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0 Pennsylvania Avenue NW.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백악관 주소 끝에 붙은 두 글자, NW(North West)는 그저 방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워싱턴 D.C.가 어떻게 설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암호에 가깝다.
워싱턴 D.C.는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네 개의 사분면(NW, NE, SW, SE)으로 나뉘어 있다. 그중 가장 넓고 화려한 NW(북서) 사분면에는 백악관과 주요 대사관들, 국가 주요 부처들이 자리하며, 권력의 심장부를 형성하고 있다. 도시 동쪽, 권위의 정점인 캐피톨 힐을 뒤로 하고 북서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워싱턴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세련된 고전미의 조지타운, 지적이고 자유로운 듀퐁 서클, 그리고 이방인의 활기가 넘치는 애덤스 모건까지. 이 동네들은 냉철한 행정 도시 워싱턴 안에 숨겨진, 가장 입체적이고 화려한 결들이다.

워싱턴 D.C.는 미국인이 아니라 프랑스인의 손에서 태어났다. 도시를 설계한 피에르 샤를 랑팡(Pierre Charles L’Enfant)은 프랑스 태생의 화가이자 군인이었고, 독립전쟁 당시 조지 워싱턴의 참모로 미국에 건너왔다. 왕을 위해 도시를 설계하던 나라에서 교육받은 그가, 왕이 없는 나라의 수도를 그리게 된 셈이다.
당시 미국은 막 태어난 나라였다. 기존의 수도도, 귀족들을 위한 도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존 도시를 고치는 대신, 아예 새로운 수도를 만들기로 했다. 랑팡에게 주어진 요구는 명확했다. 유럽의 위엄은 빌리되, 유럽과는 다른 도시를 만들 것. 한 사람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분산된 권력 구조를 공간으로 증명할 것.
그래서 워싱턴 D.C.에는 모든 것이 떨어져 있다. 입법부는 캐피톨 힐에, 행정부는 백악관에. 그리고 둘 사이에는 왕의 정원이 아닌 시민의 공터(National Mall)가 놓여 있다. 캐피톨 힐과 백악관을 잇는 축이 바로 펜실베니아 애비뉴다.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나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설계다. 꽤 비효율적이지만, 그 이면에는 철저한 민주주의의 논리가 숨어 있다. 파리는 왕을 위해, 런던은 자본을 위해 설계되었지만 워싱턴은 처음부터 시민을 위해 설계되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설계 의도는 사람들이 모이는 계절 속에서 먼저 체감된다. 봄, 특히 부활절이 있는 4월이 되면 워싱턴 D.C.는 뭔가 부산하면서도 뭉글해지는 분위기가 있다. 부활절에 백악관 잔디밭에서는 아이들이 달걀을 굴리며 노는 전통 행사, 이스터 에그 롤(Easter Egg Roll)이 열린다. 1878년부터 이어져 온 이 행사는 대통령 가족이 함께 하는, 미국에서 가장 상징적인 부활절 하이라이트다.
또한 벚꽃 시즌의 대미를 장식하듯 워싱턴의 새로운 명소인 디 워프(The Wharf) 워터프론트에서는 페탈팔루자(Petalpalooza) 축제가 이어진다. 페탈팔루자는 하루 동안 열리는 대형 봄 페스티벌이다. 낮에는 야외 콘서트들과 이벤트들이 이어지고, 해가 지면 포토맥 강과 아나코스티아 강 위로 불꽃이 밤하늘을 채운다. 벚꽃이 진 자리를 음악과 불빛으로 마무리하는, 워싱턴식 봄의 작별 인사다.
2026년은 미국 건국 250주년을 맞는 해라, 봄이 더 기다려진다. 그래서 이 여행은 현지 사람들의 일상이 숨 쉬는 NW에서 시작해, 워싱턴의 설계 이념이 탄생한 캐피톨 힐에서 마무리된다.
두 개의 이름이 하나가 된
애덤스 모건
애덤스 모건(Adams Morgan)이라는 이름은 타협의 결과다. 백인 아이들이 다니던 애덤스 초등학교와 흑인 아이들이 다니던 모건 초등학교. 주민들은 이 두 곳의 이름을 합쳐 동네 이름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현재 D.C.에서 가장 힙하고, 가장 다양한 얼굴을 가진 곳이 되었다.
애덤스 모건은 낮과 밤에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진다. 낮에는 가족들이 산책하고, 젊은 부부들이 카페에 앉아 있지만 밤이 되면 거리는 음악으로 울린다. 어떤 바에서는 에티오피아 음악이 흐르고, 다른 바에서는 래퍼가 스페인어로 무대 위에서 외친다. 사람들의 얼굴도, 언어도 다양하다.

