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에도 색이 있다면, 고마쓰(Komatsu, 小松)는 이끼가 내려앉은 묵직한 청록색에 가깝다. 하늘은 비행기가 드나드는 관문이면서, 땅으로는 하쿠산에서 흘러내린 숲의 기운과 나타데라의 이끼 낀 암벽을 짙은 비취색으로 품고 있다. 그리고 공업 도시 특유의 차분한 회색도 한스푼 정도 그 틈에 배어 있다. 반면 이웃한 가나자와(Kanazawa, 金沢)는 찬란한 금빛의 도시다. 에도 시대 마에다 가문이 일군 막강한 부와 문화적 풍요가 지금도 거리 곳곳에 남아 있다.
고마쓰는 대한항공 직항 노선이 운영 중이라 편리하다. 또는 오사카나 교토에서 특급 선더버드에 올라 쓰루가에서 호쿠리쿠 신칸센으로 갈아타고 두세 시간이면, 이 낯설고 매혹적인 두 도시에 닿는다. 번화한 도시들과 거리는 가깝지만 이 도시들이 펼쳐 보이는 풍경은 숨가쁘지 않다.
조용하면서도 묵직하게 저마다의 매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청록과 금빛 도시 이야기를 풀어본다.
고마쓰,
지나치기에는 아까운 하늘 관문
고마쓰는 세계적인 건설기계 기업 ‘고마쓰 제작소’가 탄생한 곳이자, 호쿠리쿠 지방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기계·제조업 중심 도시다. 고마쓰 제작소의 본사가 있고, 공항 옆 공군기지에서는 F-15 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하늘을 가르는 호쾌한 풍경이 펼쳐진다. 항공 구조대를 다룬 애니메이션 <되살아나는 하늘-RESCUE WINGS->나 <걸리 에어포스>의 배경이 된 것도 이 역동적인 하늘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차갑고 거대한 기계의 도시를 한 꺼풀만 벗겨내면, 뜻밖에도 수백 년의 세월을 품은 깊고 고요한 매력이 드러난다.

그 매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명소가 나타데라(那谷寺)다. 서기 717년에 창건되었다는 오랜 사찰인데, 인간이 만든 건축이라기보다 자연이 빚어낸 거대한 신전의 느낌이다. 꼭 가봐야 하는 여행지를 추천하는 미슐랭 그린 가이드가 왜 별을 주고 찬사했는지 경내에 들어서는 순간 직관적으로 알게 된다.
수천 년 전 화산이 뿜어낸 흔적으로 완성된 거대한 응회암 벽이 눈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하얀 기암괴석의 틈새마다 오랜 세월 자연이 뚫어놓은 천연 동굴들에는 저절로 시선이 향한다. 수백 년 된 아름드리나무와 푸른 이끼의 적막함 속에서, 옛 사람들은 천연 동굴 속에 죽은 이의 유골을 안치하거나 스스로를 가두어 수행을 했다고 한다.
역사의 흔적을 되새기는 방법
나타데라에서 차량으로 5분 정도 거리에는 울창한 숲 속에 조성된 유노쿠니노 모리(ゆのくにの森)가 위치해 있다. 가가 지역의 전통 공예를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는 체험형 마을이다. 고마쓰가 중공업 도시이면서 동시에 장인의 도시라 불리는 이유를 증명하는 공간이다. 에도·메이지 시대 마을을 구성하는 11동의 목조 가옥들은 100년에서 250년 전 부유한 농민, 촌장, 장인들이 실제로 대를 이어 살던 진짜 민가들이다. 이시카와현 전역에서 해체하여 이 숲 속으로 고스란히 옮겨왔다.

현재 이 고택들은 공방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약 50여 가지의 체험이 가능하다. 얇은 금박을 그릇이나 거울에 붙이는 금박 공예, 화려한 오채 양식의 구타니 도자기 채색, 전통 비단 염색 기법인 가가 유젠, 정교한 와지마 칠기 등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
그리고 고마쓰에는 꼭 먹어봐야 하는 소울푸드가 두 가지 있다. 300년 역사의 고마쓰 우동(小松うどん)과 담백한 소금 야키소바(塩焼きそば)다. 하쿠산의 맑은 지하수로 반죽해 유난히 매끄럽고 부드러운 우동 면발을 투명한 백다시 국물과 함께 들이키면 깊이가 느껴진다.
일반적인 갈색 소스 대신 오직 소금과 특제 양념만 사용해서 채소와 굵은 면을 볶은 소금 야키소바 역시 자극적이지 않다. 소금이라는 가장 단순한 원료로 재료 본연의 풍미를 끝까지 끌어올린 맛은 공업 도시라는 거친 겉면 속에 가장 순수한 장인의 역사를 숨겨둔 고마쓰의 본질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
가나자와,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 도시
고마쓰에서 가나자와까지는 호쿠리쿠 신칸센에 앉아 숨을 한 번 고르고 10분이면 닿을 만큼 가깝다. 느릿하게 달리는 열차, IR 이시카와 철도에 몸을 실어도 30분이면 충분하다.

