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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서랍속여행기억] 품격의 도시_ 보스턴
2026.09.29 링크주소 복사 버튼 이미지 페이스북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카카오톡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X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링크드인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인쇄하기 버튼 이미지

보스턴에는 특유의 억양이 있다. 단어 끝의 ‘r’을 슬며시 흘려버리는 나른한 말투인데,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면 십중팔구 보스턴에서 왔다고 보면 된다. 영국이 ‘r’을 우아하게 삼키는 쪽이라면, 보스턴은 은근히 흘려버린다. 영국 억양과 비슷한 듯 하면서도 분명히 다른, 보스턴만의 말투다.

보스턴은 매사추세츠주의 주도이자, 미국 북동부 여섯 개 주를 아우르는 뉴 잉글랜드(New England)에서 가장 큰 도시다. ‘뉴 잉글랜드’는 매사추세츠와 메인, 뉴햄프셔, 버몬트,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을 한데 묶어 부르는 지역 이름이다. 영국을 떠나 대서양을 건너온 사람들은 새로 도착한 땅에 뉴 잉글랜드라는 이름을 붙였고, 도시의 이름은 영국 링컨셔의 보스턴에서 가져왔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도 고향의 이름까지 버리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보스턴을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걷는 것이다. 보스턴의 거리는 지루할 틈이 없다. 몇 블록을 지나치는 동안 공원과 광장이, 서점과 오래된 건물이, 처음 보는 동네가 나타난다.

보스턴

보스턴은 미국의 대도시 가운데서도 걷기 좋은 도시로 꼽힌다. 길과 도로가 자동차를 중심으로 넓게 뻗어 나간 다른 미국 대도시와는 달리,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답게 유럽의 옛 도시처럼 길들이 좁고 촘촘하게 얽혀 있고, 오래된 건물과 공원, 서점과 식당들도 대개 걸어서 닿는 거리에 모여있다. 거리가 멀면 보스턴 사람들이 ‘T’라 부르는 대중교통을 타면 된다. 걷다가 T를 타고, 다시 내려 걷는 것. 이게 보스턴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다.

보스턴의 가을은 조금 더 특별하다. 거리가 단풍으로 물드는 것은 물론이고, 흥겨운 축제와 행사가 이 계절에 몰려 있다. 찰스강에서 펼쳐지는 세계적인 조정 대회 헤드 오브 더 찰스 레가타(Head of the Charles Regatta), 백 명이 넘는 지역 예술가들이 작업실을 열어 전시와 공연은 물론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보여 주는 포트포인트 오픈 스튜디오(Fort Point Open Studios), 40년 넘게 이어져 온 맥주 축제 하버드 스퀘어 옥토버페스트(Harvard Square Oktoberfest). 이 모두가 가을이 시작되는 10월에 열린다.

어느 10월 가을에 걸었던 보스턴의 거리들을 하나씩 다시 꺼내 본다.

에이콘 스트리트

비컨힐(Beacon Hill)은 보스턴에서도 가장 오래된 동네 가운데 하나다. 언덕을 따라 붉은 벽돌집이 들어서 있고, 좁은 골목마다 보이는 가스등과 자갈길은 옛 모습 그대로다. 비컨힐의 한복판에 에이콘 스트리트(Acorn Street)가 있다. 이 골목은 보스턴을 대표하는 거리이자, 미국에서 가장 사진이 많이 찍히는 거리로 꼽힌다. 1820년대에 조성된 에이콘 스트리트는 지금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주거 골목이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 사이로 장을 보고 돌아오는 주민이 지나가고, 현관문 앞에는 우편물과 화분이 놓여 있다.

비컨힐, 에이콘 스트리트

거리는 생각보다 짧다. 울퉁불퉁한 자갈길 양옆으로 19세기 연립주택이 늘어서 있고, 담쟁이 넝쿨이 짙은 색의 벽을 타고 오른다. 이 거리는 한때 ‘키친 스트리트(Kitchen Street)’라고 불렸다. 인근 대저택에서 일하던 요리사와 마부들이 주로 살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보스턴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로 소개되지만, 서민들의 삶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에이콘 스트리트를 빠져나와 언덕을 걸어 내려가면 보스턴 커먼(Boston Common)과 보스턴 퍼블릭 가든(Boston Public Garden)이 나온다. 두 공원의 나뭇잎이 노랏고 붉게 물들 무렵이면, 비컨힐의 벽돌집 창문에도 어느새 계절이 내려앉는다.