애덤스 모건에서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마할리카(Maharlika)는 필리핀 음식을 하는 작은 식당이다.예약 없이는 들어가기 힘들다. 벽에는 필리핀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고, 사람들은 마닐라의 야자 빵을 먹으며 모국 이야기를 나눈다. 타이푼(Thaiphoon)은 태국 음식점이지만 일하는 사람들도, 찾는 사람들도 이곳을 제2의 집처럼 여긴다.
애덤스 모건은 비효율적인 동네다. 도시 계획가라면 좁은 골목과 복잡한 구조, 주차하기 어려운 거리들을 보고 당장 고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비효율성이 이곳의 매력이다. 질서정연한 도시는 획일적이 되기 쉽지만, 비효율적인 거리는 예측이 불가능해진다. 그 예측 불가능성이 애덤스 모건만의 독특한 바이브를 만들어낸다.
사유하는 동네
듀퐁 서클

듀퐁 서클(Dupont Circle)은 원형 광장을 중심으로 싱크탱크와 대사관, 북카페와 오래된 서점들이 모여 있다. 원형 광장은 사각형 광장과 다르다. 사각형 광장이 권력의 형태라면, 원은 중심이 없다. 모두가 같은 높이에 있다. 그래서 듀퐁 서클은 민주주의의 형태를 공간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크레이머북스 앤 애프터워즈 카페(Kramerbooks & Afterwords Cafe)는 24시간 문을 연다. 밤 10시, 자정, 새벽 1시. 언제 가도 누군가는 책에 몰두해 있다. 소음과 정치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이 도시는 밤에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하루의 끝은 듀퐁 서클 근처 바에서 진 리키(Gin Rickey) 한 잔으로 마무리해도 좋다. 19세기 말 이 도시에서 태어난 칵테일은 한 지역 정치인의 이름을 땄다고 전해진다. 진, 라임, 탄산수. 설탕도 시럽도 없다. 첫 모금은 날카롭고, 끝은 가볍다. 과하지 않아서 생각을 방해하지 않는다.

듀퐁 서클 북쪽에는 더 맨션 온 오 스트리트(The Mansion on O Street)가 있다. 1892년에 지어졌으며, 무려 100개에 달하는 방은 100개의 시간을 담고 있다. 각 방이 다른 문화와 시대, 다른 나라를 대표할 때 미국이 전 세계에서 무엇을 가져와 자신들의 방식으로 섞어놓았는지를 아무 설명 없이 보여준다.
이 집에서는 길을 잃는 것이 정상이다. 미로처럼 100개가 넘는 방과 숨겨진 문들이 있지만 설명이 거의 없다. 민권 운동의 상징, 로자 파크스(Rosa Parks)는 워싱턴을 방문할 때마다 이곳을 제2의 집으로 삼았다. 민주주의의 수도에서, 가장 자유분방한 공간이 가장 억압받았던 이에게 가장 편안한 안식처였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시간의 밀도가 가장 높은 동네
조지타운
조지타운(Georgetown)은 워싱턴에서 가장 예쁜 동네이자, 워싱턴 D.C.에서 가장 오래된 기억을 가진 동네다. 조지타운의 매력은 새로움이 아니라, 과거의 시간이 지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1751년, 수도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미 항구 도시로 존재했기에 워싱턴이라는 도시가 탄생하기 이전의 시간이 이곳에는 그대로 남아 있다. 250년의 미국 역사를 말할 때, 조지타운은 그 이전의 역사를 증언한다.

