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전문가칼럼

[영혼의 식탁] 가스파초
2019.07.30 링크 공유하기 버튼 이미지

차가운 감기약, 스페인의 여름 보양식
가스파초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름 보양식’하면 땀을 뻘뻘 흘리며 다소 고통스럽게 뜨거운 음식을 먹는 것이 정석이라는 생각이 뇌리에 박혀 있다. 뜨거운 더위를 더 뜨거운 음식으로 이겨낸다는 ‘이열치열’의 논리다. 한의학적으로도 더운 여름에 뜨거운 음식으로 기를 보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에서 우리와는 정반대 개념으로 차가운 여름 보양식으로 1,300여 년을 지내온 나라도 있다. ‘정열의 나라’ 스페인이 그곳이고, ‘가스파초(Gazpacho)’가 그 음식이다.

이슬람에서 유래했으나 스페인의 전통 음식이 된 차가운 채소 수프, 가스파초
이슬람에서 유래했으나 스페인의 전통 음식이 된 차가운 채소 수프, 가스파초

가스파초를 처음 먹어본 건 10년 전 요리 매거진에서 일할 때였다. 당시 어린 나이로 뉴질랜드에서 요리를 배우고 한국에 들어온 이진호 셰프(재즈를 사랑해 ‘재즈 요리사’라고 불린다)를 통해서였다. 그의 집에서 조촐한 파티가 열렸고,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내어준 첫 번째 요리가 가스파초였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아 미리 냉장고에 넣어 차갑게 해둔 가스파초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눠주며 그가 설명했다. “스페인의 전채요리인 차가운 채소 수프예요. 뉴질랜드에서 살면서 감기에 걸리거나 감기에 걸릴 것 같으면 이걸 먹곤 했죠.”

고춧가루 팍팍 풀어 넣은 뜨거운 콩나물국이 아닌 이 차가운 수프가 감기약이라니, 더구나 수프는 우리에게 호호 불며 먹는 뜨거운 음식이거늘. 그의 설명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맛은 더 인상적이었다. 새콤달콤하면서 간이 딱 맞고, 채소들의 싱그러운 맛과 향이 입안에 퍼지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첫 경험 이후로 수많은 레시피의 가스파초를 맛보고 지금도 먹고 있지만 감기에 걸렸을 때 생각날 정도는 아니다. 언젠가 스페인에 가게 되어 레스토랑이 아닌, 스페인 할머니가 집에서 직접 만들어주는 가스파초를 먹는다면 그렇게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가스파초는 차가운 채소 수프다.”

토마토가 주재료이며 오이, 마늘, 파프리카 등의 채소를 곱게 갈아 신선한 올리브유와 식초를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해 냉장고에 넣어두고 차게 먹는 음식이다. 비교적 만들기도 쉽다. 지지고 볶으며 불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없는 것만으로도 땀이 식는 것 같다고나 할까?

전통적 조리법에 따르면 가스파초를 만들 때는 불을 쓰지 않고 각종 재료를 곱게 갈아 간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전통적 조리법에 따르면 가스파초를 만들 때는 불을 쓰지 않고 각종 재료를 곱게 갈아 간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가스파초는 스페인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스페인의 여름 더위는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다. 보통 40℃가 넘고, 남부 지방은 최고 47℃를 넘길 때도 있다. 이런 살인적인 더위에 ‘이열치열’이란 말을 갖다 붙이는 건 비인간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불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만드는 가스파초가 스페인의 국민 여름 보양식이라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대목이다.

또 스페인 발렌시아주의 작은 마을 부뇰에서는 매년 8월 마지막 주 수요일(올해는 8월 28일에 열린다, www.tomatina.es)에 토마토 축제, ‘라 토마티나(La Tomatina)’가 열린다. 길거리에서 서로 토마토를 던지며 즐기는 축제로, 매년 40톤가량의 토마토를 사용한다고 하니 이쯤 되면 ‘토마토 강국’이라 하겠다. 가스파초가 스페인의 국민 여름 보양식이라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두 번째 대목이다.

토마토 값이 폭락해 화가 난 농부들이 시의원들에게 토마토를 던진 데서 시작된 '라 토마티나'
토마토 값이 폭락해 화가 난 농부들이 시의원들에게 토마토를 던진 데서 시작된 ‘라 토마티나’

“가스파초는 원래 이슬람 음식이자 노동자의 소울푸드다.”

아라비아어로 ‘젖은 빵’이라는 뜻의 가스파초는 8세기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할 당시 남부 지방 안달루시아의 살인적인 여름 더위를 이겨내기 위해 만들었는데, 이내 농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일꾼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요깃거리가 되었다.

일꾼들은 더운 여름 아침 일하러 갈 때 밭에서 직접 딴 채소와 마늘, 묵은 빵, 올리브오일, 식초 그리고 절구와 절굿공이를 챙겨가 갈아먹었던 것. 16세기, 스페인에 토마토가 전파되고 한참 뒤인 19세기에 기존 레시피에 토마토가 추가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며 스페인 전통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가스파초는 영양학적으로 완벽한 한 그릇이다.”

토마토가 많이 생산되는 스페인, 여름이면 폭염이 극심한 스페인, 올리브가 많이 생산되는 스페인 남부 지역 안달루시아… 단지 이런 단순한 이유로 가스파초가 탄생했다고 하기에는 영양학적으로도 손색없는 여름 보양식이다. 이럴 때 쓰는 말이 ‘선조들의 지혜’라는 말이다.

토마토에는 ‘라이코펜’이라는 영양소가 풍부하게 들어 있는데,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는 우리 몸의 ‘활성산소’를 제거해주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또한 비타민 C는 가열로 인해 파괴되는데, 가스파초는 불을 쓰지 않기 때문에 각종 채소가 함유한 비타민 C를 고스란히 섭취할 수 있다.

토마토 없이 브로콜리, 오이, 민트, 비트 등을 사용해 만드는 다양한 가스파초
토마토 없이 브로콜리, 오이, 민트, 비트 등을 사용해 만드는 다양한 가스파초

‘최애’ 영화 중 하나인 <소울 키친>에 이런 장면이 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한 손님이 따뜻한 가스파초를 요구한다. 이 레스토랑 셰프인 ‘샤인’은 “가스파초는 원래 차갑게 먹는 음식이며, 뜨거운 가스파초는 없다”라고 완강하게 말하며 손님의 요구를 거절한다.
“따뜻한 가스파초는 전통을 무시한 요리”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샤인은 해고를 당하게 된다. 가스파초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드러나는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올 여름, 영화 속 샤인이 주장한 대로 스페인의 정서와 자부심을 고스란히 담은 차가운 가스파초로 이색적인 여름 보양식에 도전해보는 건 어떨까?

글_ 김수영
10여 년간 여성지 기자로 일하다 요리 전문 매거진에서 미래를 찾았다. 현재는 프리랜스 푸드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으며, 각종 요리 관련 브랜드 기획과 레시피북 제작 등을 하고 있다.

대한항공 운항 정보

인천 ~ 마드리드 주 4회(화·목·토·일) 직항 운항

인천 ~ 바르셀로나 주 4회(월·수·금·토) 직항 운항

※ 자세한 스케줄은 대한항공 홈페이지(www.koreanair.com)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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