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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서랍속여행기억] 잃어버린 것들을 되돌려 받는 시간_ 하와이 카우아이
2025.02.25 링크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수정 내 서랍 속 여행 기억 카우아이

글쟁이 부부가 신혼여행지로 하와이 카우아이를 고른 건 그저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사람들이 적어서” 때로는 단순한 선택이 인생에서 가장 현명한 결정이 되기도 한다. 파리의 작은 골목을 걸을 수도 있었지만, 결국 우리는 조용한 곳을 선택했다. 그렇게 작가 부부의 허니문은 시작되었다.

카우아이는 하와이 제도에서 유일하게 대형 리조트 건설을 법적으로 제한하는 섬이라 97%가 아직 개발되지 않고 남아 있어, 하와이 제도 중에서도 가장 ‘야생적’이고 ‘원시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이 섬에 머무는 동안 고요함, 자연의 경이로움, 그리고 느림의 미학과 같은 우리가 일상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되돌려 받는 기분이 들었다.

카우아이의 한 폭포

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하와이 제도에서 가장 오래된 섬, 카우아이는 그 지질학적 연대가 약 5백만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구에서 가장 비가 많이 내리는 곳 중 하나이기도 한 카우아이는 연간 460인치에 달하는 비가 만들어 내는 와이알레알레 산의 울창한 열대 우림과 깎아지른 듯한 나팔리 해안(Napali Coast)의 절벽 등 원시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미국 문학의 아버지라는 마크 트웨인은 이곳을 “태평양의 대정원”이라 칭했는데, 실제로 카우아이의 별명이 ‘가든 아일(Garden Isle)’이기도 하다.

카우아이는 폴리네시아 탐험가들이 먼 바다를 가로질러 도착한 초기 정착지 중 하나였고, 1778년 제임스 쿡 선장이 이끄는 유럽 항해가 하와이 군도를 발견했을 때 처음 발을 디딘 하와이 땅도 카우아이의 와이메아 해안(Waimea Coast)이었다고 한다. 한때는 카우아이 왕국으로 독립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고,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이민 근대사를 거치며 하와이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제공했다. 이후 하와이 문화와 서구 문화가 독특하게 섞여 들어가며 하와이 역사의 한 줄 한 줄을 품고 있다 할 수 있다.
실제로 카우아이에는 일본계, 필리핀계, 포르투갈계 주민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가 섞여 만들어낸 독특한 정서는 음식에서도, 말투에서도 느껴졌다. 조용한 해변 마을이나 오래된 목재 건물들, 그리고 오랜 전통을 지켜온 가정식 로컬 식당에 이르기까지, 섬은 과거와 현재를 간직하고 있다.

카우아이의 해안가

우리는 나팔리 해안과 와이메아 캐년, 하날레이 비치 등 카우아이의 아이코닉한 자연들 중심으로 여행 여정을 꾸렸다. 그리고 현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농부의 시장과 로컬 레스토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영화, 드라마에서 봤던 거기. 바로 그곳.

영화를 좀 봤다면 카우아이의 지형과 풍광 속에서 낯익은 데자뷰를 느낄지도 모른다. 나팔리 해안의 절벽과 마나와이오푸나 폭포(Manawaiopuna Falls)는 ‘쥬라기 공원’의 촬영지였고, ‘캐리비안의 해적들’, ‘아바타’를 비롯해 드라마 ‘로스트’의 신비로운 장면들도 이 섬에서 촬영되었다. 그래서 렌터카를 몰고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돌다 보면, 스크린으로만 익히 보던 풍경이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진다. 지도를 펼쳐놓고 좌표를 찍기보다는, 낯익은 듯한 풍경 속을 천천히 탐험하다 문득 “아, 여기가 바로 그곳이구나”하고 깨닫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헬리콥터에서 내려다 본 나팔리 해안
헬리콥터에서 내려다 본 나팔리 해안

카우아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나팔리 해안과 와이메아 캐년(Waimea Canyon)은 헬리콥터를 타고 봐야 제대로다. 정말 진심으로 추천한다. 하늘로 올라가서 5분이 지나니 왜 카우아이가 세계 최고의 헬리콥터 투어 여행지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라 무지개가 자주 뜨는데 우리가 작은 빗방울 사이를 지나며 하늘에 올라갔을 때도 사방에 무지개가 펼쳐졌고, 눈 깜짝할 사이에 협곡 깊은 곳까지 내려가 쥬라기 공원에 등장했던 폭포 너머로 비행했다.

