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부분의 사람들이 ‘독일’하면 맥주를 떠올릴 때, 술을 못하는 나의 관심은 소시지로 향했다. 몇 년 전 독일에서 한 달간 머무르며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독일에 존재하는 모든 소시지를 섭렵하겠다는 것. 실행에 옮겨 주말이면 기차를 타고 이 도시 저 도시를 돌아다니며 소시지 순례를 했다.
독일 소시지의 진정한 매력은 직설적인 솔직함에 있다. 프랑스 요리처럼 화려한 소스도 없고, 이탈리아 요리처럼 허브도 없다. 고기 본연의 맛과 최소한의 향신료만으로 승부하는 정직함이야말로 독일스럽다.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놀라울 정도로 복잡한 풍미의 레이어가 숨어 있다.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시지의 본고장이다. 세계 어느 나라도 독일만큼 소시지에 진심인 나라는 없다. 독일 소시지의 역사는 생존의 역사다. 추운 게르만 땅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고기를 오래 보관할 방법이 필요했다. 소금에 절이고, 향신료로 맛을 내고, 훈제로 수분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소시지라는 기적이 탄생했다.
독일은 중세부터 소시지, 독일어로 ‘부어스트’의 성지였다. 독일 정육점 길드(Fleischerzunft)들은 소시지 제조법을 가문의 비밀처럼 전수했고, 각 지역만의 독특한 소시지 문화를 만들어냈다. 장인들은 돼지, 소, 송아지를 갈아 허브와 향신료로 버무려 지역의 개성을 불어넣었다. 훈제, 삶기, 굽기- 조리법은 지역마다 달랐고, 그 다양성이 독일 소시지를 세계적인 전설로 만들었다. 짭짤하고, 육즙이 터지고, 때로는 매콤하거나 부드러운 맛은 독일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는다. 특히 신성로마제국 시대, 각 도시국가들이 자신들만의 소시지를 개발하면서 독일 소시지는 다양성의 극치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오늘날 독일에는 1,500여 종의 소시지가 있다.
독일 소시지가 세계를 정복한 이유는 독일 사람들의 DNA라 할 수 있는 완벽주의 정신에 있다. 독일식품법(Deutsches Lebensmittelrecht)은 소시지 제조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어떤 부위의 고기를 쓸 수 있는지, 첨가물의 비율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심지어 소시지 케이싱의 종류까지 세세하게 규정한다. 이러한 완벽주의는 품질의 일관성으로 이어졌다. 베를린에서 먹는 브라트부어스트나 뮌헨에서 먹는 브라트부어스트나 동일한 품질을 보장받을 수 있다. 이것이 독일 소시지가 세계적 브랜드가 된 핵심이다.
한 달간 독일 소시지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네 도시를 돌며, 그 맛과 이야기를 찾아 나섰다. 독일 맥주보다 소시지에 더 끌리는 이들을 위해 여정에서 얻은 정보와 생생한 맛의 기억을 소개한다.
프랑크푸르트_ 프랑크푸르터 뷔르스트헨

최첨단 고층 건물들이 솟아 있는 독일 금융의 중심지 프랑크푸르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시지, 프랑크푸르터 뷔르스트헨(Frankfurter Würstchen)을 탄생시킨 도시다. 거리를 걷다 보면, 곳곳에서 이 소시지를 겨자와 함께 먹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처음 독일에 갔을 때의 일이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에 들른 작은 델리에서 뷔르스트헨 하나를 샀다. 소스가 발라진 갓 구운 소시지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알 수 있었다. 평생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맛이라는 것을.
프랑크푸르터 뷔르스트헨. 이름부터 단호한 이 소시지는 도시의 심장처럼 단단하고 직설적이다.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도시의 역사다. 거리의 푸드 트럭에서 주문한 뷔르스트헨은 뜨거운 물에 데쳐 나왔는데, 접시에 얹힌 모습이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익숙했다. 한입 베어 물면 짭짤하면서도 부드러운 육즙이 가득 느껴진다.

