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째 이 곳을 찾고 있다. 이태원과 해방촌 사이, 조금은 비좁은 골목에 자리한 이 베트남 식당은 내 단골집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코를 찌르는 것은 고수, 타이 바질, 민트 같은 신선한 허브의 향이다. 거기에 훈제 고기의 스모키한 향과 은은한 단맛이 더해진 베트남 특유의 국물 냄새가 공기 속에 가득 차 있다.
뜨겁게 김이 나는 쌀국수 한 그릇으로 시작하는 식사를 일종의 의식처럼 먹는다. 몇 시간 동안 뼈와 향신료를 넣어 끓여 살짝 달콤하지만 깊고 진한 고기 육수를 한숟갈 입에 넣은 후,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듯한 부드러운 쇠고기를 먹고, 아삭하게 씹히는 신선한 허브와 숙주를 마지막으로 먹는다.
처음부터 베트남 음식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갑자기 백수가 된 나를 위로하기 위해 친구가 베트남 여행을 제안했고, 그렇게 갑자기 떠났던 베트남 푸꾸옥 여행.
2주 남짓한 여행 기간 동안 맡았던 냄새들이 후각에 각인되었는지, 그 여행 이후 베트남 음식을 찾게 됐다. 인간의 후각은 모든 감각의 근본이어서, 냄새를 바탕 삼아 세월이 흐른 후에도 기억에 남는다. 프루스트 현상(The Proust Effect) 또는 마들렌 효과라 부르는 그것을 직접 경험한 셈이다. 그래서 오래도록 기억나는 여행은 흔히 의식을 하든 안하든, 강렬한 냄새를 동반한다. 여행이 음식의 형태로 남기도 하는 이유다. 풍경보다 음식이, 아니 냄새가 더 길게 기억에 남는다. 냄새의 압축률은 이미지를 압도한다. 냄새가 함께할 때 풍경은 가장 심오한 의미의 정경이 된다.
특히 현지인들과 관광객들로 붐볐던 푸꾸옥 야시장(Duong Dong Night Market)에서 먹었던 분켄(Bún Kèn)의 냄새와 맛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베트남 다른 곳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푸꾸옥의 쌀국수 분켄은 말린 생선 육수에 코코넛 밀크, 카레 가루를 넣고 끓인 후 얇은 국수와 바질, 고수, 숙주, 생파파야 등과 피시 소스를 곁들여 먹는 쌀국수다.
“베트남 전역에서 가장 좋은 피시 소스는 푸꾸옥에서 나온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유명한 푸꾸옥 피시 소스가 더해져 잊을 수 없는 맛이다.
황금 빛깔 베트남
베트남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황금빛이 떠오른다. 황금빛은 베트남 요리의 본질도 잘 담아낸다. 갓 구운 바삭한 빵으로 만든 반미(banh mi)의 황금빛 껍질, 반투명한 라이스페이퍼로 감싸인 섬세한 스프링롤도 황금빛이 비쳐 나온다. 푸꾸옥 옹랑 비치로 쏟아지던 황금빛 햇살의 따스함 때문인지, 해안선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던 호국사에서 본 일출이 아름다웠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베트남 북부에서 수도 하노이를 거쳐 흐르는 홍강을 따라 삼각주 지역 경사면에 구불구불한 계단식 논들이 펼쳐져있다. 이 곳이 황금빛으로 물들 때, 9월과 10월이 베트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라고 한다.
친구와 갔던 푸꾸옥은 베트남의 남쪽 끝 섬으로 베트남의 제주도라 할 수 있는데, 매시간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푸꾸옥 바다만 보다가 돌아와도 전혀 후회가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 햇살에 비치는 투명한 산호색 에메랄드 빛 바다를 볼 수 있고, 저녁이 되면 노을에 붉게 물들어 하늘과 맞닿은 바다로 변한다. 그리고 밤이 되면 도시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별빛에 반짝이는 깊고 어두운 바다가 된다.
사실 푸꾸옥에는 아름답지만 슬픈 비장미가 있다. 한때 캄보디아의 섬이기도 했던 푸꾸옥에는 순탄하지 않은 역사가 푸꾸옥 감옥을 비롯해 군데군데 남아있다. 고대에는 참파 왕국(Champa Kingdom)의 섬이었고, 이 후 캄보디아 크메르 제국(Khmer Empire)이 섬을 장악해 캄보디아에서는 ‘코 터롤(Koh Trol)’로 불렸으며, 18세기에 들어서 베트남 응우옌 왕조(Nguyen Dynasty)가 섬을 점령하면서 지금의 베트남 푸꾸옥이 되었다.
푸꾸옥은 베트남 전쟁 기간 중 중요한 군사적 기지로 활용되었는데, 특히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베트남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많은 반군과 포로들이 수감되었고 그들이 수감되었던 푸꾸옥 감옥(Phu Quoc Prison)은 현재 박물관이 되어 푸꾸옥의 아픈 역사를 상기시켜주고 있다.
후각으로, 미각으로 남은 기억
이 작은 식당은 짧지만 즐거웠던 여행을 기억하는 장소다. 그리고 몸이 지치거나 생각이 복잡할 때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공간이다. 아마 여행에서 느꼈던 베트남 음식의 맛과 푸꾸옥의 황금빛 햇살, 그리고 파란 바다가 타임캡슐처럼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글_ 김애경 작가
미국에서 헐리우드 데뷔를 꿈꾸다 국내 유명 패션지 피처 에디터로 배우 전담 인터뷰를 도맡았다. 지금은 한적한 지방 도시 어디에서 조용히 칩거하며 커뮤니티 매니저로 제2의 인생을 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