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을 떠나는 데에는 언제나 이유가 필요하다. 누군가는 그것을 핑계라 부르고, 누군가는 명분이라 부르겠지만 말이다. 시애틀 2주 살이는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꼭 한번 살아보고 싶었다.
제주 한달살이가 있듯 미국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동경이 있다. 그중 하나가 PNW 살이다. 태평양 북서부, 줄여서 PNW(Pacific Northwest)라 부르는데, 보통 미국 워싱턴주와 오리건주를 중심으로 아이다호주, 넓게는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까지 아우르는 북미 북서부 지역을 말한다.
사실 PNW는 단순히 지리적 명칭이라기보다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을 지칭한다. 비에 젖은 침엽수림과 호수, 독립서점과 카페, 자전거와 하이킹, 플리스 재킷과 낡은 등산화 같은 것들 말이다. 자연과 도시가 일상에 맞닿아 균형을 이루는 삶을 누릴 수 있어 많은 미국 사람들이 동경한다. 실리콘밸리의 연봉을 마다하고, 뉴욕의 화려한 라이프스타일도 뒤로하고 북미 북서부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발리나 치앙마이에서 살아보기와 PNW는 또 다르다. 무조건적인 ‘쉼’이 아니라, 반복되는 하루의 질(質)을 높이는 ‘일상’을 의미한다. 아침에 호숫가를 달리고, 낮에는 동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책을 읽고, 주말이면 숲과 바다로 나간다. 비가 와도 방수 재킷을 입으면 그만이다.
시애틀은 PNW의 생활방식을 가장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도시다. 동네마다 오래된 서점과 카페가 남아 있고, 도심 안에 호수와 공원이 있고, 30분만 나가면 바다와 산, 국립공원이 펼쳐진다. 그래서 대한항공 직항편에 몸을 싣고 시애틀로 날아갔다. 2주라는 시간을 들여, 관광객이 아니라 잠시 현지인인 척 살아보기로 했다.
캐피톨 힐
_ 책과 커피로 시작하는 하루
시애틀은 미국의 커피 문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도시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모퉁이에 있는 유명한 1호점 때문만은 아니다. 시애틀은 커피로 하루를 여는 문화를 일상으로 만든 도시이고, 그 문화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 캐피톨 힐(Capitol Hill)이다. 다운타운 동쪽에 자리한 캐피톨 힐에는 오래된 주택가와 번화한 상업 거리가 나란히 이어진다. 낮에는 독립 상점과 서점, 레스토랑을 찾은 사람들이 거리를 걷고, 밤이 되면 바와 라이브 음악 공연장 앞에 긴 줄이 늘어선다.

캐피톨 힐에는 직접 원두를 볶는 로스터리 카페가 많다. 바리스타들은 원두의 산지와 로스팅 날짜를 마치 와인을 이야기하듯 설명해준다. 처음에는 조금 과하다 싶었는데, 사흘쯤 지나자 그 수다에도 익숙해졌다. 자주 들른 곳은 15번가의 빅트롤라 커피 로스터스(Victrola Coffee Roasters)였다. 2000년에 문을 연 빅트롤라는 2003년부터 매장 뒤편의 작은 공간에서 직접 원두를 볶기 시작했다. 시애틀 스페셜티 커피 문화를 형성한 초기 세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밖에도 데이비드 쇼머가 에스프레소 추출에 대한 자신만의 원칙을 지켜온 에스프레소 비바체(Espresso Vivace), 매장 안쪽에서 직접 원두를 볶는 카페 비타(Caffè Vita)까지 모두 캐피톨 힐의 터줏대감 같은 카페들이다.

