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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서랍속여행기억] 거장들이 남긴 유산 위에_ 마드리드
2026.01.12 링크주소 복사 버튼 이미지 페이스북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카카오톡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X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링크드인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인쇄하기 버튼 이미지
내 서랍 속의 여행 기억 마드리드

“De Madrid al Cielo(데 마드리드 알 씨엘로)”라는 표현이 있다. 마드리드 다음에는 오직 하늘, 즉 천국 밖에 없다는 뜻이다. 한 번 보고 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과장 섞인 애정의 표현이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는 마드리드 사람들의 자부심이 담겨 있다.

스페인 지도를 펼쳐보면 그 자부심이 이해된다. 스페인 한 가운데, 내륙의 고원 위에 자리한 마드리드는 북쪽의 카스티야와 남쪽의 안달루시아, 동쪽의 바르셀로나와 서쪽의 포르투갈 국경을 잇는 교차점이자, 정치·행정의 중심지다.

축구 팬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Real Madrid(레알 마드리드)’에서 ‘Real’은 영어의 ‘진짜’가 아니라 스페인어로 ‘왕실의, 로열’이라는 뜻이다. 1902년 ‘마드리드 축구 클럽(Madrid Football Club)’으로 출발했는데, 1920년 알폰소 13세가 왕실 후원을 허가하면서 ‘왕실(Real)’ 칭호를 하사받았다. 그때부터 축구단 엠블럼 위에 왕관이 올라갔다. 그러니까 레알 마드리드라는 이름은 왕이 인정한 마드리드의 클럽이라는 점을 정면에 건 셈이다.

나무와 곰

그런데 의외로 마드리드의 상징은 태양도, 왕관도 아닌 곰과 나무 한 그루다. 13세기 중반, 마드리드시와 가톨릭교회가 숲과 목초지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었는데, 왕실의 중재로 숲은 시가, 목초지는 가톨릭교회가 관리하는 것으로 되었다. 이 후로 도시 문장에는 숲을 대표하는 동물인 곰과 그 숲을 상징하는 마드로뇨(madroño) 나무가 함께 그려지기 시작했다. 마드로뇨는 서양 산딸기 나무다. 지금도 마드리드의 방패와 깃발, 간판 곳곳에 등장한다. 푸에르타 델 솔(Puerta del Sol) 광장 한 쪽에 있는 ‘곰과 마드로뇨 나무 동상’은 이러한 마드리드의 역사를 형상화한 것이다.

푸에르타 델 솔 광장 바닥에는 스페인 모든 도로의 기준점이 되는 ‘0㎞’ 표식이 있다. 스페인 곳곳으로 이어지는 10개의 도로가 모두 이곳에서 시작하며, 이 표식을 밟고 지나가면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올 수 있다는 속설 때문인지 수많은 관광객과 현지인들이 꼭 찾는 포인트다.

마드리드 왕궁과 구시가지, 마요르 광장 등 주요 관광지와도 가까워 마드리드 관광의 필수 코스이며,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을 중심으로 그란비아 거리, 안톤 마르틴 지하철역 등 도시의 주요 시설들이 방사형으로 연결된다. 1768년 우체국으로 지어졌지만 현재는 마드리드 지방 정부 본사인 ‘레알 카사 데 코레오스(Real Casa de Correos)’ 역시 이 광장을 둘러싼 건물 중 하나다.

16세기 펠리페 2세가 톨레도를 대신해 마드리드를 수도로 정한 뒤, 마드리드는 거대한 스페인 제국의 모든 신경망이 모여드는 심장이 되었다. 특히나 마드리드의 건축은 도시의 역사를 말해준다. 18세기 카를로스 3세는 마드리드를 스페인 뿐 아니라 유럽의 수도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갖고 프라도 미술관, 알칼라 개선문, 왕립 천문대, 산프란시스코 엘 그란데 바실리카 교회 등을 지었다고 한다.

마요르 광장

마드리드의 광장들도 건축 역사와 괘를 같이 한다. 마요르 광장은 1580년에 펠리페 2세가 계획을 세웠고, 1617년 펠리페 3세의 통치 하에 건설이 시작되어 1619년 완성된 르네상스 광장이다. 처음에는 시장으로 설계되었지만 사회, 정치, 문화 행사가 열리는 공공 공간으로 빠르게 변모했다. 3층 건물에 둘러싸인 사각형 평면은 중세 광장의 무질서함과는 다른 규칙성과 질서를 보여준다.

