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면서 마주치는 잠깐의 풍경과 만남들이
과수원에서 한입 깨무는 신선한 사과의 느낌이라면,
오르세 미술관이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만나는 거장의 예술작품들은
셰프가 재료를 정성껏 선별하고 공들여 만든 일품요리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마음에 오래 남는 여행의 다채로운 맛, 그것이 여행을 기다리는 이유가 되지요.

[예술로의 초대]에서는 여행이 고픈 여러분들에게
사랑받는 명작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여행 입맛을 돋워 드립니다.
해외 여행이 다시 활발해지면, 꼭 직접 감상해보시길!

엘리자벳 비제 르 브룅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수줍은 듯 조심스럽게 미소 짓고 있지만

무엇인지 모를 당당함으로 우리를 사로잡는 눈빛과 밝게 빛나는 맑고 뽀얀 우윳빛 피부가 돋보이는 여인.

바로 18세기 후반기와 19세기 전반기에 걸쳐 프랑스는 물론 유럽 왕실의 여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프랑스의 초상화가 엘리자벳 비제 르 브룅이다.

엘리자벳 비제 르 브룅은 무엇보다도 프랑스의 비운의 마지막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공식 초상화가로 유명하다.

‘르 브룅’하면 우리는 보통 루이 14세의 궁정화가이자 베르사유 궁전의 내부 장식을 지휘한 샤를 르 브룅을 떠올린다. 필자 또한 미술사를 공부하기 전에는 엘리자벳이 샤를 르 브룅의 딸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했었다. 베르사유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며 아마도 엘리자벳이 샤를 르 브룅의 힘을 등에 업고 궁정의 화가가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보면 엘리자벳은 샤를 르 브룅의 먼 후손 중의 한 사람인 장 밥티스트 피에르 르 브룅과 결혼하면서 르 브룅이라는 성을 가지게 된 것이고, 본래는 루이 비제라는 파스텔 화가의 딸로 태어났다. 사실 정신을 차리고 꼼꼼히 살펴보면, 샤를과 엘리자벳은 활동한 시대조차 겹치지 않는다.

샤를 르 브룅이 17세기에 베르사유 궁전 내부를 장식했다면, 엘리자벳 비제 르 브룅은 그다음 시대인 18세기에 베르사유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아이들 초상화를 아름답게 그렸다.

엘리자벳은 아주 어릴 적에 화가로서 재능을 보여 불과 열다섯 살에 직업 화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버지 루이 비제는 딸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그녀가 화가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또 스물한 살이 되던 해 결혼한 남편 장 밥티스트 피에르 르 브룅은 유능한 화상으로, 아내의 그림을 널리 알리고 판매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어떤 연구자는 엘리자벳의 남편이 그녀의 재능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려고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남편이 화상인 것은 그녀가 화가로서 성공하는 데 분명히 작지 않은 역할을 했으리라. 물론, 1783년 그녀가 여성으로서는 네 번째로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입성할 때 남편이 화상이라는 이유로 아카데미의 원장이 반대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녀가 성공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의 재능과 실력 덕분이다. 엘리자벳은 당대에 모델의 성격이 잘 드러나면서도 아름답고 우아한 초상화를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하고 인기가 있었다.

그녀는 초상화를 그릴 때 무엇보다도 모델의 포즈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상적인 포즈는 모델이 화가가 거의 같은 눈높이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화가가 조금 뒤로 물러서서 모델을 차분히 살피며 장점과 단점을 잘 파악해 살릴 것은 살리고, 또 고칠 것은 고칠 수 있었다.

아울러 모델이 화가를 심리적으로 신뢰하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해 오래 버틸 수 있는 자세를 모델과 함께 의논해 결정하고는 했다.

엘리자벳은 초기에 루벤스와 렘브란트, 반다이크 등 북유럽 대가들의 화풍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이 바로 그런 작품 중 하나다. 이 작품은 루벤스의 ‘밀짚모자를 쓴 여인’을 모티프로 그린 것인데 테마가 되는 ‘밀짚모자’는 물론, 모델의 자세와 빛의 움직임, 배경의 색감 등에 루벤스의 작품을 자유롭게 차용해 자신만의 새로운 모티프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모티프는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비롯한 궁정의 여인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 사용된다. 나아가 엘리자벳의 초상화에는 그녀만의 탁월하고 민감한 패션과 유행 감각이 더해져 당대를 이끄는 ‘패션 리더’들의 다채롭고 화려한 의상과 액세서리, 헤어스타일이 아름답게 표현돼 있다.

그녀가 그린 초상화에는 모델들의 우아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결코 과하지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게 살짝살짝 드러나는 여성의 관능적인 매력이 가득하다.

궁정의 신뢰와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우정으로 자신의 재능을 맘껏 펼쳤던 엘리자벳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해외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격동기의 프랑스를, 유럽을 몸소 겪으며 용감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자신이 사랑하는 그림을 그리며 살아간 당당하고 아름다운 여인, 엘리자벳 비제 르 브룅의 부드럽고 날카로운 카리스마가 가득한 저 눈빛에, 우리는 매혹되지 않을 수 없다.

글_ 임은신
그림을 찾아가는 시간 dorossy 대표.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