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피스는 단연 인생 만화다. 이 위대한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은 작가 ‘오다 에이치로’의 고향은 일본 최남단 규슈 한가운데 자리한 구마모토다. 그래서일까. 원피스를 읽다 보면 곳곳의 배경이 구마모토와 겹쳐 보이는데,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불의 나라, 바다 위의 모험, 기묘한 요괴와 전설 같은 모티브들은 모두 구마모토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이 많다.
오다 에이치로의 고향 사랑은 각별하다. 2016년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구마모토를 위해 직접 나서 ‘원피스 구마모토 복원 프로젝트(ONE PIECE Kumamoto Revival Project)’를 이끌었다. 그 결과 루피를 비롯해 조로, 프랑키 등 밀짚모자 해적단 열 명의 동상이 구마모토현청, 동식물원 등 캐릭터와 어울리는 장소에 세워졌다. 지금은 전 세계 팬들이 도장깨기하듯 찾아가는 명소가 되었다.
구마모토는 원래부터 신비로운 땅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칼데라 분화구를 품은 활화산 아소산(阿蘇山, Mount Aso)은 예로부터 이 지역을 ‘불의 나라(火の国, Land of Fire)’라 불리게 했다. 화산 폭발과 용암, 온천과 지하수가 만들어낸 기묘한 풍경은 두려움과 경외를 동시에 안겨주었고, 사람들은 그 불안 속에서 산과 물의 신을 모시고 요괴들의 전설을 만들어냈다. 도깨비 이야기, 전염병을 막아준다는 인어 요괴, 장난꾸러기 물의 정령, 전쟁에 패한 사무라이들의 은둔담까지. 이 다채로운 신화와 설화가 오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마침내 전 세계인이 열광하는 거대한 모험담의 토양이 되었다.

구마모토 여행은 원피스의 영감과 무사시의 철학, 예술가들의 상상력이 깃든 땅을 걷는 성지순례였다. 인생 만화의 세계와 현실이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을 마주한 가장 특별한 여정. 그 기억을 소개해본다.
일본 3대 명성, 전설의 구마모토성
구마모토 여행은 루피 동상을 지나 올라탄 노면전차에서 시작됐다. 구마모토 시내에는 지금도 서구의 트램과 비슷한 모습의 노면전차, 구마모토 시덴(熊本市電)이 달린다.

1924년 처음 운행을 시작한 구마모토 시덴은 100년에 가까운 세월을 견디며 지금까지 시민들의 발이자 지역 교통의 상징을 맡고 있다. 현재는 두 개 노선으로 운영되며, 구마모토역 앞과 시내 중심가, 스이젠지 공원 등을 잇는다. 덜컹거리며 천천히 움직이는 전차의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구마모토 풍경은 여행의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구마모토 시덴이 데려다 준 곳은 검은 기와와 두터운 돌벽으로 지어진 구마모토성(熊本城, Kumamoto-jō)이다. 1607년에 완공되었으며, 나고야성, 오사카성과 함께 일본 3대 명성(名城)으로 꼽히고 있다. 광대한 해자와 높게 쌓아올린 성벽, 그리고 100여 동에 이르는 망루와 누각은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한다. 사실 천수각을 비롯한 대부분의 건물은 1877년 서남전쟁의 화재로 소실되었고, 지금의 천수각은 1960년에 콘크리트로 재건된 것이다. 그럼에도 성이 뿜어내는 위엄은 여전하다.

불에 타고 무너진 뒤에도 다시 세워지는 성벽. 그 불굴의 서사는 구마모토성이 지닌 가장 강렬한 이야기다. 어쩌면 오다 에이치로가 원피스 속 해적들의 모험과 난공불락의 요새 이미지를 그려낼 때, 이 성의 기억이 무의식처럼 스며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순교자들의 영혼이 깃든 사키츠 마을
원피스의 항해는 언제나 섬에서 끝난다. 그래서 원피스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다다. 그런 의미에서 크고 작은 섬 120여 개로 이루어진 아마쿠사 제도(天草諸島, Amakusa Islands)는 꼭 가볼 만한 곳이다. 구마모토 서쪽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며, 버스 투어를 이용하면 어렵지 않게 가볼 수 있다. 길은 멀지만 그 끝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보답으로 충분하다.
아마쿠사 제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단연 사키츠 마을(崎津集落, Sakitsu Village)이다.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 마을은 17세기 기독교 금지령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낸 순교자들의 공동체였다. 도쿠가와 막부의 박해 속에서 주민들은 민가와 동굴에 숨어 신앙을 이어가야 했고, 끝내 순교자가 되더라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순박한 어촌 풍경 위로 솟은 사키츠 대성당(崎津教会, Sakitsu Catholic Church)은 그 기억을 증언하듯 서 있다. 지금도 대성당에는 신자들의 예배가 이어지고, 종소리는 바다를 향해 울려 퍼진다. 그 울림 속에는 수백 년 전에도 꺾이지 않았던 자유의 의지와 믿음이 지금도 살아 있는 듯 하다.
현재 사키츠에는 약 천 명 정도의 주민이 살아간다. 멸치와 고등어, 전갱이를 잡는 어업이 여전히 마을의 생계를 지탱한다. ‘바다에서 일하고, 교회에서 기도한다.’라는 단순한 삶의 원칙이 모진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던 힘이 아니었을까.
검성의 혼이 깃든 레이간도와 톤카라린의 고대 미스터리
구마모토 하면 전설의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 Miyamoto Musashi)를 빼놓을 수 없다. 일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검객으로 꼽히는 그는 인생 말년에 구마모토에 은거지를 짓고, 불과 물, 강함과 유연함의 균형을 사유하며 마지막 세월을 보냈다. 1640년대 말, 무사시는 레이간도 동굴(霊巌洞, Reigando Cave)에 들어가 검술과 삶의 철학을 집대성한 『오륜서』를 집필했다.