겨울과 초봄 사이, 2월 마드리드 여행은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

마드리드는 미술관의 도시다. 피카소는 마드리드에서 예술의 기초를 닦았고, 고야는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달리, 로르카, 부뇰 같은 거장들 역시 마드리드의 문화 살롱에서 만나 밤새 예술을 두고 논쟁하고, 서로 영감을 주고받았다. 이들의 창작 정신이 얼어붙지 않도록 온기를 불어넣은 배경에는 늘 마드리드가 있었다. 푸른 플라타너스가 줄지어 선 프라도 거리, 그리고 ‘황금 트라이앵글(Golden Triangle of Art)’이라 불리는 미술관 지대를 둘러보면 마드리드가 왜 거장들의 도시로 불리는지 이해하게 된다. 무엇보다 마드리드에서 예술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에는 이보다 완벽한 코스가 없다.

황금 트라이앵글은 프라도 미술관,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이 세 곳을 말한다. 르네상스부터 현대 아방가르드까지, 유럽 미술사를 관통해서 볼 수 있는 미술관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삼각형을 이루며 서 있다.

프라도 미술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이다. 아침 일찍 도착해서인지 아직 차량이 많지 않은 돌길 위로 서늘한 공기가 은근히 올라온다. 입구 앞에 있는 벨라스케스 동상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고전 회화의 세계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프라도 미술관은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유럽 회화를 집중적으로 소장한 고전 미술의 성당 같은 곳이다. 15세기 이후 스페인 왕실이 수집한 작품을 중심으로 5,000점이 넘는 회화와 수천 점의 판화, 조각, 장식 예술품을 품고 있으며, 루브르 박물관, 대영박물관, 에르미타주 박물관 들과 더불어 세계 미술관으로 꼽힌다. 다른 미술관들과 달리 약탈품이 거의 없는 미술관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유화 물감 냄새 대신 역사 교과서의 종이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Las Meninas)> 앞에서는 사람들이 한 발짝씩 거리를 두고 서서, 마치 성당의 제단을 바라보듯 조용히 그림을 감상한다. 고야의 이른바 ‘검은 그림들’, <1808년 5월 3일>과 <카를로스 4세의 가족>, 보스의 <쾌락의 정원>에서는 한 시대의 공기와 권력, 두려움이 눈앞에서 되살아나는 듯한 묘한 생생함이 느껴진다.

프라도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은 건축적으로도 훌륭한 하나의 작품이다. 1819년에 완공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로, 정면은 규칙적이고 대칭적인 구성이 거대한 포르티코(portico)와 어우러져 위엄을 드러낸다. 반면 내부는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이 미묘하게 조절되어 회화를 보기에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낸다. 복도의 동선과 갤러리 공간의 크기, 천장 높이까지 모든 것이 그림을 보기 위한 건축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설계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지는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ía)이 있다. 한때 사바티니 병원으로 쓰였던 건물을 개조한 곳이다.
투명한 유리 엘리베이터와 현대적인 증축관이 더해지면서 오래된 벽과 새로운 구조물이 공존하는 공간이 되었다.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을 비롯해 19세기 말부터 21세기에 이르는 스페인 현대미술과 전위 예술이 중심을 이룬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내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 심장부에는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있다. 스페인 내전 중 게르니카 폭격을 계기로 그려진 거대한 흑백 캔버스는 1992년부터 이곳에 자리잡았다. 이 작품은 마음이 저절로 경건해진다. 말로 옮기기 힘든 비명과 파편, 부서진 말, 아이를 안은 어머니의 울부짖음이 한 화면에 응축되어 있어, ‘예술이 역사를 증언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하게 된다.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많은 이들이 프라도 미술관과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만 보고 돌아가지만, 사실 황금 트라이앵글을 완성하는 마지막 꼭짓점은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Museo Nacional Thyssen-Bornemisza)이다.
부호 티센 가문이 수집한 개인 컬렉션으로 출발해, 지금은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약 700년에 걸친 800여 점의 작품을 폭 넓게 소장하고 있다. 프라도의 고전과 레이나 소피아의 현대 사이, 중세 종교화와 초기 르네상스부터 인상주의와 20세기 초반 회화까지. 그 중간의 빈틈을 촘촘히 메워주는 미술관이라고 할까.
반 고흐, 모네, 드가, 호퍼에 이르기까지 유럽과 미국 회화의 ‘하이라이트’만 모아놓은 인생 플레이리스트 같은 곳이라 작품 제목을 몰라도 ‘어, 이 그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하는 순간이 끊임없이 찾아온다.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은 주택을 개조한 사립 미술관 같은 친밀함이 있다. 긴 복도를 따라 연대기 순으로 이어지는 방들은 마치 어떤 집 안을 거닐며 세기의 미술사를 훑어보는 기분이 든다. 미술관을 나설 때는 어느 새 시간 여행을 하고 돌아온 듯한 가벼운 피로와 묘한 충만함이 함께 남는다.