조지타운의 중심에는 조지타운 대학교(Georgetown University)가 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가톨릭 대학 중 하나로, 조지타운의 일부나 다름없다. 캠퍼스는 담장으로 닫혀 있지 않다. 벽돌과 철제 울타리 대신, 투명한 경계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학생들의 일상은 자연스럽게 동네의 일상이 되고, 동네는 캠퍼스의 연장이 된다.
수많은 통치자들을 길러냈지만, 캠퍼스 안은 정계의 소음 대신 중세 고딕 양식이 주는 고요한 규율로 가득하다. 권력을 꿈꾸는 젊은 지성들이 복도를 누비며 ‘남을 위한 삶’을 고민하는 곳, 조지타운 대학교는 워싱턴의 미래가 쓰이는 거대한 서재와 같다.
조지타운에서는 외부 사람들과 현지인들의 동선이 묘하게 갈린다. 관광객은 반듯한 M 스트리트를 따라 걷고, 현지인들은 18세기 포토맥 강을 오가던 상인들과 선원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울퉁불퉁한 N 스트리트를 주로 찾는다. 그리고 M 스트리트의 화려함에서 한 블록만 벗어나면, 또 분위기가 달라진다.
덤바턴 오크스(Dumbaton Oaks)는 성스러운 정원이다. 비잔틴 미술 컬렉션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원은 권력이 아니라, 취향과 사유로 축적된 미국 상류 문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봄이면 현지 사람들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사진을 찍기보다는 걷고, 앉고, 생각하기 위해서다.
덤바턴 오크스가 지적인 사유를 위한 공간이라면, 인근의 튜더 플레이스(Tudor Place)는 지극히 사적인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조지 워싱턴 가문의 후손이 살았던 이 저택은 대통령의 이름보다 생활의 시간을 더 많이 담고 있다. 정치의 중심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권력자들 역시 평범한 가족으로 살아갔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명한다.
조지 타운에는 케네디의 흔적도 남아 있다. 존 F.케네디가 하원의원 시절 살던 집이 있고, 재클린에게 청혼했던 마틴스 태번(Martin’s Tavern)의 3번 부스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이곳에는 대통령 케네디는 없다. 오직 조지타운 동네 주민이던 청년 케네디만 있다.

한편 조지타운에는 버터 향과 함께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이른바 조용한 컵케이크 전쟁이다. 관광객의 발걸음은 대개 조지타운 컵케이크(Georgetown Cupcake)로 향한다. 2008년 두 자매가 문을 열었으며,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었다. 유명인들이 줄을 서고, 대통령 가족의 방문 소식이 전해지면서 바닐라 버터크림이 높게 쌓인 레드벨벳 컵케이크는 조지타운 인증샷 단골이 됐다.

반면 현지인들은 베이크드 앤 와이어드(Baked & Wired)를 찾는다. 특이하게 ‘컵케이크’ 대신 ‘케이크컵(cakecup)’이라는 이름을 고집하는 곳이다. 크고 투박한 모양, 진한 초콜릿과 버터의 밀도, 포크 없이는 먹기 힘든 질감. 디저트를 장식이 아니라, 음식으로 여긴다.
조지타운은 워싱턴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있는 곳이다. 왕도 없었고, 대통령도 없었으며, 오직 상인과 선원만 있었던 시대. 이 동네는 워싱턴이 얼마나 깊은 시간을 가진 도시인지 보여준다.
미국 건국의 태초
캐피톨 힐
캐피톨 힐(Capitol Hill)은 워싱턴의 동쪽, 미국 국회의사당이 자리한 언덕이다. 바로 워싱턴의 설계 이념이 시작된 장소다. 이 언덕은 1790년대, 아직 미국이 어떤 형태의 나라가 될지 결정되지 않았던 시기에 선택되었다. 미국의 권력을 상징하는 국회의사당 돔 바로 옆의 주택가는 또 다른 워싱턴이 펼쳐진다.

