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을 하다보면 낯선 땅에서 낯익은 것을 발견하는 묘한 재미가 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Ulaanbaatar)가 그랬다. 바람과 초원을 상상했는데, 공항에 내리자마자 입국 심사관이 여권을 보더니 “안녕하세요”라고 한국어로 인사했다. 한국어를 여기서 듣다니.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몽골 한가운데서 도심으로 들어서자 ‘서울 스트리트’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름부터 ‘서울’을 외치는 이 거리는 익숙한 한글 간판들로 채워져 있어 흡사 서울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골목 여기저기서 K팝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고, 익숙한 김밥과 한국 치킨 냄새가 솔솔 풍겼다.
그렇게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 여정은 뜻밖의 익숙함을 만나며 시작되었다. 몽골 인구의 절반이 몰려 사는 울란바타르는 세계에서 가장 추운 수도다. 겨울이면 영하 40도까지 기온이 내려간다. 1639년 이동식 천막 도시로 시작해 1924년에 몽골 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붉은 영웅(Red hero)’을 뜻하는 울란바타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울란바타르’라는 이름은 혁명 영웅 담딘 수흐바타르(Damdiny Sükhbaatar)를 기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콘크리트 사이 남겨진 옛 소련의 흔적들
울란바타르에는 여전히 옛 소련의 흔적이 묵직하게 남아 있다. 몽골은 1911년 청나라 붕괴 직전 독립을 선언했지만 불안정한 시기를 겪다 소련의 개입으로 새로운 길을 열었다. 1921년 소련의 손을 잡아 중국을 몰아내며 독립을 쟁취했고, 1924년에는 세계 두 번째 공산주의 국가로 거듭났다.
소련의 그림자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수흐바타르 광장이다. 몽골 현대사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는 이곳은 원래 몽골 제국의 영광을 기리는 칭기즈 칸 광장(Chinggis Khaan Square)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1921년 혁명의 주역 담딘 수흐바타르를 기리고자 그의 이름을 붙였다. 수흐바타르가 이끄는 혁명군이 1921년 이곳에서 승리를 선언하며 몽골 인민공화국의 초석을 다졌고, 이후 이 광장이 공산주의 체제의 상징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소련의 영향은 광장의 구도에서도 드러난다. 직선적이고 기능적인 도로망과 주변 건물 배치는 소련식 도시 계획의 전형이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말을 탄 수흐바타르 동상이 팔을 뻗고 있는데, 그 손끝이 가리키는 곳이 어딘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미래였을까, 과거였을까. 아니면 그냥 바람 부는 쪽이었을까. 궁금하지만 답은 오직 그만이 알 것이다.
광장 옆의 정부 청사도 1950년대 소련의 지원으로 지어진 딱딱한 콘크리트 건물이다. 공산주의의 위엄을 과시하듯 서 있다. 하지만 2013년 몽골의 민주화 이후 과거를 재정의하며 칭기즈 칸 동상을 추가로 세우면서 혁명 영웅과 제국 창시자가 나란히 있는 기묘한 상태가 되었다. 소련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공간에 몽골의 뿌리가 다시 스며든 셈이다.
울란바타르의 또 다른 보물, 칭기즈 칸 국립박물관(Chinggis Khaan National Museum)은 2022년 10월 문을 열었다. 이곳은 몽골 제국의 영광과 유목민의 역사를 생생하게 담아낸 공간이다. 2019년 총리 우흐나긴 후렐수흐(U. Khurelsukh)의 결정으로 설립이 추진되었고, 2020년 옛 자연사박물관 터에서 기공식이 열렸다고 한다.
9층 건물의 박물관은 1만 개가 넘는 유물을 전시하며, 훈누 제국부터 20세기 초까지 몽골 왕과 귀족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입구는 칭기즈 칸과 후계자들의 인장이 장식된 파이자(Paiza) 모양이고, 지붕은 몽골 전통 게르를 닮아 이곳이 단순한 건물이 아님을 말해준다.

박물관에 들어서자 청동기 시대 유물부터 시작해 훈누 제국의 금관과 말 장식, 칭기즈 칸의 대제국을 상징하는 화려한 갑옷과 무기에 이르기까지 몽골의 2천 년 역사가 눈 앞에 펼쳐졌다. 눈길을 끈 건 칭기즈 칸이 1246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 보낸 양피지에 쓴 편지 사본이었다.