커피를 마신 뒤에는 엘리엇 베이 북 컴퍼니(Elliott Bay Book Company)로 갔다. 수십 년째 자리를 지켜온 대형 독립 서점이다. 이제는 캐피톨 힐을 대표하는 문화 공간 중 하나다. 목조 서가 사이 곳곳에서 직원이 손글씨로 써 붙인 추천 카드를 볼 수 있다. 알고리즘은 좋아할만한 책을 예측해서 보여주지만, 추천카드는 내가 좋아할 줄 몰랐던 책을 알려준다. 그 차이 때문에 아직 독립 서점들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후에는 시애틀 공공도서관(The Seattle Central Library)에 들렀다. 렘 콜하스(Rem Koolhaas)가 설계한 이곳은 분관 하나하나가 서재 같다. 유리와 강철로 지어진 현대건축의 명소로 이름을 날리는 곳이지만, 정작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안의 사람들이었다. 학생도, 관광객도, 직장인들도 나란히 앉아 책을 보는 지극히 평범한 공공의 공간. 시애틀이 자랑하는 ‘누구에게나 열린 일상’의 얼굴이었다.
좋은 하루를 시작하는 것에 거창한 계획은 필요하지 않다. 커피 한 잔과 읽을 책, 그리고 잠시 앉아 있을 자리. 그거면 된다. 시애틀이 왜 ‘책과 커피’로 유명한지 이해하는 데는 하루면 충분했다.
프리몬트
_ 빈티지와 자전거
운하 북쪽에 자리한 프리몬트(Fremont)는 예술가와 학생, 젊은 직장인들이 모여 사는 보헤미안 동네다.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Center of the Universe)”이라 부르고, 동네 표어는 ‘괴짜일 자유(De Libertas Quirkas)’다.

오로라 다리(Aurora Bridge) 아래에는 1990년에 세워진 5.5m 높이의 트롤 조각이 폭스바겐 자동차 한 대를 움켜쥐고 있고, 길 모퉁이에는 성큼 걸어 나오는 5m짜리 레닌 동상이, 어느 건물에는 냉전기의 로켓이 붙어 있다. ‘인터어반을 기다리며(People Waiting the Interurban)’라는 알루미늄 조각상엔 주민들이 철마다 옷을 갈아입힌다. 또 여름이 다가오면 프리몬트 솔스티스 퍼레이드(Fremont Solstice Parade)가 열린다. 상업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바디페인팅 자전거 라이더 행렬부터 거대 인형까지, 오직 시민들의 자발적인 예술적 창의력과 신체적 자유로 여름의 시작을 축하하는 시애틀 최고의 예술 축제다. 진지함과 장난스러움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창작자들이 모여들 수 밖에 없는 동네다.
일요일이면 프리몬트 선데이 마켓(Fremont Sunday Market)이 열린다. 1990년에 시작되었는데 1년 내내 서는 유럽식 거리 시장이다. 빈티지 의류와 중고 가구, 오래된 레코드와 수공예품, 용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골동품이 두 블록에 걸쳐 펼쳐지고, 차고 안에는 ‘하이퍼마켓’이라 불리는 실내 빈티지 구역까지 있다. 누군가의 옷장과 창고에서 나온 물건들이 좌판에 오르는 진짜 벼룩시장이다.

시장이 서지 않는 날에도 프리몬트는 빈티지의 동네다. 그중에서도 프리몬트 빈티지 몰(Fremont Vintage Mall)은 꼭 한 번 들러볼 만하다. 지하에 펼쳐진 2개 층 규모의 빈티지 컬렉티브로, 2008년에 문을 열었다. 미드센추리 가구와 레코드, 오래된 잡지와 별별 수집품이 미로처럼 쌓여 있다. 매클 모어의 히트곡 ‘Thirft Shop’ 뮤직비디오에서 주요 촬영지로 등장했고, 펄 잼의 보컬 에디 베더가 훗날 밴드가 리메이크해 크게 히트시킨 ‘Last Kiss’의 원곡 희귀 싱글 음반을 직접 발굴해 낸 장소이기도 하다.
프리몬트에서 또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전거다. 이 동네를 지나는 버크-길먼 트레일(Burke-Gilman Trail)은 옛 철길을 길로 바꾼 것이다. 운하와 주택가, 공원과 대학가를 하나로 잇는 시애틀의 대표적인 다목적 트레일이다. 오후에 자전거를 빌려 달려보니, 차로 지날 때와 달리 건물보다 사람들의 생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강물 냄새와 바람의 온도, 계절의 변화가 온몸을 스쳐지나갔다.

트레일을 따라 조금만 가면 개스웍스 파크(Gas Works Parks)가 나온다. 가스 공장이던 자리를 공원으로 되살린 곳이다. 공원 언덕에 서면 녹슨 산업 설비 너머로 유니언 호수와 시애틀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들어온다.
차 대신 두 바퀴로 움직이는 삶에는 특유의 속도가 있다.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도시의 냄새와 온도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프리몬트의 매력이다.
밸러드와 웨스트 시애틀
_ 바다와 함께 사는 사람들
시애틀 사람들에게는 바다는 풍경이 아니라 일상이다. 이런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밸러드(Ballard)와 웨스트 시애틀(West Seattle)이다.

