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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의 초대] ‘근대 회화의 아버지’ 세잔이 있게 한 화상
2021.05.04 페이스북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트위터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링크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여행을 하면서 마주치는 잠깐의 풍경과 만남들이
과수원에서 한입 깨무는 신선한 사과의 느낌이라면,
오르세 미술관이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만나는 거장의 예술작품들은
셰프가 재료를 정성껏 선별하고 공들여 만든 일품요리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마음에 오래 남는 여행의 다채로운 맛, 그것이 여행을 기다리는 이유가 되지요.

[예술로의 초대]에서는 여행이 고픈 여러분들에게
사랑받는 명작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여행 입맛을 돋워 드립니다.
해외 여행이 다시 활발해지면, 꼭 직접 감상해보시길!

세잔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

볼라르는 근현대 미술의 태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근현대 회화를 이야기할 때 파블로 피카소의 입체주의를 빼놓을 수 없고,
피카소를 이야기하려면 폴 세잔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 중요한, 우리가 미술사에서 소위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일컫는 세잔을
미술계로 다시 불러들여 빛을 보게 한 것이 바로 볼라르이기 때문이다.

책을 가지고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의 그림
폴 세잔,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 1899년, 캔버스에 유채, 101×81㎝, 파리 시립 미술관 프티팔레 소장

인도양의 작은 섬인 프랑스령 레위니옹 출신으로 법대 진학을 위해 파리로 왔다가 미술에 빠져들면서 공부를 중단하고 화상의 길로 들어선 볼라르는, 처음에는 센강의 상인들이 파는 데생과 판화들을 사다가 자신이 살고 있던 아파트를 업장 삼아 이를 되팔며 사업을 시작한다.
사업은 제법 잘돼 3년만인 1893년에는 파리의 라피트가에 작지만 제대로 된 갤러리도 마련한다. 볼라르가 취급한 데생과 판화 중에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데생과 스케치도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그에게 힘을 실어준 것은, 마네의 미망인에게서 구입한 마네의 데생과 유화 스케치였다.

1894년 자신의 갤러리에서 이 작품들로 전시를 열면서 볼라르는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인상주의 화가로 한창 주목받고 있던 르누아르와 드가를 만나게 됐고, 이를 계기로 이들과 좋은 인연을 이어간다.
르누아르의 아들 장의 회고에 의하면, 처음 볼라르를 만났을 때 르누아르는 재정적으로 아주 힘든 상황이었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매우 확신에 차 있었다고 한다. 볼라르는 르누아르의 화상으로 일하고 싶어 했지만 당시 오랫동안 일을 함께 해온 폴 뒤랑-뤼엘이라는 화상과의 의리 때문에 르누아르는 이를 수락할 수 없었고, 대신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천재’ 세잔과 함께 일해보면 어떻겠냐고 조언했다고.
볼라르는 비슷한 시기에 탕기 영감의 가게에서 세잔의 작품을 처음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고, 결국 1895년 자신의 갤러리에서 세잔의 첫 개인전을 연다. 그리고 이 전시는 대대적으로 성공해 세잔은 드디어 대중적으로도, 애호가들에게도 주목받기 시작했고 볼라르는 자신의 취향과 안목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됐다.
이 전시를 계기로 세잔의 독점 화상이 된 볼라르는 프랑스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제법 탄탄한 컬렉터층을 형성하기 시작하고 화상으로서, 갤러리스트로서 승승장구하는 기반을 마련한다.

볼라르는 ‘동시대 미술의 아방가르드-전위적인 화상’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가 고갱(1898), 고흐(1895) 그리고 피카소(1901)와 마티스 등에게 파리에서의 첫 전시를 열어준 사실을 상기해볼 때, 이는 지극히 당연하다.
훗날 어마어마한 거장이 될 신인들을 알아보고 그들의 첫 개인전을 열어준 화상이며 갤러리스트인 볼라르.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19세기 말, 20세기 초반의 미술가들은 거의 볼라르의 손을 거쳐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를 통해 데뷔하고 작품을 판매하며 명성과 부를 얻은 작가들과 볼라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직접 쓴 자서전 <한 파리 화상의 기억(Souvenirs d’un marchand de tableaux)> (1937, 한국어 번역본 <파리의 화상>도 발간)에 자세히 기술돼 있다.

볼라르와 화가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지금도 그렇지만 작가와 화상의 관계는 어쩌면 애인 사이 같은, 서로 함께 가고 사랑하면서도 때로는 미워하고 또 아주 작은 이유로도 등질 수 있는, 그런 사이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이렇게 많은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한 볼라르지만, 그는 예술을 사랑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그저 미술품을 사고팔아 부를 축적했고 수완과 안목이 동시에 좋았던 사업가로서, 때로는 그저 돈만 밝히는 사업가라고 원망을 듣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 예로, 마티스는 볼라르가 전시를 열어주어 행복하기는 했지만, 그가 “오프닝 파티에서 전시 작가와 작품에 대한 존중없이 손님이 오니 세잔이나 르누아르의 판화들을 팔기에 정신없더라”며 불쾌해했다. 하지만 세잔이나 르누아르 같은 작가들은 볼라르와의 돈독한 우정을 과시하며 그를 지지하기도 했다.

볼라르의 초상은 그와 함께 일한 거의 모든 화가들이 그렸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화가들 앞에서 적어도 백 번은 포즈를 취했을 것이란다.
그중 세잔의 이 작품은 거의 제일 처음 그려진 볼라르의 초상인데,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있기 힘들었던 볼라르가 자꾸 움직이자 세잔이 “저기에 있는 사과처럼 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란 말이오!”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그리는 동안 볼라르가 이야기를 하든 움직이든 편히 그냥 두었던 르누아르, 혹은 볼라르가 편히 포즈를 취할 수 있도록 아예 고양이와 함께 있도록 한 보나르와 달리, 무뚝뚝하고 학구적이었던 세잔은 피사체를 정확히 관찰하고 그대로 그려내기 위해 모델이 절대로 움직이면 안 되었던 것이다.

몽마르뜨 언덕길
프리팔레 미술관 입구
세잔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은 파리 시립 미술관 프티팔레가 소장하고 있다.

글_ 임은신
그림을 찾아가는 시간 dorossy 대표,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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