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리포트

[예술로의 초대] 삶보다 무거운 사랑
2021.01.27 페이스북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트위터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링크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여행을 하면서 마주치는 잠깐의 풍경과 만남들이
과수원에서 한입 깨무는 신선한 사과의 느낌이라면,
오르세 미술관이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만나는 거장의 예술작품들은
셰프가 재료를 정성껏 선별하고 공들여 만든 일품요리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마음에 오래 남는 여행의 다채로운 맛, 그것이 여행을 기다리는 이유가 되지요.

[예술로의 초대]에서는 여행이 고픈 여러분들에게
사랑받는 명작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여행 입맛을 돋워 드립니다.
해외 여행이 다시 활발해지면, 꼭 직접 감상해보시길!

모딜리아니 ‘잔 에뷔테른’

갸름하고 긴 얼굴과 긴 팔, 아몬드형의 표정 없는 텅 빈 파란 눈과 긴 코.
이 초상화는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잔 에뷔테른(1898-1920), 1919, 캔버스에 유채, 91.4 x 73㎝,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항구 도시 리보르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미술 공부를 한 모딜리아니(1884~1920)는 1906년 초 고향을 떠나 수많은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예술의 도시 파리에 도착한다.

당시 파리는 후기인상주의, 야수파, 입체주의 등 다양한 현대미술이 태동하던 시기였다. 이런 새로운 움직임에는 사진의 발명과 일본의 판화, 아프리카 가면이 큰 영향을 미쳤는데, 모딜리아니는 이 중에서도 특히 아프리카 가면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원시 아프리카 가면처럼 대상의 특징을 잡아 간결하게 양식화한 모딜리아니의 작업은 1908년에서 1914년까지 지속한 조각 작업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우리는 대부분 모딜리아니를 얼굴과 목이 긴 갸름한 여인의 초상으로 기억하지만, 모딜리아니 자신은 조각가이기를 더 소망했다. 1909년 조각가 브랑쿠시를 만난 모딜리아니는 그에게 조각을 배우며 본격적으로 조각 작업에 매진한다. 그러나 그림도 잘 안 팔리고 조각은 더더욱 팔리지 않았다. 작품에 필요한 석재를 구입할 돈이 없어 파리 지하철 공사장에서 돌을 훔쳐오기에 이르렀고 결국 1914년 이후 조각은 포기한다.

오래 작업하지는 않았지만 모딜리아니 그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가냘프고 긴 얼굴과 목은 이미 그의 조각 작업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2016년 프랑스 릴 현대미술관의 모딜리아니 회고전, 2018년 4월에 막을 내린 런던 테이트 모던의 모딜리아니 회고전 등 모딜리아니 특별전에서는 이런 그의 조각 작품을 재조명했다.

회화든, 드로잉이든, 조각이든, 모딜리아니의 주된 관심사는 아무래도 인물, 사람의 얼굴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을 도와주던 화상과 자신이 사랑한 여인들의 초상을 많이 남겼다. 당대의 많은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모딜리아니도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린 것으로 유명한데, 그 많은 여인 중 그의 뮤즈로 꼽을 수 있는 여성은 영국 출신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 베아트리스 헤이스팅스(1879~1943)와 그의 마지막 연인 잔 에뷔테른이다.

모딜리아니의 첫 공식적 뮤즈로 여러 작품에서 모델로 등장하는 베아트리스는 지적이고 진보적인 예술가로, 그들이 함께한 2년간은 싸움이 잦을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모딜리아니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겼으나 그가 친자임을 부정하자 아이를 지워버렸고, 훗날 60대 중반에 암 진단을 받자 스스로 생을 마감해버린 매우 자아가 강한 여성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초상화의 주인공이자 모딜리아니의 마지막 연인인 잔이 있다. 비극적인 결말로 막을 내리는 대표적인 비운의 사랑 이야기를 꼽자면 늘 빠지지 않는 것이 모딜리아니와 잔의 이야기다.

1917년 봄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모딜리아니는 이미 서른이 훌쩍 넘은 아저씨요, 잔은 아직 스무살도 안된 열아홉 꽃띠 아가씨였다. 그들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열렬히 사랑하며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앓아온 결핵과, 그럼에도 끊임없이 마셔대는 술, 약물 중독으로 모딜리아니의 건강은 나날이 악화됐다.

동료 작가와 화상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결국 1920년 1월 24일 저녁, 그는 파리의 한 자선병원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로부터 만 하루를 겨우 넘긴 다다음 날 새벽, 몇 달 후 둘째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있던 잔은 사랑하는 남자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부모님 댁 6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생을 마감해버렸다.

그 어떤 사랑이 이보다 애처로울 수 있을까. 지금은 세기의 대가로 사랑받고 있지만 당대에는 비평가와 몇몇 화상에게만 인정받으며 생활고에 시달렸던 화가, 병약하고 술과 여자 그리고 예술을 사랑했던 비운의 작가 모딜리아니.

그가 남긴 꽤 많은 잔 에뷔테른의 초상화 중 굳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을 고른 것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 잔이 더 부드럽고 편안해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색감이나 세련된 감각으로 보자면 몇 해 전 소더비에서 3,850만 9,000파운드에 팔린 ‘(스카프를 두른) 잔 에뷔테른’이 우리의 눈을 먼저 잡아끈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품속에서 떠나보내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결국 배 속의 아이는커녕 이제 갓 돌이 지난 딸도 잊은 채 그를 따라가는 편을 선택하는, 그저 자신의 사랑에 충실한, 한없이 따뜻하고 해맑은 여인. 그리고 그런 그녀를 포착해 그려낸 그녀의 남자. 뉴욕에서 만날 수 있는 잔의 모습에서는 그런 따뜻한 사랑이 느껴진다.

모딜리아니 ‘잔 에뷔테른’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글_ 임은신
그림을 찾아가는 시간 dorossy 대표,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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