퍼블릭가든

보스턴 커먼은 1634년에 조성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 공원이다. 잔디밭을 가로지르면 바로 옆의 퍼블릭 가든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도록 열어 둔 커먼과 달리, 19세기에 문을 연 퍼블릭 가든은 처음부터 산책하고 감상하기 위해 가꾼 정원이었다. 구불구불한 산책로와 연못, 조각상과 오래된 나무 사이에서 두 공원이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비컨힐에 간다면 꼭 들러야 하는 곳이 있다. 보스턴 커먼에서 스쿨 스트리트(School Street) 쪽으로 조금만 더 걸으면 보이는 파커 하우스(Parker House, 현대 Omni Parker House)다. 파커 하우스는 한때 에머슨과 롱펠로, 호손, 찰스 디킨스 같은 작가들이 즐겨 모이든 문학 살롱이었고, 훗날 존 F.케네디가 재클린에게 청혼한 곳이기도 하다.
1855년에 문을 연 미국에서 가장 오래 영업해 온 호텔 가운데 하나인데, 보스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보스턴 크림 파이(Boston Cream Pie)가 1856년 이곳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이름은 파이지만, 부드러운 커스터드 크림을 사이에 넣고 얇은 초콜릿을 덮은 케이크다. 초콜릿이 아직 귀하던 시절, 얇게 덮은 한 겹만으로 사치스러운 느낌을 내려 했다는 이 케이크는 지금도 호텔의 대표 메뉴이자, 매사추세츠주를 대표하는 공식 디저트다.

사우스 엔드

보스턴에서 가장 영국스러운 동네를 뽑으라면 사우스 엔드(South End)다. 이곳은 원래 보스턴 남쪽의 습지였는데, 비컨힐이 좁아지자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1830년대부터 땅을 메워 만든 동네다. 처음에는 성장하는 중산층을 위한 격자형 주택가로 설계되었고, 반듯한 거리를 따라 연립주택이 줄지어 들어섰다. 20세기 중반 한때 쇠락했다가, 예술가와 젊은 전문직 사람들이 낡은 집들을 고쳐 살며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보스턴에서도 손꼽히게 세련된 곳이 되었다.

보스턴 사우스 엔드 전경

트레몬트 스트리트(Tremont Street)와 쇼무트 애비뉴(Shawmut Avenue)를 따라 벽돌 색의 빅토리아풍 연립 주택들이 이어지는데, 미국에 온전히 남아 있는 빅토리아풍 주택가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꼽힌다. 낡은 건물 안에는 지금도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다. 집 앞의 작은 계단과 철제 난간에 화분이 놓여 있고, 창문에는 저마다 다른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보스턴 미식의 무게 중심마저 오래된 노스 엔드에서 이 동네 쪽으로 옮겨오고 있어서, 유명 셰프들도 새로운 레스토랑을 사우스 엔드에 여는 추세다. 보스턴에 미슐랭 가이드가 처음 들어온 것은 2025년인데, 그해 보스턴에서 유일하게 별을 받은 레스토랑 오마카세(311 Omakase)가 바로 이 사우스 엔드에 있다.

이스트 보스턴

보스턴 항구

이스트 보스턴(East Boston)은 다운타운에서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다. 원래 보스턴 항구에 흩어져 있던 다섯 개의 섬이었지만, 19세기에 섬과 섬 사이를 메워 하나의 반도로 이어 붙이면서 지금의 이스트 보스턴이 만들어졌다. 1840년대 대기근을 피해 온 아일랜드 사람들과 뒤이은 이탈리아, 러시아, 포르투갈 이민자들이 이 좁은 반도에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 현지 사람들은 이 동네를 짧게 ‘이스티(Eastie)’라 부르기도 한다.

ICA 워터셰드

10년 전만 해도 이스트 보스턴은 관심 밖의 동네였지만, 지난 5년 사이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고, 바다 가까이 살고 싶어 하는 젊은 전문직들이 스며들면서 동네가 달라지고 있다. 변화의 중심은 매버릭 스퀘어(Maverick Square)와 제프리스 포인트(Jeffries Point)다. 새 식당들이 하나둘 문을 열며 걷고 싶은 거리로 바뀌었고, 제프리스 포인트 서쪽 워터 프런트에는 다운타운 전망을 앞세운 고급 주거 건물이 최근 몇 년 새 들어서면서 밀레니얼 세대가 몰려들고 있다. 현대미술과 ICA의 분관인 ICA 워터셰드(ICA Watershed)도 옛 조선소 부지에 자리를 잡아, 시포트와 다운타운을 잇는 페리와 함께 새로운 볼거리가 되었다.