카우아이 나팔리 해안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라는 나팔리 해안은 카우아이 섬 북서쪽, 햇살이 비추는 바다와 수직 절벽이 맞닿은 약 27㎞ 구간이다. ‘나팔리(Na Pali)’는 하와이어로 ‘높은 절벽’을 의미하는데 사진 한 장에 담아낼 수 없는 장엄함과 원시적 신비감을 간직한 태고의 시간이 농축되어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녹색 능선은 깃털을 겹겹이 접어놓은 듯 완만하면서도 날카롭게 이어진다.
나팔리 해안이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하와이 원주민의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몸을 싣고 별과 해류를 이정표 삼아 폴리네시아에서 이주해온 하와이 원주민들은 이 험준한 땅을 경작지로 바꾸고, 계단식 밭에서 타로(Taro)를 키우며, 바다에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카우아이 나팔리 해안의 능선

동시에 이곳은 평범한 삶의 터전이자 ‘카푸(Kapu)’로 상징되는 성스러운 영역이기도 했다. 그들은 절벽 아래 깊은 곳에는 조상들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고, 계곡 한가운데는 신들의 발자취가 머문다고 믿었다. 그래서 해안선 곳곳에는 성스러운 지역들이 남아있고, 절벽 아래 아득히 먼 계곡에는 조상들의 발자취가 깃들어 있다고 전해진다. 헬리콥터 투어에 올라 창문 너머로 이어지는 절벽과 바다가 하나되는 장면을 바라보니, 수많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왜 여기서 촬영되었는지 바로 이해되었다.

와이메아 캐년은 ‘태평양의 그랜드 캐년’으로 불리는데, 실제로 보니 그런 비교가 무색할 만큼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카우아이 섬이 오래 전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이후, 오랜 시간 침식과 풍화 작용을 거치며 현재의 협곡이 완성되었다. 붉은 협곡이 만들어내는 묵직한 장관은 태초부터 이어진 자연의 시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해줬다. 수백만 년 전 와이메아 강이 침식 작용을 하며 깎아내린 이 협곡은 약 16㎞에 걸쳐 깊숙이 파인 계곡과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대 깊이가 약 900m(3,000ft)에 달할 정도로 웅장하며, 붉은색·갈색·초록색이 층층이 겹치는 지질 구조가 드라마틱한 대비를 이룬다.

태평양의 그랜드 캐년 와이메아 캐년
와이메아 캐년

‘와이메아(Waimea)’라는 이름은 하와이어로 ‘붉은 물’을 뜻하는데, 이는 협곡의 붉은 토양에서 물이 흘러나올 때 빚어지는 고유한 빛깔에 기인한다. 붉은 암석은 대지의 여신 펠레를 상징하기 때문에 하와이 원주민들의 우주관과 깊은 연관이 있는 성스러운 장소이기도 하다. 일몰 시간이 되면 협곡에 걸쳐 드리우는 색감이 유독 선명해져서, 헬리콥터 투어를 하면서 내려다본 협곡의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참고로 와이메아 캐년을 좀 더 가까이 체험하고 싶다면 협곡 아래로 직접 내려가 폭포나 계곡을 탐험할 수 있는 트레일도 도전해볼 만하다.

카우아이 북부에 위치한 하날레이 베이
하날레이 베이

카우아이에는 하와이 다른 어떤 섬보다 해변도 많다. 그리고 똑같은 바다임에도 그 표정들이 천차만별이다. 섬의 북부에 위치한 하날레이 베이(Hanalei Bay)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선정한 세계 최고의 해변 중 하나다. 에메랄드빛 산들로 둘러싸인 초승달 모양이다. 페이스북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도 이 일대 700에이커의 땅을 매입했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하날레이 베이라는 단편 소설을 쓸 만큼 이곳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날레이 비치에서의 시간은 특별했다. 에메랄드빛 산들이 반원을 그리며 둘러싼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아, 클래식 영화 ‘사우스 퍼시픽’이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된 것도 당연해 보였다. 해변을 거닐며 본 하날레이의 풍경은 시시각각 달랐다. 아침에는 안개가 산을 감싸고, 낮에는 크리스털처럼 투명한 물빛이 빛나다가, 저녁이 되면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또다른 해변 포이푸 비치(Poipu Beach)는 섬의 남부에 있었는데 파도가 높지 않고 잔잔하며, 해변 주변에 맛집과 상점들도 많아서인지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많았다. 포이푸 비치는 브레넥키 비치(Brennecke Beach)와 베이비 비치(Baby Beach)라는 2개의 또 다른 작은 해변들과 이어져 있었는데 해변가에 누워 책을 읽으며 느긋하게 하와이 햇살을 만끽하기 좋았다.