이 세 곳을 하루에 모두 몰아보는 것은 사실상 무리다. 그래서 마드리드 사람들은 황금 트라이앵글을 ‘기어코 다 봐야 할 코스’라기보다, 며칠에 나누어 산책하듯 천천히 음미하는 여정으로 즐기라고 조언한다. 세 미술관은 파세오 델 아르테(Paseo del Arte)패스라는 통합 티켓으로 묶여 있어, 한 번 끊어두면 일정 기간 동안 각 미술관을 나눠 방문할 수 있다. 마드리드에서 예술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황금 트라이앵글을 천천히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반은 이미 완성된 셈이다.

마드리드의 2월은 황금 트라이앵글만으로는 부족하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전시장으로 변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마드리드를 디자인의 수도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목표 아래, 매년 2월이면 마드리드 디자인 페스티벌(Madrid Design Festival)이 열린다.

마드리드 디자인 페스티벌

거리 곳곳에는 축제 배너가 걸리고, 미술관·갤러리·학교·쇼룸 등에서 200개가 넘는 전시와 토크, 설치 작품이 동시에 진행된다. 작은 카페의 유리창에는 신진 그래픽 디자이너의 포스터가 붙어 있고, 디자인 학교 스튜디오 창가에는 의자와 조명, 텍스타일 프로토타입들이 창틀 밖으로 밀려 나올 듯 빽빽이 놓인다. 파세오 델 프라도 인근의 어느 전시장에서는 ‘빛’을 주제로 한 조명 설치가 어두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LED와 유리, 섬유가 만들어낸 묘한 조합이 마드리드라는 도시의 또 다른 언어로 번역해 들려주는 것만 같았다.

국제현대미술박람회

유럽에서 가장 큰 현대미술 축제 중 하나로 꼽히는 국제현대미술박람회(ARCOmadrid/ Feria Internacional de Arte Contemporánea) 역시 이때 열린다(2026년에는 3월 4일부터 8일까지 예정). ARCO는 말 그대로 ‘현재진행형 예술’을 보여주는 무대다. 수많은 갤러리와 실험적인 프로젝트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수집가와 예술가, 큐레이터와 평론가들이 한꺼번에 마드리드로 몰려들어 창의성과 영감의 도가니를 만든다. 1982년에 시작된 이 아트페어는 이제 스페인을 대표하는 현대미술 시장 플랫폼이자, 국제 아트 신의 중요한 허브로 자리 잡았다.

국제현대미술박람회

거대한 전시장 안에는 수많은 부스가 줄지어 있고, 그 안에 설치와 영상, 퍼포먼스 아카이브, 데이터 기반 작업까지 온갖 현대미술이 폭발하듯 모여 있다. 작품을 보는 재미만큼이나 사람을 보는 재미도 크다. 검은 재킷에 스니커즈를 신고 부스 사이를 누비는 큐레이터들, 도록을 손에 들고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는 컬렉터 커플, 과제 노트를 들고 메모를 빼곡히 적어가는 건축학도들까지. 부스마다 개성 넘치는 마드리드 사람들을 스케치해보는 기분이 든다.

마드리드 카니발

마드리드의 2월을 이야기할 때 마드리드 카니발(Carnaval de Madrid)도 빼놓을 수 없다. 화려하게 폭발하는 카니발은 아니지만, 재치있는 분장과 동네 축제 같은 분위기로 도시 곳곳을 들뜨게 만든다. 보통 참회 화요일 직전 주말부터 재의 수요일까지, 마타데로 마드리드와 마드리드 리오 일대가 퍼레이드와 음악 공연, 아이들을 위한 워크숍으로 북적인다.

마드리드 카니발 정어리 장례식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정어리의 장례식(Entierro de la Sardina)’은 꽤 기묘하다. 재의 수요일, 장례 행렬을 흉내 낸 퍼레이드가 마드리드 시내를 가로질러 행진한 뒤 상징적인 정어리 모형을 불태우거나 땅에 묻는데, “지난 시간을 흙에 묻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의식은 독재 정원 시기 한 때 금지되었다가 1960년대 이후 다시 부활해, 지금은 겨울의 끝과 사순절의 시작을 함께 맞이하는 마드리드 특유의 냉소적 유머와 아이러니가 응축된 카니발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17 마드리드

마드리드 사람들은 매일 거장들이 남긴 유산 위를 걷는다. 왕궁의 웅장한 실루엣을 올려다보고, 프라도 미술관에서 명작과 눈을 마주치고, 골목 모퉁이에서 불쑥 나타난 벽화를 바라본다. 세계적 수준의 미술관과 전시, 페스티벌과 공연이 일 년 내내 이어지며 마드리드를 움직인다.

마드리드는 지금도 예술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도시다. 끝나지 않은, 그래서 계속 거장들을 끌어당기는, 오늘도 살아 숨 쉬는 예술의 도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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