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여행

[내서랍속여행기억] 호주 와인 투어
2025.12.23 링크주소 복사 버튼 이미지 페이스북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카카오톡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X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링크드인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인쇄하기 버튼 이미지
내 서랍 속의 여행 기억 호주 와인 투어

두툼한 코트를 벗어 던지고 떠나온 1월의 호주는 한여름이었다. 대한항공 비행기가 시드니 상공을 선회할 때 창 밖에 펼쳐진 풍경은 서울의 한겨울과는 전혀 다른 계절의 빛으로 가득했다.

여행 목적은 단순했다. 와인을 마시러 가는 여행. 포도밭을 걷고, 와이너리를 둘러보고, 시간을 천천히 흘려보내고 싶었다. 스펙트럼이 넓고 개성이 강한 호주 와인을 오래전부터 좋아했다. 누군가는 와인을 위해 국경을 넘어서 가는 건 과하다고 이야기하지만, 때론 한 잔의 와인이 충분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계절을 거슬러 떠난다는 사실 또한 낭만이었다.

호주에는 2,400개가 넘는 와이너리가 있다. 시드니가 속한 뉴사우스웨일스(New South Wales)에만 약 500개, 남호주(South Australia)에는 그보다 많은 680개 이상이 자리한다. 이 숫자 앞에서 마음이 커졌다. 일주일 남짓한 일정으로 모두 둘러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심장부는 보고 싶었다. 그래서 첫 번째 목적지로 시드니 근교의 헌터 밸리를 택했다.

유럽의 전통적인 와이너리들이 셀러와 테이스팅룸에 집중한다면, 호주의 와이너리들은 하나의 복합 문화 공간으로 진화했다. 레스토랑과 카페, 프라이빗 테이스팅룸, 갤러리, 숙박시설까지 두루 갖춘 곳이 많다. 테이스팅을 넘어서 포도밭을 산책하고, 식사하고, 일몰을 바라보며 와인을 즐기고, 그곳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는 것이 호주 와이너리만의 매력이다.

헌터 밸리 와이너리

시드니에서 북쪽으로 차로 두 시간. 헌터 밸리(Hunter Valley)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순탄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자 부드러운 구릉지대가 이어지고, 어느 순간부터 도로 양 옆으로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1820년대부터 와인을 만들어온 이곳은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산지 중 하나다.

티렐스 와인

첫 번째로 찾은 곳은 티렐스 와인(Tyrrell’s Wines). 1858년 설립되었으며 여전히 가족 경영으로 여섯 세대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와이너리의 자부심은 단연 세미용(Sémillon). 프랑스 보르도에서 유래했지만, 헌터 밸리의 세미용은 오크 숙성 없이도 세월과 함께 스스로 깊어지는 특별한 품종이다. 처음에는 레몬 껍질처럼 산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꿀과 구운 빵의 향이 차분히 배어든다. 잔을 기울이니 레몬의 산미, 꿀의 달콤함,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미네랄의 감촉이 한데 어우러졌다.

오후에는 언덕 위의 오드리 윌킨슨(Audrey Wilkinson)을 방문했다. 1866년부터 이어져 온 이 와이너리의 셀러도어(시음과 페어링, 현장 구매가 가능한 공간)는 헌터 밸리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다. 잔을 들고 창가에 서면 포도밭의 초록이 잔잔히 밀려오고, 멀리 보이는 산맥은 안개처럼 희미한 선으로 수평선을 그린다. 이곳의 와인은 미네랄의 청량감과 부드러운 산미로 유명하다. 점토질 토양과 높은 습도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짠맛의 균형, 감귤과 흰 복숭아의 상큼한 향, 뒤이어 스치는 허브와 석회질의 여운이 인상적이다.

다음 날 아침, 애들레이드로 향하기 전 헌터 밸리 가든(Hunter Valley Gardens)에 들렀다. 말하자면 와이너리의 정원을 닮은 하이브리드 공간이다. 지역 사업가 빌 로치(Bill Roche)와 그의 아내 이멜다(Imelda)가 1999년 시작해 2003년 10월 문을 열었고, 4년 동안 약 40명의 조경가와 정원사가 힘을 더했다. 14㏊(약 60ac)에 달하는 부지에는 장미 정원, 이탈리아식 정원, 동양식 정원 등 테마를 가진 10개의 정원이 자리하고 있다. 6,000그루의 나무와 60만 그루의 관목, 100만 그루 이상의 식물이 계절의 색을 따라 조화를 이룬다.