또 다른 보물은 몽골 여왕 만두카이가 입던 금빛 실이 수놓인 붉은 의복으로, 15세기 몽골을 재건한 여성의 기개를 보여줬다. 만두카이 황후(Mandukhai Khatun, 약 1448년~1510년)는 몽골의 전설적인 여성 지도자로 중국 명나라에 맞서 싸우며, 분열된 몽골 부족들을 통합하고, 몽골의 영광을 되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몽골인들에게 여성 전사이자 통합의 상징으로 깊이 존경 받으며, 오늘날까지도 몽골의 자부심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이 밖에 박물관 중심에 서 있는 칭기즈 칸 황금 동상과 몽골 예술가들이 재해석한 칭기즈 칸 초상화도 눈길을 끌었다. 원나라 시절 금으로 만든 술잔과 일 칸국의 정교한 도자기 조각도 있었는데 몽골이 단순한 유목민의 땅이 아니라 동서양을 잇는 문명의 교차로였음을 증명해주는 듯했다.
투울 강(Tuul River)을 가로지르는 평화의 다리(Peace Bridge, Энхтайваны гүүр)는 울란바타르 도심을 잇는 소련의 또 다른 유산이다. 1958년 소련의 기술 지원으로 건설된 이 다리는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한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몽골의 험난한 지형과 기후를 견디며 도시의 동맥 역할을 해왔다. 소련은 몽골을 완충지대이자 전략적 동맹으로 삼아 기반 시설을 지원했고, 이 다리도 그 일환으로 탄생했다.
당시 몽골 인민공화국은 경제와 군사적으로 소련에 의존했고, 평화의 다리는 소련-몽골 우호를 상징하는 동시에 도시의 산업화를 뒷받침하는 실질적인 연결고리였다. 다리 위에 서서 강변을 내려다보니, 소박한 풍경 속에 스며든 묵직한 역사가 보이는 듯 했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그 바람 속에서 다리가 수십 년간 버텨온 시간이 느껴졌다.
간단 사원의 고요함과 역사
몽골 사람들에게 불교는 일반적인 종교가 아니다. 끝없이 펼쳐진 땅에서 말을 타고 떠돌며 살아가는 유목민들에게 불교는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실 같은 존재였다. 칭기즈 칸 시절엔 샤먼(무당)이 초원의 영혼을 달랬다면, 쿠빌라이가 티베트 불교를 들여온 후로는 불교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1578년 알탄 칸이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불교를 더 깊이 받아들였지만 1920년대 소련의 그림자가 드리우며 불교는 다시 숨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1930년대엔 스탈린의 손에 700개 사원이 잿더미로 변했고, 3만 명 넘는 승려가 사라질 정도로 핍박받은 아픔이 있다.

울란바타르 한가운데 서 있는 간단테그치늘렌 사원(Gandantegchinlen Monastery, 이하 간단 사원)은 이러한 몽골 불교의 살아있는 역사다. 이름부터가 좀 묘하다. ‘간단’은 티베트 말로 ‘위대한 기쁨의 장소’이고, ‘테그치늘렌’은 ‘완벽한 평화’란 뜻이다. 1838년 불교 지도자 제5대 젭춘담바 후툭투가 이곳을 세웠다. 원래는 1809년에 작은 사당으로 시작했는데, 19세기 들어 몽골 불교가 꽃피면서 커졌다. 한때는 건물 100개에 승려 수천 명이 머물던 곳이었다. 1911년엔 제8대 젭춘담바가 여기서 청나라를 몰아내고 독립을 외쳤다. 그때만 해도 이 사원은 몽골의 희망이었다.
하지만 1937년 소련의 칼날은 이곳을 비껴가지 않았다. 건물은 부서지고, 승려들은 끌려가거나 쫓겨났다. 26m의 관세음보살상은 녹여져 총알이 되었다. 그러다 1944년 소련의 손이 느슨해진 틈에 사원이 다시 문을 열었고, 1996년 잃었던 금빛 불상이 다시 서게 됐다. 높이 26.5미터,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실내 불상 중 하나인 금빛 관세음보살은 19세기 말 제5대 젭춘담바 후툭투에 의해 구리와 금으로 만들어졌던 불상이다. 안에는 약초와 경전, 보석 27톤이 들어 있다.
