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면서 마주치는 잠깐의 풍경과 만남들이
과수원에서 한입 깨무는 신선한 사과의 느낌이라면,
오르세 미술관이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만나는 거장의 예술작품들은
셰프가 재료를 정성껏 선별하고 공들여 만든 일품요리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마음에 오래 남는 여행의 다채로운 맛, 그것이 여행을 기다리는 이유가 되지요.
[예술로의 초대]에서는 여행이 고픈 여러분들에게
사랑받는 명작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여행 입맛을 돋워 드립니다.
해외 여행이 다시 활발해지면, 꼭 직접 감상해보시길!
로댕 ‘꽃 장식 모자를 쓴 젊은 여인’
로댕의 연인, 하면 떠오르는 카미유 클로델.
그러나 로댕의 공식적인 연인이자 아내는 ‘꽃 장식 모자를 쓴 젊은 여인’의 모델인 로즈 뵈레다.
일평생 남편의 여자들을 묵묵히 바라보며 버텨낸 로즈의 아름다웠던 20대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 더 애잔하다.
1980년대 초, 많은 소년 소녀를 설레게 한 프랑스 영화가 있었다. 영화 제목은 <라붐(La Boum)>. 지금은 나이가 들고 살도 좀 쪘지만 여전히 그녀만의 매력을 뽐내며 꽤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가 주인공 ‘빅’을 연기해 주목받은 영화이기도 하다.
맑고 깨끗한 아름다운 소녀 빅과 함께 프랑스 청소년들의 풋풋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더불어 권태기를 앓고 있다 주말 부부로 살게 되면서 서로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는 빅의 부모님을 통해 중년 부부의 다시 찾은 따뜻한 사랑 이야기가 적당히 버무려진 80년대 프랑스식 성장 로맨스 영화다.
최근까지도 <라붐>은 종종 명절 연휴 특선 영화로 TV에서 방영되며 풋사랑의 설렘과 아름다움을 추억하게 했다.
이 영화에는 재미있게도 10대 소녀 빅의 사랑에 대한 조언자로 80대의 증조할머니가 나온다. 30대 후반, 많아야 4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빅의 엄마와 아빠보다도 훨씬 자유로운 젊은 감각의 소유자인 증조할머니는 10대의 손녀에게 예술과 문화를 즐기는 법을 가르쳐주고 또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마음껏 사랑하라고 힘주어 말해주는 증조할머니와 10대 손녀의 대화는 다양한 장소에서 진행되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파리의 로댕 미술관이다.
우리에게 ‘생각하는 사람’ ‘지옥의 문’ 등으로 잘 알려진 현대 조각의 거장 오귀스트 로댕이 말년을 보낸 호텔 비롱에 만들어진 미술관에서 빅과 증조할머니는 그 많은 로댕의 걸작들을 뒤로하고(그의 걸작 ‘입맞춤’은 뒷모습으로만 나온다), 무언가 사연이 있는 듯 고요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꽃 장식 모자를 쓴 젊은 여인’을 바라보며 서로 지금 막 새로 만난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조잘댄다.
그리고 증조할머니는 이 작품을 보며 옛 친구를 되찾은 것 같은 기쁜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로즈 뵈레, 내 조언자 중의 한 사람! 로댕이랑 50년을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살았지.”
사실 우리는 로댕의 연인으로 카미유 클로델을 떠올리는데, 실제로 로댕의 곁을 평생 지킨 사람은 바로 이 ‘꽃 장식 모자를 쓴 젊은 여인’의 모델인 로즈 뵈레다.
로즈는 로댕이 아직 조각가로서 인정받기 전인 1864년에 만나 그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1917년까지 계속해서 공식적으로 ‘로댕의 여인’ 자리를 지킨 여성이다. 상파뉴 지방의 평범한 집안 출신인 로즈는 파리에서 세탁부로, 혹은 꽃 장식과 깃털 장식을 만드는 노동자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어 로댕을 내조한다.
더불어 로댕의 모델이 되는 것은 물론 작업실 조수로 일하기도 하는데, 로댕이 멀리 출장을 가서 작업실을 비워야 할 때 조각에 사용할 진흙이 마르지 않고 적당한 습기를 머금고 있도록 관리하는 것도 그녀 몫이었다.
로댕은 훗날 “아내는 나에 대한 애착이 엄청났다”고 말하며 “로즈는 나에게 ‘어려운 시절을 함께한 동반자’로, 당시 나는 매일매일 14시간씩 작업에만 몰두했고 일주일에 단 하루 일요일만 쉬었으며, 그날이면 아내와 함께 2인분에 3프랑인 푸짐한 식사를 하며 고된 한 주를 보상했다”라고 회고했다.
이렇게만 말하면 로즈를 무척 사랑한 듯하지만, 사실 로댕은 그 누구 못지않은 여성 편력을 자랑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24살 어린 제자 카미유 클로델과의 10년에 걸친 정열적이고 소모적인 ‘미친 사랑’뿐만 아니라, 그의 마력에 빠진 아름다운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과의 미묘한 관계도 있으며, 말년의 로댕을 쥐락펴락했던 슈아죌 공작 부인과 젊은 미망인 작가 잔느 바르데와의 염문도 있다.
하지만 결국 로댕은 말년에 그의 조강지처 로즈에게 ‘공식적으로’ 돌아온다. 빅의 증조할머니가 영화에서 말하듯 50년을 결혼하지 않고 ‘동거인’으로서 함께 살다가,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모르지만 로댕은 76세이던 1917년 1월, 72세의 로즈와 드디어 결혼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어렵게 결심해 결혼한 후 한 달도 안돼 아내를 병으로 잃었고, 결국 그 자신도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그들은 남편과 아내로, 남편의 걸작 ‘생각하는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같은 무덤 아래에서 영원한 안식을 함께하고 있다.
그 많은 남편의 여자들을 묵묵히 바라보며 버텨낸 로즈의 아름다웠던 시절,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서로 따뜻하게 사랑했던 시절, 20대의 아내를 담아낸 ‘꽃 장식 모자를 쓴 젊은 여인’은 어쩌면 그래서 더 애틋하고 애잔한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글_ 임은신
그림을 찾아가는 시간 dorossy 대표,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