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에 꽂히면 반드시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다. 나도 그런 편이다. 왕가위 감독이 디렉팅한 미 샹 프라다 롱 자이가 상하이에서 3월에 오픈한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망설일 틈도 없이 대한항공 직항편을 구매했다. 코로나 이후 거의 5년 만의 상하이였다. 다행히 한국인 대상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고 있었고, 큰 어려움 없이 떠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양의 파리’라 불리는 도시가 그 사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미 샹에서, 롱 자이를 감상하다
호텔에서 짐을 풀 새도 없이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프랑스 조계지 한복판에 자리한 미 샹 롱 자이로 달려갔다. 예상했던 것처럼 이미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미 샹 프라다 롱 자이(Mi Shang Prada Rong Zhai)는 두 개의 독특한 공간, 롱 자이(榮宅)와 미 샹(迷上)으로 구성되어 있다. 롱 자이는 1918년에 지어진 저택이고, 미 샹은 그 내부에 왕가위 감독과 프라다가 협업해 만든 첫 번째 아시아 단독 다이닝 공간이다. 이름부터가 시적이다. ‘미 샹’은 ‘푹 빠지다’라는 뜻이고, ‘롱 자이’는 ‘영광스러운 저택’이라는 의미다.

롱 자이는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를 주름잡던 상하이 부호 영가흠(榮家琛)의 저택으로, 1918년 독일인 소유주로부터 매입해 지어졌다. 벽돌 외관, 아르데코 장식, 그리고 약 2,500㎡에 달하는 정원은 중국 전통 건축과 프랑스 고전주의가 절묘하게 얽혀 있다. 목재 계단은 중국풍의 섬세함을, 천장의 몰딩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유럽의 화려함을 뽐낸다.
프라다는 2011년부터 6년간 복원 작업을 통해 이곳을 패션쇼, 전시회, 문화 행사를 위한 프라다의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미우치아 프라다와 파트리지오 베르텔리가 주도한 복원 작업은 중국식 원목 조각, 유럽식 스테인드글라스의 디테일을 섬세하게 보존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느리게 돌아가는 천장 선풍기와 호박색 조명이 어우러진 롱 자이의 분위기는 마치 1960년대 상하이의 거리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롱 자이 저택 2층에 자리 잡은 레스토랑과 카페가 바로 왕가위 감독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직접 디렉팅한 미 샹이다. 왕가위 감독은 미 샹의 로고, 인테리어, 메뉴 플레이팅까지 자신의 색감과 몽환적인 스타일으르 불어넣었다.
미 샹은 레스토랑과 카페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다. 레스토랑의 시그니처 메뉴로는 부드러운 돼지고기에 블랙 트러플의 향이 더해져 깊은 풍미를 뽐낸다는 상하이 스타일 트러플 동파육과 게살 라비올리, 화양연화에서 영감을 받은 장미와 리치 기반의 감성 칵테일 등이 있다.
레스토랑 예약을 여러 번 시도했지만 아쉽게 실패하고 카페로 갔다. 카페는 올 데이 조식, 디저트 숍, 라운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캐주얼한 분위기 속에서도 왕가위 감독 특유의 영화적 감성이 묻어났다. 주문한 프라다 마블 케이크는 프라다의 체크 패턴을 형상화한 디저트로, 초콜릿과 바닐라의 달콤함이 잘 어우러졌다. 롱 자이 밀크티는 상하이 전통 차에 에스프레소를 더해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도시 위에 피어난 숲, 천안천수
다음 목적지는 상하이의 새로운 건축 실험이라 불리는 천안천수(1000 Trees). 이름 그대로 건물 전체에 나무가 심겨 있는 ‘수직 정원’이다. 21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불리는 영국 건축가 토마스 헤더윅이 맡았으며, 2011년부터 약 10년간의 설계와 시공 과정을 거쳐 2021년 12월 22일에 공식 오픈했다.

현대판 바빌론의 공중정원이라 불리는 천안천수는 중국 황산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되었는데, 놀랍게도 돌출 외벽에 1,000 그루가 넘는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그래서 천안천수는 도시와 자연의 경계를 허문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멀리서 보면 건물이라기보다 거대한 조각처럼 보이기도 했다. 베이징의 CCTV 본사처럼 중국 특유의 크고 과감한 조형미가 살아 있지만, 초록이 스며든 덕인지 좀 더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천안천수 내부는 복합문화공간이다. 호텔, 오피스, 갤러리, 레스토랑, 박물관, 편집숍 등이 모두 들어서 있었다. 3층의 오픈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나무와 나무 사이로 상하이의 하늘이 보여 좋았다. 어떤 공간은 ‘무엇을 하느냐’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그곳에 머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여기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천안천수에서 도시의 수직적 상상력을 마주했다면, UCCA Edge는 도심 한가운데 펼쳐진 예술의 밀도가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서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어 UCCA Edge에도 잠시 발길을 옮겼다. 이곳은 중국 현대 미술을 대표한다는 UCCA Center for Contemporary Art의 세 번째 분관이다.