헌터 밸리 가든

입구를 지나 걷기 시작하자 분수의 물소리가 바람에 섞여 들려오고, 1월의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정원들의 테마를 즐기며 이어지는 길을 걷다보니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잊었다. 정원 안에는 숙소도 마련되어 있다. 머큐어 리조트 헌터 밸리 가든(Mercure Resort Hunter Valley Gardens)과 해리건스 아이리시 펍 & 어코모데이션(Harrigan’s Irish Pub & Accommodation) 두 곳을 합치면 120여 개의 객실이 있다.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하룻밤 머물며 정원을 산책하고, 와인을 마시고, 잠든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보니 웨딩 장소로도 자주 선택된다.

헌터 밸리 가든을 나와 애들레이드로 향하는 길, 헌터 밸리가 왜 호주에서 가장 사랑받는 와인 산지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애들레이드로 향하는 국내선은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남호주의 주도인 애들레이드를 중심으로 바로사(Barossa), 맥라렌 베일(MaLaren Vale), 쿠나와라(Coonawarra) 같은 전설적인 와인 산지들이 동심원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다. 흥미로운 건 헌터 밸리와 애들레이드 지역의 와이너리들은 180도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헌터 밸리가 도전적인 기후 속에서 절제와 우아함을 빚어낸다면, 애들레이드 주변의 산지들은 풍요로운 조건 속에서 대담함과 다양성을 실험한다. 같은 호주 와인이지만, 마치 서로 다른 나라의 와인을 마시는 듯한 차이가 있다.

바로사의 쉬라즈(Shiraz)는 농밀하고 깊은 레이어를 지녔으며, 맥라렌 베일의 와인은 바닷바람이 더해져 산뜻하고 우아한 향으로 빛난다. 남쪽의 쿠나와라는 붉은 테라 로사(Terra rossa) 토양 위에서 세계적인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을 만들어낸다.

바로사 밸리 와이너리

애들레이드 와이너리를 대표하는 바로사 밸리(Barossa Valley)는 19세기 중반 독일 이민자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지역이다. 지금도 작은 마을들을 지나다 보면 독일식 건축물과 전통 빵집(Bäckerei)이 눈에 띈다. 역사는 와인뿐 아니라 풍경 전체에 배어 있다.

대표 품종은 쉬라즈(Shiraz). 헌터 밸리의 쉬라즈가 섬세하고 후추 향이 도드라진다면, 바로사의 쉬라즈는 더 진하고 농축된 과일 풍미가 폭발한다. 건조한 기후와 풍부한 일조량, 적은 강수량 덕분에 포도가 완벽히 익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에는 150년 이상 된 올드 바인(Old Vine)이 많다. 뿌리가 깊은 포도나무는 적은 양의 포도를 맺지만, 그만큼 농도는 짙고 여운은 깊다.

호주 와인 명가 펜폴즈 와인 외관

여행의 시작은 도심에서 불과 8㎞ 떨어진 펜폴즈 매길 에스테이트(Penfolds Magill Estate)였다. 국내에서도 익숙한 그랑지(Grange)의 신화가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랑지는 호주 와인의 자존심이자, 신대륙 와인의 품격을 새로 쓴 아이콘이다. 1951년, 와인메이커 맥스 슈버트(Max Schubert)가 프랑스 보르도의 그랑크뤼(Grand Cru) 와인에서 영감을 받아 ‘호주산 프리미엄 와인’을 만들겠다는 꿈으로 시작했다. 처음엔 오크 숙성과 진한 풍미가 낯설어 혹평을 받았지만, 세월이 흘러 잠재력을 인정받으며 지금은 세계 5대 컬렉터 와인 중 하나로 꼽힌다.

펜폴즈 매길 에스테이트의 셀러는 180년의 시간이 고요히 스며 있는 공간이다. 돌벽 아래 깊은 저장고에는 각 빈티지별 그랑지 병들이 정갈히 놓여 있고, 시간의 향이 공기 속에 스며 있다. 1844년, 영국 출신 의사 크리스토퍼 펜폴즈와 그의 아내 메리가 이 언덕 위에서 첫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때만 해도 와인은 의약용 보조 음료에 불과했지만, 부부는 이 토양의 잠재력을 믿었다. 그들의 믿음은 세대를 거쳐 이어졌다. 지금의 펜폴즈는 호주 와인의 역사이자, 자부심이 되었다.

애들레이드에서 남쪽으로 40분쯤 달리면, 바닷바람이 포도밭을 스치고 해풍이 잎사귀를 흔든다. 바람의 끝자락에 맥라렌 베일의 와이너리가 펼쳐진다. 이곳의 와인은 바로사 밸리보다 한결 우아하고 섬세하다.

다렌버그 큐브

그 중에서 다렌버그 와이너리(d’Arenberg Winery)를 들렀다. 1912년 오스본 가문이 설립한 이 와이너리는 현재 4대째인 체스터 오스본(Chester Osborn)이 운영하고 있다. 언덕 위에 세워진 유리 건축물 다렌버그 큐브(d’Arenberg Cube)는 이곳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다. 와인 양조의 복잡성과 창의성을 형상화한 5층 건물로, 외관은 루빅스 큐브를 닮았고 내부는 미로처럼 구성되어 있다.