기차에서 내려 가나자와역 광장으로 나오면 거대하고 압도적인 조형물이 눈에 띈다. 가나자와의 상징, 쓰즈미몬(鼓門)이다. 쓰즈미(鼓)란 일본 전통 예술인 노(能)에 쓰이는, 모래시계처럼 잘록한 북이다. 두 개의 거대한 나무 기둥이 몸통처럼 지붕을 받치고 있다. 전통의 고고함을 웅장한 크기로 증명하는 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쓰즈미몬 바로 뒤로 펼쳐지는 현대적인 모테나시 돔(もてなしドーム)과의 대비다. 모테나시는 일본어로 지극한 환대를 뜻한다. 수천 장의 유리와 철골로 거대한 돔 천장을 세워, 비가 잦은 가나자와를 찾은 이들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형상이다.
묵직한 나무로 빚은 에도 시대의 전통(쓰즈미몬)과 투명한 유리와 철골로 세운 21세기의 현대(모테나시 돔)가 한 공간에 공존한다. 이 기묘한 공존을 뒤로하고 역 광장을 벗어나면, 비로소 가나자와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겐로쿠엔 정원의 완벽주의
가나자와에는 미토의 가이라쿠엔, 오카야마의 고라쿠엔과 함께 일본 3대 정원으로 꼽히는 겐로쿠엔(兼六園)이 있다. 17세기 중엽부터 이곳을 다스리던 마에다 가문의 영주들이 170년에 걸쳐 조성한 거대한 지천회유식(地泉回遊式, 연못을 중심으로 거니는 형태) 정원이다.

정원이란 본래 너무 넓으면 고즈넉한 맛이 없고, 손을 많이 대면 세월의 깊이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곳은 그 모순을 기어코 한 공간이 담아냈다. 나뭇가지 하나, 이끼 한 조각까지 정교하게 계산해 통제한 이 공간에는 일본 장인 특유의 집요함이 배어 있다. 정원 한 구석에 있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분수조차 기계 장치 없이, 고저차가 만든 자연 압력으로만 물을 뿜어 올린다. 자연의 법칙마저 계산 안에 가두려 한 인간의 집착처럼 보인다.
정원을 호령하던 영주들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지만 정원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은 지자체와 대를 이어온 ‘우에키시(植木職人, 정원 장인)’들의 꾸준한 손길이 그 미학을 대물림하고 있다.

이곳의 겨울은 기이할 만큼 아름답고 치열하다. 가나자와의 무겁고 습한 눈으로부터 나뭇가지를 지키기 위해 수백 개의 줄을 원뿔 모양으로 드리워 묶는 유키즈리(雪吊り)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11월이면 장인들이 직접 나무 위에 올라 커다란 우산처럼 줄을 엮는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기 위한 이 생존의 기술은 겐로쿠엔의 이름을 드높인 볼거리가 되었다.
겐로쿠엔은 특별한 기상 악화가 없는 한 연중무휴로 문을 연다. 낮에는 입장료를 받지만, 이른 새벽 찾아온 이방인에게는 잠시 빗장을 풀고 아무도 없는 정원을 온전히 내어준다.
복원된 기억의 성벽_ 가나자와성 공원

겐로쿠엔에서 이시카와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가나자와성 공원(金沢城公園)으로 이어진다. 가나자와성은 수많은 파괴와 소멸의 시간을 견뎌낸 흉터 많은 거인에 가깝다. 마에다 가문의 중심지였으며, 역사의 고비마다 화재가 반복되었고, 한때는 육군 기지로, 또 한때는 가나자와 대학 캠퍼스로 쓰이며 본래의 모습을 잃어갔다. 눈앞에 우뚝 솟은 히시야구라(망루)와 고주켄나가야(단층 창고)는 못 하나 쓰지 않는 전통 공법을 고집해 기어이 되살려낸 복원된 과거다.

성 내부의 드넓은 잔디밭을 지나 서쪽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기면, 가파른 절벽 아래 아늑하게 안긴 교쿠센인마루 정원(玉泉院丸庭園)과 마주한다. 17세기 중엽에 조성되었다가 메이지 시대에 완전히 사라졌었다. 그리고 고작 10여 년 전에야 비로소 어둠 속에서 건져 올려졌다. 만인에게 열린 겐로쿠엔이 광대하고 화려하다면, 이 숨겨진 정원은 지극히 은밀하고 사적인 고독을 닮았다.

