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면서 마주치는 잠깐의 풍경과 만남들이
과수원에서 한입 깨무는 신선한 사과의 느낌이라면,
오르세 미술관이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만나는 거장의 예술작품들은
셰프가 재료를 정성껏 선별하고 공들여 만든 일품요리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마음에 오래 남는 여행의 다채로운 맛, 그것이 여행을 기다리는 이유가 되지요.
[예술로의 초대]에서는 여행이 고픈 여러분들에게
사랑받는 명작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여행 입맛을 돋워 드립니다.
해외 여행이 다시 활발해지면, 꼭 직접 감상해보시길!
클래랭 ‘사라 베르나르의 초상’
지금 우리를 지그시 바라보는 저 매혹적인 여인은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프랑스 국민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이다.
이 작품은 사라 자신이 매우 아꼈던 것으로,
생전에 계속 자신이 소장하고 있다가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아들이 파리 시에 기증했다.
우아한 순백색 드레스로 가리고 있음에도 확연히 드러나는 완벽하고 가녀린 S라인 몸매를 자랑하는 당당한 포즈의 이 여인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프랑스는 물론 세계인의 마음을 앗아간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태어난 사라는 사실 어릴 적부터 그다지 예쁜 소녀는 아니었다. 남성들에게 사랑과 행복을 주고받는 대가로 생계를 이어가는 파리의 코르티잔이었던 사라의 어머니는 어린 사라를 브르타뉴의 시골집에 버려두었다.
깡마른 몸에 바스락거릴 정도로 곱슬곱슬한 빨간 머리와 창백한 흰 피부를 지닌 똑똑하고 열정적인 소녀 사라는 본래 수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의 파리 아파트로 불려와 살게 되면서 사라의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곳에 드나들던 정치인과 예술인, 언론인들이 예쁘지는 않지만 무엇인지 모를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이 가득한 사라에게 배우가 될 것을 권했던 것.
그렇게 사라는 파리 연극 학교에 들어갔고, 졸업 후 자연스럽게 코메디 프랑세즈와 오데옹을 거치며 배우로서 차근차근 성장한다. 열정적이고 지적이며 야망으로 가득 찬 젊은 신인 여배우 사라는 정해진 역할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기왕 배우의 길에 들어섰으니 반드시 프랑스 최고의, 세계 최고의 배우로 남겠다고 결심하며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역할을 분석하고 공부한다. 아울러 그녀의 남다른 연기 실력은 자연스럽게 많은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라는 1870년대 빅토르 위고와 라신의 작품들에서 열연하며 배우로서 인정받고 사랑받기 시작했는데, 위고가 그녀를 ‘라 부아 도르(황금 목소리)’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칭송할 정도였다.
매우 도도하고 강렬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사라의 초상은 바로 그 당시 그녀의 연인이던 화가 조르주 쥘 빅토르 클래랭이 그린 것으로, 1876년 살롱에서 발표해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클래랭은 오늘날 미술사에서는 크게 주목받는 화가가 아니지만 당시에는 그 나름 활발한 활동을 했던 인물. 사라의 초상화 외에도 몇몇 작품이 오르세 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미술관에 소장돼 있으며 파리 가르니에 오페라 극장과 셰르부르 극장 등의 천장화를 그린 작가로 유명하기도 하다.
클래랭은 연인 관계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우정을 지속했던 사라의 좋은 동반자였다. 사라를 아끼고 사랑했던 작가인 만큼 클래랭은 그녀만의 숨겨진 매력을 화폭에 잘 담아냈다.
커다란 녹색 식물이 늘어져 있는 배경에 강렬하면서도 보일 듯 말 듯 묘한 미소를 감추고 있는 신비로운 눈빛을 하고, 반짝이는 장밋빛 새틴으로 감싼 화려하고 아름다운 긴 소파에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그러나 동시에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자세로 앉아 우리를 바라보는 사라의 우아함과 카리스마는 당대에 내로라하는 예술인과 정치인, 언론인은 물론 많은 일반 대중이 어떻게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었는지를 저절로 느끼게 해준다.
사라의 매력은 이렇게 외모적인 것에 더해 무엇보다도 자신의 재능과 실력을 믿고 이를 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열정과 지적인 모습에서 뿜어져 나온다. 여배우로서 성공한 사라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극단을 만들어 극의 내용은 물론 무대 장치, 의상, 연출까지 해내며 최고의 공연을 만들고자 노력한 진정한 ‘종합 예술인’이었다.
또한 그녀는 프랑스 국내 활동에만 만족하지 않고 유럽 대륙은 물론 북미 대륙과 영국 등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순회공연을 성공리에 이끌었는데, 이렇게 열정적이고 실력파인 그녀를 사람들은 ‘라 파트론(여주인)’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그렇게 우리 역사상 최초의 세계적 ‘스타’이자 ‘여신’으로 사랑받았다. 사라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은 배우였는지는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의 반응을 통해 알 수 있다.
사실 그녀의 장례는 공식적인 국장으로 치러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언론은 파리에서 엄수된 그녀의 장례 행렬에 10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모여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해 실질적인 국장급 장례였다고 전한다.
아름답고 당당했던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에 많은 사람이 꽃을 뿌려주며 작별 인사를 했으며, 그 많은 인파에도 장례 행렬은 아주 조용하고 엄숙하게 파리의 페르 라 셰즈 묘지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글_ 임은신
그림을 찾아가는 시간 dorossy 대표,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