밸러드는 본래 스칸디나비아 이민자들이 정착한 어촌으로, 북유럽 이민자와 어업, 조선업의 역사가 남아 있는 동네다. 지금은 세련된 레스토랑과 바, 독립 상점이 늘었지만 노르딕 문화와 해양 산업의 흔적은 여전히 지역 정체성의 일부다. 그 뿌리를 제대로 들여다보려면 내셔널 노르딕 뮤지엄(National Nordic Museum)에 가면 된다. 미국에서 노르딕 지역 전체의 역사와 문화, 이민자들의 유산을 이정도 규모로 다루는 곳은 유일하다.

웨스트 시애틀로 넘어가면 결이 조금 달라진다. 다운타운에서 워터 택시로 15분이면 닿는데, 바닷마을의 여유가 느껴진다. 3㎞ 남짓 이어지는 알카이 비치(Alki Beach)를 따라 자전거를 타면 모래 사장과 산책로, 배구장과 피크닉 공간이 이어지고, 강 건너편으로 다운타운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이면 그 너머로 서쪽엔 올림픽 산맥이, 남쪽으론 만년설을 인 레이니어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다와 도시와 산이 한 프레임이 담기는 것이다.
해변 끝에는 1913년에 세워진 알카이 포인트 등대가 서 있고,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링컨 파크(Lincoln Park)가 나온다. 바다 위 벼랑이 얹힌 135에이커의 숲으로, 침엽수 사이 산책로를 걷다 아래로 내려가면 곧장 짠 내 나는 해안이다. 여름이면 바닷물을 데운 콜먼 수영장도 문을 연다. 숲과 바다가 한 공원 안에 붙어 있는 셈이다.
베인브리지 아일랜드
_ 주말의 여유는 페리에서 시작된다
시애틀에서의 주말은 페리 선착장에서 시작된다. PNW에서 페리는 관광 수단 뿐 아니라, 섬과 도시를 오가는 주민들의 출퇴근길이자, 주말이면 복잡한 일상을 벗어나게 해주는 교통수단이다.

다운타운 콜먼 독(Colman Dock)에서 배를 타고 35분이면 베인브리지 아일랜드(Bainbridge Island)에 닿는다. 고층 건물이 뒤로 밀려나고 물과 산, 섬의 윤곽이 가까워지는 데 필요한 시간이 고작 35분이라니. 페리 갑판에 서면 등 뒤로 시애틀의 스카이라인이 서서히 작아지고, 맑은 날이면 저 멀리 만년설을 인 레이니어산이 실루엣을 드러낸다.
섬에 내리면 시간이 한결 느리게 흐른다. 발걸음의 속도도, 사람들의 말투도, 상점이 문을 여닫는 리듬까지 도시보다 한 박자 느긋하다. 페리 터미널에서 언덕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작은 중심가 윈즐로(Winslow)가 나온다. 카페와 레스토랑, 갤러리와 로컬 상점이 거리에 모여 있다. 그 중에서도 1970년 문을 열어 5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독립 서점 이글 하버 북 컴퍼니(Eagle Harbor Book Company)가 보인다. 원예와 요리, 자연, 지역 작가들의 책들이 눈에 띄었다. 서가의 구성만으로도 섬사람들의 생활을 조금 엿본 기분이 들었다.

섬 북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블로델 리저브(Bloedel Reserve)가 나온다. 벌목지였던 140에이커의 땅을 정원으로 되살린 곳이다. 일본식 정원과 이끼 정원, 초지와 연못이 2마일 남짓의 산책로로 이어진다. 이끼와 고사리, 침엽수가 뿜어내는 습한 초록 사이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에 평화가 찾아드는 곳이었다.
배 한 번 타고 건너면 닿을 수 있는 거리. 그 소박한 여백이야말로 PNW에 사는 사람들이 누리는 주말의 여유였다.
더 나은 일상을 여행하다

PNW 라이프가 특별하게 느껴진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 삶이 전혀 특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호수를 걷고, 책을 읽다가 바다를 건너는 하루. 몸을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가까운 곳에서 여유를 찾는 삶. PNW 라이프란 특별한 방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였다.
바쁜 일상에 쫓기다 하루가 짧게 느껴질 때면 시애틀에서 누렸던 소박한 여유가 종종 떠오를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