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리포트

[예술로의 초대] 모두에게 행복한 선물이 된 그림
2020.11.11 링크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여행을 하면서 마주치는 잠깐의 풍경과 만남들이
과수원에서 한입 깨무는 신선한 사과의 느낌이라면,
오르세 미술관이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만나는 거장의 예술작품들은
셰프가 재료를 정성껏 선별하고 공들여 만든 일품요리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마음에 오래 남는 여행의 다채로운 맛, 그것이 여행을 기다리는 이유가 되지요.

[예술로의 초대]에서는 여행이 고픈 여러분들에게
사랑받는 명작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여행 입맛을 돋워 드립니다.
해외 여행이 다시 활발해지면, 꼭 직접 감상해보시길!

르누아르 “피아노 치는 소녀들”

프랑스의 근대 화가 르누아르는 아마도 피카소, 고흐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지고 사랑받는 화가가 아닐까 싶다. 2009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대규모 회고전 <행복을 그린 화가: 르누아르>전에 6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갔다는 믿음직한 풍문은 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수치로 보여준다.

피에르ㅡ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아노 치는 소녀들, 1892, 캔버스에 유채, 116×90㎝,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그 회고전에서도 전시된 ‘피아노 치는 소녀들’은 르누아르가 처음으로 정부의 주문을 받아 제작했다는 그림. 그런데, 지금 우리 눈앞의 이 작품은 2009년에 서울에서 본 작품은 아니다. 당시 전시를 본 사람들은 ‘어? 맞는데? 왜 아니라는 거지?’라며 갸우뚱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르누아르가 같은 주제는 물론, 같은 구성과 구도에 거의 비슷한 크기로 그린 작품이 6점이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2009년에 서울에 온 작품은 프랑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피아노 치는 소녀들’이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작품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피아노 치는 소녀들’이다.

1892년, 50대의 중년 화가 르누아르는 정부 미술국의 디렉터였던 앙리 루종으로부터 뤽상부르그 미술관을 위한 그림을 주문받는다. 뤽상부르그 미술관은 당시 ‘살아 있는 작가들의 미술관’이라 불리던, 프랑스 최초의 국립 현대 미술관이다.
본래 정식 회화 공부를 한 것이 아닌, 도자기공이자 장식미술 장인으로 미술의 길에 들어선 르누아르는 태생적으로 고전적이거나 아카데믹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기에(혹은 못했기에) 당연히 아카데미와 살롱에서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빛과 색채를 다루는 능력, 풍부한 색감과 표현력으로 모네와 마네, 세잔, 바지유, 드가, 카유보트 등 동료 화가와 젊은 화상들에게 인정받으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1870년대 중반에는 그가 그려내는 아름답고 생기발랄한 파리의 신여성, 파리지엔느의 모습이 부르주아에게 사랑받게 되면서 후원자와 고정 고객층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890년대 초반에 그의 그림을 사랑했던 시인 말라르메의 추천으로 권위 있는 뤽상부르그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기에 이른 것이다.

처음으로 정부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은 르누아르는 당연히 온 힘을 다해 그림을 그렸다. 그는 여러 주제로 다양한 작품을 그리지 않고, 미세한 차이를 두며 거의 비슷한 작품을 여러 점 그렸다. 그 그림 중 정부 대표로서 루종이 선택해 뤽상부르그 미술관에 걸었던 작품이 바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피아노 치는 소녀들’이다.
이 작품이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까닭은 프랑스의 국립 컬렉션 소장 정책 때문인데, 작품이 제작되었을 당시에는 ‘현대 미술 작품- 동시대 미술 작품’이었지만, 이제는 ‘근대 미술’로 분류돼 1848~1914년 사이에 제작된 작품을 주로 관리, 전시하는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된 것이다.
이때 르누아르가 그린 ‘피아노 치는 소녀들’은 유화 5점과 파스텔 1점 등 총 6점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하나는 지금 말한 대로 오르세 미술관에, 한 점은 오랑주리 미술관에, 또 다른 한 점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그리고 나머지 그림들은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개인 소장가의 작품을 제외하고라도, 같은 듯 다른 세 작품을 비교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오르세 미술관 버전은 분위기는 제일 부드럽지만 살짝 덜 그린 느낌이 들고(실제로 이 작품은 화가 자신이 마지막까지 소장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직 덜 그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메트로 폴리탄 버전은 색이 좀 더 화려하고 진하다. 아마도 그때그때 작가의 심리적 변화나 주변 환경의 변화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르누아르는 이 그림을 통해 그의 주특기인 행복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그려냈고, 이는 우리 모두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것이다. 르누아르는 이 그림을 정부에 팔고 얼마 후 부인 알린느의 고향인 에수아에 작은 집을 한 채 샀는데, 집의 가격은 당시 농부의 10년 치 벌이에 해당하는 4,000프랑이었단다. 이 집을 르누아르의 증손녀로부터 구매해 르누아르가 살던 시절의 집과 아틀리에의 모습을 재현해 지난해 ‘르누아르의 집’으로 새롭게 개관한 에수아 시에 따르면, ‘피아노 치는 소녀들’의 판매가와 이 집의 구매가가 일치한다고 한다. 그림 한 점을 팔아 집을 한 채 산 셈이다. 혁신과 고전 사이에서 고민하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던 중년의 화가에게 이 그림이 참으로 큰 선물을 준 것이 아닐까 싶다.

르누아르 ‘피아노 치는 소녀들’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글_ 임은신
그림을 찾아가는 시간 dorossy 대표,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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