성벽 가장자리 끝에는 흑백의 대조가 눈에 띄는 네즈미타몬(鼠多門)이 있다. 견고한 요새의 안과 밖, 영주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잇는 나무다리를 건너 오야마 신사로 이어지는 문이다. 이 문 역시 오랜 방화와 철거의 시간을 견디고 최그네야 겨우 제자리를 찾았다.
주말 밤에는 교쿠센인마루 정원과 네즈미타몬에 야간 조명이 켜진다. 교쿠센인마루 정원은 가나자와의 전통극 음악에 맞춰 조명의 색과 밝기가 천천히 바뀌는데, 선율을 따라 빛이 일렁이는 풍경도 볼거리다.
전통 너머로 흐르는 시간

붉은 격자문이 길게 늘어선 히가시 차야가이(東茶屋街)는 에도 시대인 1820년, 번청의 허가를 받아 조성된 유흥가다. 지금은 전통 건축물 보존지구로, 가나자와의 특산물인 금박을 입힌 아이스크림을 들고 셀카를 찍는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히가시 차야가이에서 아사노가와 강을 건너 평탄한 골목을 십여 분쯤 지나면 오미초 시장(近江町市場)의 초입에 다다른다. 에도 시대부터 ‘가나자와의 부엌’이라 불리며 30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전통 시장이다. 찻집 거리가 과거의 미학을 보여준다면, 이곳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력이 넘치는 곳이다.

시장 골목은 동해에서 갓 잡아 올린 게와 해산물, 이 지역에서만 나는 독특한 가가 야채를 파는 상인들의 활기찬 목소리로 들썩인다. 사람들은 가나자와의 명물 해산물 덮밥, 카이센동을 먹으러 길게 줄을 선다. 그릇 위에는 기름진 방어와 단새우가 빈틈없이 얹히고, 그 위로 조그만 금박 조각이 뿌려진다. 오미초 시장에서는 가나자와 오뎅도 빼놓을 수 없다. 가장 서민적이고 투박한 냄비 요리다. 흔히 오뎅이라 하면 겨울 간식을 떠올리지만, 비가 잦고 습한 가나자와의 사람들은 일 년 내내 오뎅 국물로 몸을 데운다.
가나자와의 옛 영주들이 즐겼다는 전통 가가 요리의 정수, 지부니(治部煮)는 밀가루를 살짝 입힌 오리고기와 제철 채소를 달콤 짭조름한 국물에 자작하게 조려낸 음식이다. 국물이 끓을 때 ‘지부지부’ 소리가 난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매끄러운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갈 때의 묵직한 질감은 가볍게 들뜨지 않는 가나자와의 우직한 성격과 꼭 닮았다.
21세기 미술관, 가나자와의 현재를 말하다
가나자와 시내 한복판에는 유명한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金沢21世紀美術館)이 있다. 가나자와역에서 버스로 십여 분 거리로, 가나자와성 공원 및 겐로쿠엔 정원과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해 있다.

과거 영주를 보필하던 무사와 상인들이 모여 살던 옛 성하마을(성 아래 형성된 도심)의 한복판에 현대적인 공간이 들어서 있어 존재감이 더 강렬하다. 세계적인 건축가 유닛 SANAA가 설계한 미술관은 앞뒤 경계 없이 사방 어디서나 들어설 수 있다. 연간 200만 명이 넘게 찾는 명소이지만, 2027년 봄부터 대규모 보수를 위해 한동안 휴관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하니 서둘러 가보는 편이 좋다.
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은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수영장(The Swimming Pool)>이다. 물이 가득찬 수영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물은 유리판 위에 얕게 담겨 있을 뿐, 그 아래는 사람이 걸어 들어갈 수 있는 빈 공간이다. 그래서 위에서 물밑을 내려다보는 사람과 물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사람이 한 화면에 담긴다. 서로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도 끝내 닿을 수 없는 시선의 교차는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과 닮은 듯도 하다.
또 다른 일본을 볼 수 있는 두 도시

제2의 교토라 부르지만, 가나자와는 교토와는 다른 결의 도시다. 교토가 과시하듯 열려 있다면, 가나자와는 붉은 격자문과 깊은 성벽 뒤로 은밀히 숨어있다. 400년 전의 겨울나기 방식을 집요하게 고수하면서도, 현대적인 미술관의 유리 벽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을 위로할 줄 아는 도시다.
고마쓰는 굴뚝과 기계 소리로 기억되는 공업 도시지만, 깊은 곳에는 하쿠산에서 내려온 청록색 자연과 오랜 세월 손끝으로 그 땅을 빚어온 장인들이 있다. 도쿄도 오사카도 교토도 아닌 또 다른 일본이 궁금하다면, 고마쓰와 가나자와는 꽤 괜찮은 선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