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면서 마주치는 잠깐의 풍경과 만남들이
과수원에서 한 입 깨무는 신선한 사과의 느낌이라면,
오르세 미술관이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만나는 거장의 예술 작품들은
셰프가 재료를 정성껏 선별하고 공들여 만든 일품요리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마음에 오래 남는 여행의 다채로운 맛, 그것이 여행을 기다리는 이유가 되지요.
[예술로의 초대]에서는 여행이 고픈 여러분들에게
사랑받는 명작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하면서 여행 입맛을 돋워 드립니다.
해외 여행이 다시 활발해지면, 꼭 직접 가서 감상해보시길!
프라고나르 ‘상상의 인물화’
책장을 살짝 쥔 손과 어렴풋한 미소에 진중한 눈빛의 남자. 지금껏 18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드니 디드로를 그린 것으로 알려졌던 장-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초상화다. 몇 년 전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실은 드니 디드로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프랑스 미술계가 들썩였다. 과연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프라고나르의 디드로는 디드로가 아니었다.”
2012년 11월, 프랑스 주요 일간지 <르 피가로>를 비롯한 여러 매체가 한결같이 똑같은 톤으로 대서특필한 기사 제목이다. <백과전서>를 편찬한 18세기 계몽주의 철학가이자 사상가 드니 디드로의 초상화로 알려졌던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프라고나르의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디드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많은 미술사책과 철학서에 나오는 디드로 선생의 얼굴로 우리에게 각인된 이 유명한 초상화가 디드로가 아니라니. 사건은 같은 해 6월 1일 파리 드루오 경매장에 등장한, 한 개인 소장가가 내놓은 프라고나르의 드로잉 한 점에서 시작됐다.
존재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흥미로운 이 드로잉은 로코코 시대의 마지막 대가 프라고나르가 그린 ‘상상의 인물들’이라고 불리는 유화 연작의 제목과 내용들을 뒤집어버렸다.
이 한 장의 종이에는 상상의 인물이라 했던 작품들과 정확히 일치하는 포즈와 구도의 스케치가 그려져 있고, 각각의 인물 아래에는 그림의 모델이 된 사람의 신원으로 추정되는 이름이 각각 쓰여 있었다. 이 드로잉은 18세기 미술가 연구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프라고나르 전문가들, 누구보다도 이 시리즈를 절반 이상 소장하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의 큐레이터들에게는 비상이 걸렸다. 화가의 드로잉에 적힌 이름과, 우리가 지금까지 파악하고 있던 인물의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 몇몇 작품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디드로의 초상화는 연구자들에게, 또한 미술 애호가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디드로라고 여겨온 이 초상화는 미완성인 것으로 보임에도 프라고나르의 인물화 중 가장 뛰어난 수작으로 평가되며 많은 미술사 연구서에서 언급하고 분석했을 뿐 아니라, 디드로를 소개할 때도 그의 초상으로 아마도 가장 많이 쓰인 인물화였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라고나르의 이 남성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의 이미지와 많은 부분 일치한다.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다가 고개를 살짝 뒤쪽으로 돌려 옆을 바라보는,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는 깊은 눈매의 남자. 살짝 헝클어진 머리칼에서는 무엇인가 고뇌하는 지성이 느껴지고,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는 손끝에서도 사려 깊음이 느껴지는 그런 남성.
전형적인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인 이 남성이 그 유명하고 박식한 사상가 디드로가 아니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오랫동안 디드로라고 알려졌던 이 남성의 드로잉 아래에는 어떻게 읽어도 드니 디드로와는 연결 지을 수 없는 ‘므니에’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2012년 6월 1일 경매장에서 처음으로 드로잉이 소개되고 거의 반년이 다 되는 11월 말, 루브르 박물관은 드디어 이 작품이 디드로의 초상이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발표했다. 반년 동안 각계의 전문가들이 모여 재연구하고 논의한 결론은 ‘한때 드니 디드로의 초상으로 잘못 여겨졌던 상상의 인물화’다.
이 작품은 당시 다음 달(2012년 12월 4일) 개관하는 분관 루브르 랑스로 옮겨져 대표 작품으로 전시장과 도록에 소개될 예정이었기에 확정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작품은 누구를 그린 것인가?
루브르 박물관의 공식 발표와 같은 시기에 출판된 한 연구에 따르면 이 남성은 아마도 언론인 앙주 가브리엘 므니에 드 케르롱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것은 2017년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에서 열린 특별전 <프라고나르 상상의 인물화와 새로 발견된 드로잉> 전시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아마도’라는 단서가 붙지만 말이다.
반면 루브르 박물관은 아직까지는 이 남성이 디드로가 아니라는 것만 인정할 뿐, 정확한 신원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이 작품은 ‘한때 드니 디드로의 초상이라고 잘못 여겨졌던 상상의 인물화’라고 소개되고 있으며, ‘므니에’란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또한 ‘드니 디드로’를 검색하면 이제 이 작품은 검색조차 되지 않는다. 이제 우리 머릿속에서 디드로의 이 얼굴은 지워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대신, 루브르가 추천하듯 18세기 초상화가 루이-미셸 반 루의 드니 디드로를 우리가 사랑하는 사상가의 모습으로 기억해야 할 것 같다.
글_ 임은신
그림을 찾아가는 시간 dorossy 대표,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