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시작된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부터 에곤 실레(Egon Schiele)까지’의 전시 소식을 듣는 순간, 몇년 전 오스트리아 여행이 떠올랐다.
그때도 12월이었다. 마감에 지쳐있다가 문득 클림트와 실레 작품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작품은 그림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클림트의 화려함 속에 숨겨진 깊이 있는 통찰, 실레의 거칠지만 진실된 표현들은 삶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며,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도전을 준다. 그래서 그들의 고향이자 그들이 바라보던 비엔나(Wien) 거리, 그들이 마시던 커피, 그들이 숨쉬던 공기. 그 모든 것들이 있는 오스트리아로 가는 비행기표를 충동적으로 예약해버렸다.
오스트리아는 흑백과 컬러가 교차하는 곳이다. 오래된 건물들과 좁은 골목길은 마치 세피아 톤의 사진처럼 과거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지만, 그 사이를 비집고 자라난 현대적 건축물들과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들은 생생한 컬러 사진처럼 활기를 뿜어낸다. 이 모순적인 공존이 바로 오스트리아의 매력이다.
이 흑백과 컬러의 교차는 클림트와 실레의 작품 세계와도 묘하게 닮았다. 클림트 작품은 오스트리아 컬러 사진 같다. 그의 황금빛 세계는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때로는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초현실의 세계를 보여준다. ‘키스(Der Kuss)’를 볼 때마다 ‘사랑이란 이토록 아름답고 신비로운 것일까?’라는 생각이 떠오르고, 금빛 장식 패턴 속 숨겨진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에 매료된다.
반면 실레의 그림은 오스트리아의 흑백 사진을 연상시킨다. 그의 날카로운 선은 흑백 사진의 강렬한 명암 대비처럼 내면의 고통과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자화상(Self-Portrait)’을 볼 때면 그의 뒤틀린 손가락에서 삶의 불안과 혼란을 본다. 하지만 동시에 그 솔직함을 통해 ‘너의 불완전함도 아름답다’라고 속삭이는 듯한 위로를 받기도 한다.
“아름다움은 때로는 위험하고, 사랑은 때로 치명적일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첫 번째 목적지는 당연히 벨베데레 궁전(Schloss Belvedere)이었다. 1712년부터 1723년 사이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Lucas von Hildebrandt)가 설계한 궁전은 오스트리아 바로크 양식 중 웅장함의 정수를 보여준다. 지상에 구현된 천국처럼 대칭적인 구조, 화려한 장식과 넓은 정원이 조화를 이루며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클림트의 황금빛 세계가 펼쳐지는 ‘키스’가 걸린 방에 들어서는 순간, 숨이 멎었다.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그려진 이 위대한 작품은 클림트의 황금시기를 대표한다. 황금빛 모자이크로 뒤덮인 연인의 모습, 그들을 감싸는 꽃무늬 배경, 평면성과 장식성이 뒤섞여 유겐트슈틸(Jugendstil, 아르누보)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 옆에 걸린 ‘유디트 I(Judith I)’도 놓칠 수 없다. 1901년 작품인 이 그림은 클림트의 팜므파탈(숙명의 여인) 시리즈 중 하나다. 유디트의 관능적인 모습과 그녀의 목 주변을 감싸는 황금빛 장식 그리고 어둡고 신비로운 배경의 대비가 강렬하다. 마치 “아름다움은 때로는 위험하고, 사랑은 때로 치명적일 수 있다.”고 클림트가 속삭이는 듯한 작품이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레오폴트 미술관(Leopold Museum)이었다. 2001년에 문을 연 이곳은 빈 세션주의(Wiener Secession)와 표현주의(Expressionism) 작품들의 보고다. 하지만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실레의 작품들로 향했다. 실레의 ‘죽음과 소녀(Tod und Mädchen, 1915-1916)’는 죽음을 상징하는 남성 형상과 소녀의 절망적인 포옹을 담았다. 실레 특유의 날카롭고 일그러진 선과 강렬한 색채가 죽음과 삶,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긴장을 극대화한다. 우리들 삶의 아름다움은 어쩌면 그 덧없음에서 오는 것일지 모른다.
‘자화상(Self-Portrait, 1912)’ 시리즈도 잊을 수 없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몸을 뒤틀고 과장하여 그린 이 자화상은 실레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캔버스 위에 적나라하게 펼쳐 보인다.
■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일시: 11월 30일 ~ 25년 3월 3일
저녁에는 카페 센트럴(Café Central)로 향했다. 1876년에 문을 열고 비엔나의 지식인들이 모여 토론을 나누던 장소였는데, 클림트와 실레도 즐겨 찾았다고 한다.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우유를 넣고 우유 거품을 올린 멜랑주(Melange) 커피를 주문했다. 이 커피가 바로 비엔나 커피의 대명사다. 커피와 함께 자허토르테(Sachertorte)도 주문했다. 진한 초콜릿 케이크 위에 살구잼을 바르고 다시 초콜릿으로 덮은 이 디저트는 1832년 프란츠 자허(Franz Sacher)가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느껴지는 따뜻함
오스트리아의 겨울은 특별하다. 11월 중순부터 시작되는 크리스마스 마켓(Christkindlmarkt)은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음악을 배경으로 비엔나 라트하우스 광장(Rathausplatz)부터 잘츠부르크의 돔 광장(Domplatz), 할슈타트(Hallstatt)의 마을 광장까지 따뜻한 불빛들과 글뤼바인(Glühwein) 향기,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요정들의 나라로 변신시켜 준다.
크리스마스 마켓에 들어서자 반짝이는 조명 아래 천천히 돌아가는 회전목마 위의 어린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광장 중앙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주위로 늘어선 백여 개의 작은 부스들에는 베네치아잔(Venetian glass)으로 만든 초, 리넨(Linen)으로 된 천, 정성스럽게 만든 핸드메이드 장식품 등 여러 물품들의 매대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코로바이(Korovai, 따뜻한 빵), 렙쿠헨(Lebkuchen, 진저브레드 쿠키), 케제크라이너(Käsekrainer, 치즈가 들어간 소시지) 같은 음식들이 추운 날씨 속에서도 따뜻하게 해주었다.
오스트리아 겨울 풍경은 클림트와 실레의 작품처럼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느껴지는 따뜻함 그리고 예술과 사람들 사이에서 교감하는 순간들.
크리스마스 마켓의 따뜻한 빛과 향기, 음악이 차가운 겨울 공기와 어우러져 잊지 못할 순간을 만들어준다. 유럽에서 겨울을 맞이한다면 오스트리아만큼 매력적인 곳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