19세기 타운하우스들이 줄지어 있고, 사람들은 작은 앞마당에서 정원을 가꾼다. 의회의 의원들도, 보좌관들도, 로비스트들도 이 동네에 산다. 낮에는 권력의 중심에 있지만, 오후에는 이웃과 인사를 나누는 평범한 주민이 된다. 캐피톨 힐은 웅장한 정치의 상징인 동시에, 가장 평범한 일상이 살아있는 동네다.
주말이 되면 캐피톨 힐 사람들은 도시를 가로질러 록 크릭 파크(Rock Creek Park)로 향한다. 록 크릭 파크는 워싱턴 D.C. 한 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심형 국립공원이다. 전체 길이는 약 19킬로미터(㎞), 면적은 69헥타르(㏊)로 뉴욕의 센트럴 파크보다 넓다. 1890년 미국에서 세 번째로 지정된 국립공원으로, 수도가 커지면서 함께 자라난 숲이다.

현지인들에게 록 크릭 파크는 생활의 일부다. 아침에는 출근 전 조깅 코스가 되고, 점심에는 노트북을 들고 나와 혼자 샌드위치를 먹는 장소가 된다. 주말이면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부모들은 커피를 들고 숲길을 걷는다. 이곳에 들어서면 도시는 사라진다. 차 소리 대신 물 흐르는 소리와 새소리가 들리고, 말 대신 숲의 침묵이 있다. 그래서 현지인들은 이곳을 워싱턴의 “도시의 허파”라고 부른다.
아기 상어 노래가 흘러나오는
내셔널스 파크
정치적 견해는 달라도 D.C. 주민들이 하나로 뭉치는 순간이 있다. 내셔널스 파크(Nationals Park)에서 붉은 유니폼을 입을 때다. 야구가 만드는 공동체는 정치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워싱턴 사람들의 내셔널스 사랑은 조용하지만 깊다. 내셔널스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Stay in the Fight)”는 끈질긴 팀 컬러가 있다. 2019년 워싱턴 내셔널스는 시즌 초반 최악의 성적으로 시작해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했다. 연방정부 셧다운으로 도시가 멈췄던 시기, 사람들은 내셔널스 파크에서 다시 하나가 되었다.

내셔널스 파크에서는 7회 말이 유명하다. ‘아기 상어(Baby Shark)’가 울려 퍼지면 관중들은 같은 박자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손뼉을 친다. 웃음과 박수가 경기장을 가득 채운다. 2019년 시즌 중반, 외야수 헤라르도 파라(Gerardo Parra)가 이적 후 부진이 계속되자 분위기 전환을 위해 두살배기 딸이 즐겨 듣던 ‘아기 상어’를 등장곡으로 사용하면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단순한 이벤트였지만, 팀의 연승과 겹쳤고 결국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이어지며 내셔널스 파크만의 상징적인 통과 의식이 되었다.
경기는 두세 시간으로 끝나지만, 내셔널스 파크 주변의 하루는 그보다 길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강변 벤치에 앉아 방금 전 마지막 타석을 복기하고, 낯선 사람과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눈다. 아나코스티아(Anacostia River)를 따라 이어진 산책로에는 경기 전부터 맥주를 들고 걷는 사람들이 있고, 강 건너로는 저녁 노을이 천천히 내려앉는다. 이 강변은 워싱턴에서 외면 받던 공간이었다. 공업지대와 창고가 늘어서 있어 도시 중심이면서도 늘 중심에서 밀려나 있었다. 하지만 야구장이 들어선 뒤, 이곳은 다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여전히 지금도 워싱턴 D.C.

미국 건국 250주년(Semiquincentennial)을 맞이하는 2026년의 워싱턴 D.C.는 축제 그 이상의 활기로 가득하다. 내셔널 몰에는 50개 주의 색깔이 입혀지고, 링컨 기념관의 깊은 지하 공간이 새로이 문을 열며 매달 기념행사가 이어진다. 하지만 워싱턴의 250년은 어떤 것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워싱턴D.C.는 지금도 새로운 정의를 써 내려가는 살아있는 도시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현재가 워싱턴이 가진 가장 강력한 역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