 광범위한 국제 인맥을 활용,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등 우리나라의 경제 및 외교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기업이 사업으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것 말고도 민간외교를 통해 국익에 일조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수교훈장 광화장을 비롯한 수 차례의 훈장을 받았으며 프랑스, 벨기에, 몽골, 네덜란드, 독일 등 세계 각국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단순함의 가치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또한 단순함 속에서 현실감각과 창의력이 어우러져 발현되는 것이 조중훈 창업주의 경영철학의 요체다. 최근 악화되는 대외환경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반짝이던 빛을 조금씩 잃고 있는 대한민국 산업계에 수송 한 길만 우직하게 개척해 온 조중훈 창업주의 철학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본연의 목적을 잃고 흔들리는 많은 기업들에게 더욱 그러할 것이다.

조중훈 창업주는 평생 한진그룹을 일궈오면서 ‘사업은 예술’임을 믿었다. 또한 예술작품이 조화와 균형, 개성과 창의력이 있어야 비로소 가치를 지니듯, 기업도 국민경제와의 조화를 이루며 국민들의 복지에 기여하는 예술작품이어야 한다는 경영철학을 굳게 지켰다. 또한 한 평생 이러한 경영철학과 가치를 지키고자 노력해왔다.

2002년 조중훈 창업주가 타계한 후에도 그의 탁월한 경영철학과 수송산업에 대한 열정과 애정은 한진그룹을 통해 계승, 발전되고 있다. 또한 조중훈 경영철학은 위기를 극복해나가기 위해 힘찬 발걸음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 산업계의 등대가 되고 있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조중훈 창업주의 경영철학을 다시금 돌아봐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