석회암 지대에 숨어 있는 작은 입구를 지나면, 세상의 소음이 끊기고 고요만이 공간을 채운다. 무사시는 적막 속에서 칼을 내려놓고 사유하며 마지막 깨달음에 도달했다. 지금도 동굴 안에는 목조 불상이 놓여 있으며, 참배객들이 향을 피우고 경건히 발걸음을 멈춘다. 동굴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불교 사찰 운간젠지(雲巌禅寺)가 나오는데, 사찰 경내에는 무사시를 기리는 비석이 남아 있다. 검성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안식처이기에 오늘도 많은 이들이 찾는다.

이곳에서 차로 한참을 달리면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소, 톤카라린 터널(トンカラリン, Tonkararin Tunnel)이 모습을 드러낸다. 야마토초 깊은 산골에 자리한 이 고대의 지하 통로는 지금까지도 용도가 밝혀지지 않았다. ‘톤카라린’이라는 이름조차 아직 정확한 의미를 해석하지 못했다. 총 길이는 약 460m. 일부 구간은 사람이 서서 걸을 수 있을 만큼 높고, 내부는 직선과 곡선, 계단이 교차하며 어둠 속으로 이어진다. 학자들은 이곳이 고분시대(3~7세기)에 아리아케 해 연안을 지배했던 세력이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농업 수로나 방어 시설이라는 설도 있지만, 지나치게 정교하고 거대한 규모 때문에 종교적·의례적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터널 앞에 서면 마치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문 앞에 선 듯하다. 수천 년 전 고대인들이 남긴 메시지가 시간을 넘어 전해오는 듯 울린다. 원피스 속 고대 문명이 숨겨둔 진실, 라프텔로 향하는 마지막 길이 바로 이런 풍경일지도 모른다.
천년의 샘과 구로카와 온천의 유혹
원래 가장 소중한 것은 마지막에 남겨둔다 했던가. 아소산을 찾은 건 여행의 끝자락,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다이칸보 전망대에 올라 칼데라 전체를 바라보며 맞이한 해돋이는 장엄했다. 인간이 감히 어찌할 수 없는 크기의 대지를 마주하자,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화구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와 지평선 너머 붉게 솟는 태양이 맞닿는 순간, 원피스 속 불의 전사와 대지의 거인들이 맞붙는 장대한 전투가 눈앞에 펼쳐졌다.

아소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도 매혹적인 풍경은 이어진다.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곳은 구사센리가하마(草千里ヶ浜, Kusasenrigahama). 칼데라 안에 드넓게 펼쳐진 초원 위로 소와 말이 자유롭게 뛰노는 모습은 살아 있는 풍경화다. 분화구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와 초록빛 초원이 나란히 놓인 장면은 만화 속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아소산을 이야기할 때 온천을 빼놓을 수는 없다. 땅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온천은 이 땅이 준 또 하나의 선물이다. 오이타현의 벳푸나 유후인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아소산 자락의 산골 마을 곳곳에서도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 특히 구로카와 온천(黒川温泉, Kurokawa Onsen)은 산골 마을의 소박한 풍경과 전통 료칸, 그리고 자연 속 노천탕이 어우러져 하나의 거대한 온천 마을을 이룬다. 1980년대 이후 ‘자연과 전통을 지키는 온천지’라는 컨셉으로 입소문을 타며, 지금은 ‘일생에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온천’으로 꼽히는 명소가 됐다.
이곳의 상징은 ‘온천 마패(入湯手形, 뉴토테가타)’라 불리는 나무 패스다. 숲과 계곡, 강변에 흩어진 노천탕들이 바다 위 섬들처럼 점점이 이어져 있고, 여행자들은 이 패스를 손에 쥐고 여러 료칸의 노천탕을 차례로 돌아다닌다. 탕마다 스탬프를 찍는 경험은 원피스 속 모험가들이 항해 도중 섬마다 로그 포즈를 기록하는 장면과 겹쳐진다. 구마모토 여행의 마지막은 그렇게 모험과 휴식이 하나로 만나는 순간으로 남는다.
끝나지 않는 항해!
원피스의 항해가 끝나지 않듯, 구마모토 역시 자유와 모험이 기다리는 성지다. 일본 소도시의 매력을 알고 싶다면 주저 없이 가봐야 할 곳. 수천 년의 신화와 전설이 깃든 불의 땅을 걸으며 바람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만화와 현실이 겹치는 듯한 느낌이 들때가 있다. 불과 물, 신화와 전설이 뒤섞인 구마모토에서의 모험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