베이징 798 예술구의 산업적인 분위기나 베이다이허 해안가의 자연적 환경과는 확연히 다른, 도심 한가운데 위치해 세련된 바이브가 느껴졌다. 건물 외관은 철근과 유리, 콘크리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미술관이라기보다는 실험실 같았고,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조차 작품의 일부처럼 보였다.
“예술은 삶을 깊게 하고 경계를 초월한다”는 UCCA의 철학은 UCCA Edge에서도 그대로 느껴졌다. 이곳은 중국과 해외 예술가들의 작품을 상하이 관객에 맞춰 큐레이션해 선보이며, 베이징과 상하이를 잇는 미술기관으로 그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었다. 전시뿐 아니라 디자인, 건축, 패션 등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아우르는 프로그램도 꾸준히 열려 상하이 문화씬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중이라고 한다. 전시 공간 외에도 레스토랑, 카페, 뮤지엄 숍까지 마련되어 있어 예술이 일상에 스며드는 공간이라는 UCCA의 철학이 온전히 구현되고 있었다.
와이탄, 영원한 상하이의 얼굴
저녁이 가까워지자 주저 없이 와이탄(The Bund)으로 향했다. 황푸강 양쪽으로 펼쳐진 야경의 장관을 다시 보기 위해서였다. 풍경은 5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장엄하고 화려했다.
와이탄은 상하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 눈에 담은 얼굴 같은 곳이다. 황푸강을 사이에 두고 서구의 고전 건축물과 중국의 초고층 빌딩이 서로를 마주 보는 풍경은 이 도시가 어떻게 세계와 나란히 걸어왔으며, 어디로 향하고자 하는지를 묵묵히 보여주는 것 같다.

와이탄은 19세기, 상하이에 국제 도시로 탈바꿈하던 시기에 형성됐다. 당시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이 세운 금융기관과 무역회사 건물들이 지금도 거리 양옆에 줄지어 서 있다. 1920년대 아르데코 양식의 페어몬트 피스 호텔은 여전히 고유의 품격을 유지하고 있었고, 시계탑이 인상적인 상하이 커스텀 하우스 또한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변화하는 것들과 변하지 않는 것들이 강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흐르는 곳- 그곳이 바로 와이탄이다.
‘좋아요’를 부르는 상하이의 골목- 안푸루
다음 날의 일정은 상하이 트렌드세터들이 가장 사랑하는 거리, 안푸루(安福路)에서 시작됐다. 코로나 이후 이 짧은 골목은 패션과 디자인, 예술과 일상이 교차하는 상하이의 새로운 상징으로 떠올랐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왕홍 거리’로 불릴 만큼 유명세를 얻었고, 주말이면 트렌드세터들과 사진가들로 북적인다.
서울에 비유하자면 연남동의 감성에 성수동의 창의성을 더한 곳에 가깝다. 걷기 좋은 나무길과 개성 있는 독립 카페, 감도를 살린 빈티지 숍은 연남동을 떠올리게 하고, 전통 건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간 속에 예술과 디자인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분위기는 성수동을 닮아 있다.
프랑스 조계지 한가운데 자리한 이 거리는 길이 약 850m 남짓. 19세기 후반에 프랑스가 행정적으로 관할하던 지역으로, 지금도 유럽풍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양옆으로 늘어선 플라타너스 나무, 20세기 초 유럽식 저택, 그리고 중국과 서양 건축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스쿠먼(石庫門/ 석고문, 돌로 만든 문틀이 특징인 상하이 특유의 근대 주거 양식)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걷다 보면 시간의 감각이 느슨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 틈마다 카페와 부티크, 아틀리에, 책방이 이어지며 이 거리만의 감각적인 분위기를 완성한다.