프랑크푸르터 뷔르스트헨은 미국 핫도그의 원조로도 알려져 있으며, 돼지고기만을 사용해 만들어진다. 소시지 안의 고기는 부드럽고 풍미가 깊으며, 훈제 과정을 거친 덕분에 특유의 고소한 향과 짭조름한 맛을 낸다. 고기와 향신료가 섬세하게 어우러져 소시지 자체가 맛의 조화를 이루면서도 과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질감은 매우 부드럽고 촉촉해서 소시지 속 고기 본연의 맛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프랑크푸르터 뷔르스트헨은 깊은 역사를 알고 나면 맛을 더욱 풍성하게 느낄 수 있다. 기원은 13세기 프랑크푸르트의 소시지 농장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소시지 제조는 주로 지방에서 이루어졌는데, 프랑크푸르트는 소시지 생산지로서 명성이 높았다. 초기에는 주로 상류층과 도시 사람들의 음식으로 대접받았으며, 길고 얇은 형태로 만들어져 손쉽게 먹을 수 있었다. 특히 훈제 방식이 독일 전역에서 유행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생긴 고유의 풍미가 프랑크푸르터 뷔르스트헨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뉘른베르크_ 로스트브라트부어스트
뉘른베르크는 중세 성벽과 고풍스러운 다리들이 도시를 감싸고 있는 작고 정갈한 도시다. 이곳의 소시지가 로스트브라트부어스트(Rostbratwurst)다. 손가락만 한 작은 크기지만, 맛은 놀랍다. 숯불에 구우면 바삭한 겉면과 육즙이 가득한 속을 맛볼 수 있다. 하우프트마르크트 광장에서 소시지 여섯 개를 주문하고 성 로렌츠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며 자우어크라우트와 함께 먹었는데, 크기가 작아 자꾸 손이 갔다. 이 소시지가 왜 수백 년간 사랑받아 왔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맛이었다.
로스트브라트부어스트는 뉘른베르크 사람들의 자부심이자 전통의 상징이다. 뉘른베르크 사람들은 장인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자신들의 작은 소시지를 세계 최고라고 자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로스트브라트부어스트를 맛보는 것은 이 도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경험이다.

로스트 브라트부어스트는 전통적인 그릴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고기와 향신료의 조화가 뛰어나 작은 크기지만 강렬한 맛을 가진다. 이 소시지의 정확한 규격은 1313년부터 시청에서 철저히 관리되어 왔다. ‘길이는 7㎝, 무게는 25g’. 700년 넘게 이 규격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까다로운 관리 덕분에 뉘른베르크는 ‘장인의 도시’라는 명성을 지켜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크리스마스 마켓에서는 뜨겁게 구운 로스트브라트부어스트 3개를 겨자에 찍어 먹는 전통이 있다.

뉘른베르크 사람들이 이 소시지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를 이해하려면, 뉘른베르크 소시지 박물관(Nürnberger Bratwurst Museum)으로 가면 된다. 박물관은 브라트부어스트가세에 위치해 있으며, 700년에 걸친 로스트브라트부어스트의 역사와 함께 생산 방식과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중세 소시지 제조 도구는 물론, 고기 분쇄기와 레시피 문서 등 다양한 역사적 자료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어 소시지의 전통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뮌헨_ 바이스부어스트
뮌헨은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맥주 축제 옥토버페스트로 유명하지만, 진짜 뮌헨은 바이스부어스트(Weißwurst)다. 뮌헨의 아침은 하얀 소시지, 바이스부어스트로 시작된다. 뮌헨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든 의식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바이스부어스트 기원은 18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뮌헨의 한 고기 가공소에서 처음 만들어져 주로 상류층을 대상으로 한 고급 음식으로 유행했고, 지금은 뮌헨의 역사와 정체성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갓 데친 바이스부어스트의 송아지 고기와 허브가 뒤섞인 맛은 강렬하지 않고 입안에서 녹는다. 송아지 고기와 돼지고기로 만드는데, 파슬리와 레몬이 들어가 상큼하고 신선한 맛을 낸다. 덕분에 바이스부어스트는 항상 신선하고, 고기의 질감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맛을 자랑한다.