오래된 로컬 다이닝 스팟들

우리는 주로 로컬 레스토랑을 찾았다. 하무라 사이민(Hamura Saimin)은 카우아이의 중심지 리후에(Līhu‘e)에 위치한 소박한 국숫집인데, 현지인들도 즐겨 찾는 맛집이었다. 1950년대부터 영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낡은 벤치와 테이블에 마주 앉아 맛을 보는 순간, ‘여기가 정말 로컬 맛집’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사이민은 하와이 전통 국수로 하와이의 여러 이민자들의 문화가 섞여 탄생한 독특한 요리다. 얇은 밀가루 면과 가벼운 국물, 그리고 파·차슈·어묵 등 고명이 올라가 있었는데, 한마디로 하와이 로컬 식문화가 녹아 있는 ‘하와이판 라면’ 혹은 ‘퓨전 우동’ 같은 느낌이라 생각하면 된다. 우리가 먹은 시그니처 메뉴는 오리지널 사이민(Original Saimin)으로 국물은 담백하지만 감칠맛이 살아 있었다.

더위를 식혀주는 쉐이브 아이스
더위를 식혀주는 쉐이브 아이스
하와이 대표 디저트 쉐이브 아이스

하와이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대표 디저트, 쉐이브 아이스(Shave Ice)도 먹어봤다. 얇게 ‘갈아진(Shaved)’ 얼음 위에 달콤한 시럽을 뿌려 먹는 빙수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일본계 이민자들이 무더운 날씨를 식히기 위해 즐겨 먹은 카키고리(かき氷, 얇게 간 얼음 디저트)가 하와이 현지 문화와 결합해 ‘쉐이브 아이스’로 발전했다고 한다. 파인애플과 코코넛 시럽이 녹아드는 얼음 결정 사이로 어린아이처럼 혀끝을 놀리다 보면, 더위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하날레이(Hanalei)에 있는 바 아쿠다(Bar Acuda)는 타파스(Tapas) 레스토랑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카우아이 대표 맛집으로 현지의 신선한 재료만 고집해서 요리한다. 바삭한 빵과 함께 꿀벌집(허니콤)을 올린 치즈 요리인 구운 염소 치즈 & 허니콤(Goat Cheese & Honeycomb)이 기억에 남을 만큼 맛있었고 타파스와 페어링하기 좋은 와인과 칵테일까지 추천해줘서 미슐랭 레스토랑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하와이 특유의 맛집 느낌은 제대로 경험할 수 있었다.

리틀 피쉬 커피의 외관과 대표메뉴를 주문한 사진

아침 식사는 대부분 리틀 피쉬 커피(Little Fish Coffee)에서 했다. 포이푸(Poipu)와 하나페페(Hanapepe) 등 곳곳에 매장들이 있었는데 신선한 원두로 내린 커피와 함께 맛있는 브런치 메뉴들을 먹을 수 있는 아담하지만 매력 넘치는 카페였다. 여기는 현지 농장에서 재배한 코나(Kona) 혹은 카우(Kau) 원두를 드립하거나 에스프레소로 추출한 하와이안 스타일 커피(Hawaiian Coffee)와 하와이 브런치 대표 메뉴이자, 리틀 피쉬 커피에서도 인기 있는 아사이 보울(Açaí Bowl)이 유명하다고 해서 자주 주문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선정한 세계 최고의 해변 하날레이 비치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선정한 세계 최고의 해변 하날레이 비치

카우아이에서의 마지막 날, “사람들이 적어서”라는 단순한 선택이,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서로를 칭찬했다. 개발되지 않은 자연이 주는 고요함, 옛 하와이의 숨결이 남아있는 작은 식당들, 그리고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풍경들까지. 우리는 여기서 진짜 여행을 경험했다. 마치 오래된 여행 사진첩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해질 그런 기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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