프렌치 브런치와 내추럴 와인이 어우러진 랙바(RAC Bar), 이탈리아 와인과 살라미, 치즈가 가득한 델리숍 겸 브런치 카페 알리멘타리(Alimentari), 그리고 대만 출신 아티스트 니콜 텅(Nicole Teng)의 감각이 담긴 수공예 브랜드이자 아틀리에 쇼룸 브뤼 케이크(Brut Cake)까지. SNS에서 자주 마주하던 상하이의 핫플레이스들이 안푸루 거리 안에 모여 있다.
상하이 젠지(Gen Z)들의 실험실, TX 화이하이
안푸루가 감성의 속도를 따라 걷는 거리라면, 화이하이루(Huaihai Road, 淮海路)는 상하이의 과거와 현재, 전통과 트렌드가 나란히 흐르는 대로다. 그중에서도 화이하이중루(Middle Huaihai Road) 구간은 옛 프랑스 조계지 가운데 자리하고 있어, ‘동양의 샹젤리제’라 불릴 만큼 고풍스러운 유럽식 건축과 세련된 상업 공간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1900년대 초, 이 거리는 프랑스 장군의 이름을 따 ‘조프 거리(Avenue Joffre)’라 불리기도 했다. 프랑스 조계 시절에는 상하이 상류층의 주거지이자 문화 중심지의 기능을 했고, 지금은 길을 따라 IAPM몰, K11,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 신진 디자이너숍, 감성적인 카페, 독립 서점, 갤러리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상하이를 대표하는 고급 상업 지구로 거듭났다.

2020년 화이하이중루 한복판에 문을 연 TX 화이하이는 중국 Z세대의 취향이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실험실 같은 공간이다. 한때는 백화점이었던 건물이 이제는 디지털 미디어를 기반으로 패션, 음악, 예술, 테크가 유기적으로 소비되는 하이브리드 문화 플랫폼으로 새롭게 변신했다.
“New China Cool”이라는 기조 아래, 젠지(Gen Z)의 미감과 콘텐츠 소비 방식을 담아낸 이곳은 입구부터 남다르다. 외벽은 거리로 활짝 열려 있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오픈 플랫폼’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건물 내부는 층마다 전혀 다른 테마로 구성되며, 브랜드 팝업 스토어는 며칠 단위로 바뀌고, 계단과 벽면의 그래픽 역시 계절에 따라 새로운 얼굴을 입는다.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디지털 패션, NFT 아트, 3D 프린팅 슈즈 등 새로운 미디어와 물질이 충돌하고 융합되는 공간 속에서 ‘패션’이라는 개념조차 다시 쓰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신을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젊은 세대가 있다. 그래서 TX 화이하이는 감각의 속도로 반응하는 공간이다.
상하이, 상상력의 속도 위에 올라타다
주토피아 핫 퍼슈트
상하이 일정의 마지막은 디즈니랜드였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토피아 핫 퍼슈트(Zootopia Hot Pursuit)’였다. 디즈니랜드 마니아라면 결코 놓칠 수 없는 최신 놀이기구다. 2023년 말, 상하이 디즈니랜드에 새롭게 문을 열었는데 몰입형 테마 극장에 가깝다. 단순히 탑승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영화 속 주토피아 세계로 직접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탑승자는 경찰 토끼 ‘주디 홉스’가 되어 사건을 추적한다. 레스토랑 주방, 지하 세계, 얼어붙은 토끼마을 등 영화 속 익숙한 공간들을 차례로 지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트랙이 없는 라이드 시스템은 자유롭게 움직이며, 실시간 반응형 애니메트로닉스와 디지털 프로젝션이 어우러져 살아 있는 도시 안을 달리는 듯한 생생함을 선사한다.
인상 깊었던 건 캐릭터들의 표정과 반응이 탑승자의 시선과 움직임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다. 체험 시간은 약 6~7분 남짓이지만 빠른 전환과 탄탄한 스토리라인 덕분에 영화 팬이라면 더욱 깊게 몰입하게 된다.
백 년이 하루처럼,
하루가 백 년처럼 느껴지는 도시
5년 만에 다시 찾은 상하이는 분명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상하이였지만, ‘동양의 파리’라는 별명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만큼 거리가 한층 더 정제되고 세련된 분위기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그 변화 속에서 오히려 과거의 상하이가 느껴졌다. 오래된 담장, 나무 그림자, 벽에 스며든 색의 결들. 도시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여전히 예전의 상하이가 있었다.

아마 상하이가 미완성이 도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변화의 문장 사이마다 아직 쓰이지 않은 단어처럼 여백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짧은 주말 여행이었지만 다음에는 조금 더 천천히, 더 오래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백 년과 하루가 겹쳐 흐르는 이 도시를 진짜로 이해하려면 시간을 들이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