전통적인 바이스부어스트를 제대로 맛보려면 빅투알리엔마르크트(Viktualienmarkt)를 꼭 가봐야 한다. 여기서 바이스부어스트를 프뤼스튁(Weißwurstfrühstück)이라는 전통적인 아침 식사 스타일로 즐길 수 있다. 프뤼스튁은 바이스부어스트와 함께 프레첼, 겨자, 그리고 바이스비어(밀맥주)로 구성된 전통적 바이에른식 아침 식사다. 보통 낮 12시 이전에만 즐기는데, 그 이유는 바이스부어스트가 신선한 고기만을 사용한, 그날 만든 소시지여야 하기 때문이다.
바이에른의 푸른 하늘, 마리엔플라츠의 종소리를 배경으로 바이스부어스트 한 접시를 먹노라면 행복은 아마도 이런 순간들로 이루어진 게 아닐까 싶어진다.
빅투알리엔마르크트 외에도 바이스부어스트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곳이 많다. 호프브로이하우스(Hofbräuhaus am Platzl)는 1589년에 설립된 세계적으로 유명한 뮌헨 맥주홀이다. 바이스부어스트를 포함한 다양한 바이에른 전통 요리를 제공하는 명소다. 또한 슈나이더 브로이하우스(Weisses Bräuhaus im Tal)는 1872년에 설립된 레스토랑으로, 바이스부어스트와 다양한 바이에른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베를린_ 커리부어스트
베를린은 다른 독일 도시들과는 조금 다르다. 훨씬 자유롭고 개성 넘치는 도시다. 이곳의 소울푸드가 바로 커리부어스트다. 삶은 소시지를 썰어 놓고, 그 위에 토마토 케첩과 카레가루를 뿌려 먹는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 음식 중 하나다.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지만 투박함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매콤한 카레와 소시지의 짭짤함이 기묘하게 어우러지고, 옆에 감자 튀김과 차가운 스펫지를 곁들이면 최고의 맛 조합이다. 거칠고 직설적이지만 중독성 있는 맛으로 하루에 약 80만 개가 소비된다.
사실 커리부어스트는 베를린의 역사, 특히 전후의 힘든 시기를 겪은 도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베를린 사람들은 그 어떤 맥주보다 커리부어스트를 사랑한다.

커리부어스트는 1949년 베를린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헤르타 호이버(Herta Heuwer)가 영국군이 주는 커리 파우더와 토마토 케첩을 사용해 발명했다. 전쟁 후, 물자 부족과 생활고 속에서도 사람들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던 중, 이 소시지가 탄생한 것이다. 베를린의 칸트슈트라세 101번지에는 커리부어스트를 발명한 헤르타 호이버를 기리는 기념 동판이 세워져 있고, 2019년에는 커리부어스트 탄생 70주년을 기념한 기념 메달도 발행되었다.
커리부어스트는 오늘날 베를린을 정의하는 중요한 문화적 아이콘 중 하나이며,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상징적인 음식이다. 전후의 고난과 회복을 겪으며 탄생한 이 소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베를린 사람들의 자부심이자 시민 정체성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다.
소시지 속에 담긴 독일
결국 음식은 기억이다. 소시지를 먹으며 독일을 배웠다. 프랑크푸르트의 단단함, 뮌헨의 부드러움, 베를린의 거침없음, 뉘른베르크의 정갈함. 소시지를 먹을 때마다 독일을 떠올린다. 우리나라에서도 독일 소시지를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진정한 독일 소시지의 맛을 알기 위해서는 뮌헨의 비어가든에서, 베를린의 거리 가판대에서, 혹은 뉘른베르크의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직접 경험해봐야 한다. 여행은 끝났지만, 입안에 남은 소시지의 맛은 아직도 생생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