지하층에는 예술 갤러리 얼터네이트 리얼리티즈 뮤지엄(Alternate Realities Museum), 상층부에는 와인 테이스팅룸과 레스토랑이 자리한다. 잔을 들고 향을 맡으면 체리와 허브 향 너머로 바다의 염기가 희미하게 스친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와인을 마신다는 건 결국 믿음의 문제니까.

쿠나와라 와인 지역의 시골마을 페놀라

호주 와인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 쿠나와라(Coonawarra)는 훨씬 남쪽에 있다. 애들레이드에서 남동쪽으로 네다섯 시간을 달려야 닿는 이곳은 붉은 테라 로사 토양으로 유명하다. 석회암층 위에 얇게 덮인 붉은 점토는 배수가 탁월하고 열을 잘 머금어 포도를 천천히, 균형있게 익힌다.

이 토양에서 자란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은 짙은 루비색을 띠며 블랙커런트, 자두, 카카오, 민트의 향을 품는다. 입안에서는 단단한 탄닌이 중심을 잡지만, 끝으로 갈수록 부드럽게 풀린다. 포도밭 사이를 스치는 유칼립투스 향이 와인 속에서도 은은히 배어 있다고들 말하는데, 그것이 쿠나와라 카베르네만의 시그니처다.

윈즈 쿠나와라 에스테이트

쿠나와라의 중심 마을인 페놀라(Penola)에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와이너리들이 밀집해 있다. 그 중에서도 윈즈 쿠나와라 에스테이트(Wynns Coonawarra Estate)는 지역의 역사와 품격을 상징하는 와이너리다. 1891년, 스코틀랜드 출신 개척자 존 리도크(John Riddoch)가 이곳의 붉은 토양에 포도나무를 심으며 시작되었다.
이후 1951년, 멜버른의 와인 상인 사무엘 윈(Samuel Wynn) 부자가 인수해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세월이 흐르며 이곳은 쿠나와라를 호주 카베르네 소비뇽의 고향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주역이 되었다. 특히 존 리도크 카베르네 소비뇽(John Riddoch Cabernet Sauvignon)은 호주 프리미엄 레드 와인의 상징으로, 세월이 숙성시킨 테라 로사의 힘을 가장 순수하게 보여준다.

펜리 에스테이트

반면 펜리 에스테이트(Penley Estate)는 쿠나와라의 전통에 현대적 감각을 더한 와이너리다. 1988년, 톨리(Tolley) 가문이 세운 비교적 젊은 와이너리지만, 펜폴즈와 같은 혈통을 잇는 와인 명문가의 계보를 가지고 있다. 지금은 여성 와인메이커 케이트 굿먼(Kate Goodman)이 이끌며, 유기농 방식과 미세 발효 기법으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대표 와인 톨머 카베르네 소비뇽(Tolmer Cabernet Sauvignon)은 지역 특유의 짙은 과실미와 부드러운 질감으로 유명하다.

쿠나와라의 와이너리들은 이렇게 서로 다른 세대와 철학이 한데 모여 있다. 오래된 벽돌 셀러와 신식 스테인리스 양조 탱크, 전통의 깊이와 실험의 자유가 공존하는 곳. 남쪽 끝의 이 조용한 마을에서 호주 와인의 현재와 미래가 나란히 익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남아 벨웨더 와이너리(Bellwether Winery)에 들렀다. 현지 와인메이커 수 벨(Sue Bell)이 이끌고 있으며, 양모 창고였던 오래된 석조 건물을 개조해 만든 와이너리다. 자연 속에서 전통 양조 방식을 고수하는 벨웨더의 와인은 흙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셀러 도어 옆에는 채소밭과 캠핑장이 함께 있어 쏟아지는 별빛 아래에서 호주 와인 여행을 마무리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포도

포도나무는 뿌리를 깊이 내리고 빗물과 햇살을 머금은 후, 시간이 지나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를 따서 으깨고, 발효시키고, 숙성시키면 몇 해 뒤 한 병의 와인이 된다. 결국 와인은 흙에서 시작되어 흙으로 돌아간다.

포도밭 사이를 걷던 오후의 햇살, 헌터 밸리 가든의 분수 소리, 와인잔을 기울이며 나눴던 대화들, 그리고 이 낯선 땅의 흙과 하늘. 계절의 반대편에서 보낸 그 시간들은 와인처럼 천천히 숙성되어 언젠가 다시 꺼내어도 깊은 여운으로 남을 것이다.

대한항공 뉴스룸 콘텐츠 활용 시, '대한항공 뉴스룸' 출처를 표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대한항공 뉴스룸의 모든 콘텐츠에 사용된 이미지/ 영상물의 2차 가공 및 배포는 허용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