사원에 들어서면 시간이 느려진다. 미그지드 잔라이식 사원이라는 건물에 그 거대한 불상이 서 있고, 승려들이 낮은 목소리로 경을 읽는다. 작은 사당들과 기도 바퀴가 주변을 감싸고, 몽골의 나무 냄새와 티베트의 붉은색이 뒤섞여 있다. 여기서는 불교 대학도 운영되고 있어서 젊은 승려들이 책을 들고 오간다.
간단 사원은 몽골 사람들에게 소련의 억압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마음의 증거다. 수많은 사원이 사라졌을 때 이곳은 버텼고, 다시 일어섰다. 차강사르 같은 축제 때면 사람들이 몰려와 촛불을 켜고 기도를 올린다. 가족의 평화를 빌며 바퀴를 돌리는 모습은 평범하지만, 그 평범함 속에 몽골의 영혼이 담겨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립 공원에 뜬 은하수
보그드 칸 울(Bogd Khan Uul)은 울란바타르에서 차로 30분쯤 달리면 닿는 산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립공원이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도심에서 15㎞ 남짓 떨어져 있는데, 가까운 거리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좀 놀라웠다. 해발 2,261m의 이 산은 울란바타르를 남쪽에서 감싸고 있다.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빽빽하게 자라 있고, 여름이면 야생화가 피어나며 겨울이면 눈이 두껍게 쌓인다. 면적은 416㎢쯤 되는데, 서울의 3분의 2 크기다. 산책로를 걷다 보니 이곳이 도시의 숨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의 기원은 몽골 제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3세기 칭기즈 칸의 후예들이 이 산을 신성한 땅으로 여겨 사냥과 벌목을 금지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러다 공식적으로 보호 구역이 된 건 1783년 몽골 불교의 최고 지도자인 제8대 젭춘담바 후툭투가 이곳을 자연과 영혼의 안식처로 지정하면서부터다. ‘보그드 칸 울’이라는 이름부터가 ‘신성한 칸의 산’을 뜻하며, 몽골의 자연과 불교가 얽힌 깊은 역사를 품고 있다.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이 1872년에야 생겼으니, 이 산은 그보다 100년 가까이 먼저 자연을 지키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역사가 이렇게 깊은 곳이다 보니, 발을 딛는 순간 인류 태초로 되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보그드 칸 울 남쪽 기슭에는 만주스리 사원(Manjusri Monastery)이라는 옛 불교 수도원이 있다. 이 수도원은 지혜의 보살인 만주스리(Mañjuśrī)를 기리기 위해 1733년에 설립되었다. 1750년부터는 젭춘담바 후툭투(Jebtsundamba Khutuktu), 일명 보그드 칸(Bogd Khan)이 직접 관리했다. 전성기에는 20개 이상의 사원이 있었고, 300명 이상의 승려가 거주했으며, 종교 의식에는 1,000명 이상의 승려가 참여하기도 했을 정도다. 금으로 쓴 은판 경전 등 희귀한 불교 경전들도 여기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1921년 몽골 혁명 초기, 수도원의 주지였던 체렌도르지(Tserendorj)는 보그드 칸과 함께 반혁명 활동을 벌였다는 혐의를 받았고, 1924년 보그드 칸 사망 이후 수도원은 사회주의 정권의 박해를 받았다. 1937년 몽골 공산주의 정부에 의해 수도원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53명의 승려(대부분 50~60세 이상)는 체포되어 많은 이가 처형당했으며, 모든 사원이 철거되고 경전은 국립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폐허로 남았지만 보그드 칸 울에서는 관광지이자 하이킹 명소로 자리 잡았다. 복원된 사원 하나와 벽, 건물의 잔해, 불교 신상, 바위에 새겨진 성스러운 비문 등은 여전히 남아있으며, 몽골의 깊은 역사와 불교 유산,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낮에 걷는 것도 좋지만, 보그드 칸 울은 밤에 가야 진짜 얼굴을 보여준다. 빛 공해가 거의 없어 하늘이 투명하게 열린다. 맑은 밤, 산 중턱이나 정상 부근에 올라가면 은하수 하늘이 열린다. 은하수가 그냥 보이는 게 아니라, 하늘 전체를 뒤덮는다. 도시에서 불과 30분 거리인데, 마치 세상 끝에 와 있는 기분이 저절로 들었다. 별빛이 초원 위로 쏟아지는 광경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도시의 소음은 저 멀리 묻히고, 바람 소리만 귀를 채운다. 몽골이 세계 최고의 별 관측지 중 하나라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