피어스 파크(Piers Park)의 잔디밭 끝에는 항구를 향해 길게 뻗은 산책로가 있다. 물 건너로 고층 빌딩과 항구의 크레인, 오래된 교회의 첨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워터프런트에서 언덕 쪽으로 걸어 올라가면 이글 힐(Eagle Hill)이 나온다. 이스트 보스턴에서 가장 걷기 좋은 거리들이 이 언덕에 모여 있다. 1830년대부터 19세기 말까지 지어진 목조 주택들이 좁은 언덕길을 따라 촘촘히 늘어서 있는데, 그리스 부흥 양식과 이탈리아풍, 세컨드 엠파이어 양식의 집들이 뒤섞여 한 골목 안에서도 시대가 겹쳐 보인다.

로슬린데일 빌리지

보스턴 사람들의 평범한 토요일을 볼 수 있는 동네는 도시 남서쪽의 로슬린데일(Roslindale Village)이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농지가 많던 지역이었는데, 철도와 전차가 드러오면서 주거지가 생겨났다. 그 무렵 사람들은 이 동네를 보스턴의 ‘가든 서버브(garden suburb)’, 즉 정원같은 교외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저층 주택과 작은 상점이 모여 있는 조용한 동네이고, 현지 사람들은 애정을 담아 짧게 ‘로지(Rozzie)’라 부른다.

로슬린데일 빌리지 파머스 마켓

동네의 중심은 애덤스 파크(Adams Park)다. 그 주위를 로슬린데일 빌리지의 상점과 카페가 둘러싸고 있다. 토요일 아침이면 공원에서 로슬린데일 빌리지 파머스 마켓(Roslindale Village Farmers Market)이 열린다. 무심코 지나칠 법한 동네 장터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30년 넘게 이어져 온 보스턴에서 가장 이름난 동네 파머스 마켓이다.

서른 개 정도의 천막 아래 각 농부와 장인이 나와있고, 매주 3,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다녀간다. 농부들이 가져온 사과와 호박, 메이플 시럽, 빵과 치즈가 놓이고, 한쪽에서는 라이브 음악과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열린다. 아이들은 잔디밭에서 뛰어다니고, 사람들은 장을 보다가 걸음을 멈추고 이야기를 나눈다.

버치 스트리트 플라자(Birch Street Plaza) 주변에는 식물과 생활용품을 파는 가게, 독특한 선물과 장식품을 모아놓은 숍, 동네 카페이자 공연 공간이 더 스퀘어 루트(The Square Root)같은 작은 공간이 모여 있다. 이곳에는 오래된 빵집인 포낙스 브레드 컴퍼니(Fornax Bread Company)는 여러 주민이 입을 모아 추천하는 곳인데, 로마 신화 속 화덕의 여신 ‘포르낙스’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아놀드 수목원 피터스 힐에서 바라본 보스턴 스카이라인

로슬린데일 북쪽은 아놀드 수목원의 피터스 힐(Peters Hill)과 맞닿아 있다. 하버드대학교가 운영하는 281에이커 규모의 수목원으로, 피터스 힐 정상에 오르면 붉은 단풍과 상록수 너머로 보스턴의 스카이라인이 작게 보인다. 고층 빌딩을 배경으로 한 보스턴이 궁금하다면 다운타운으로 가면 되고, 숲을 배경으로 한 보스턴이 궁금하다면 이곳으로 오면 된다. 번화한 도심의 화려함보다 나무와 계절, 오래된 단골 가게가 있는 조용한 일상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동네다.

가장 보스턴다워지는 계절

보스턴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시작된 곳이라는 자부심이 도시 곳곳에 배어 있다. 독립의 첫 목소리가 터져 나온 거리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들이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모여 있다. 보스턴 사람들은 그 오래됨을 낡음이 아니라 품격으로 여긴다.

찰스강 너머로 보이는 보스턴 스카이라인

보스턴이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워지는 때가 가을이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미국 사람들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단풍을 보러 보스턴을 찾는다. 여름의 열기가 가시고 공기가 서늘해지면, 붉은 벽돌 건물과 노랗게 물든 가로수, 낮게 깔리는 오후의 햇빛이 어우러져 도시 전체가 한 장의 사진처럼 보인다. 보스턴이 가장 보스턴다워지는 계절이다.

폴라로이드처럼 빛이 바래도 오래 기억에 남을, 가을의 보스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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